- 18권 19화
444화
파지지직-!
어느새, 주변은 보랏빛 기운이 구체의 형태로 사방을 에워싸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본능적인 뒷걸음질 을 친 서연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마음 한편에서 피어나는 공포에서연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려오 기 시작한다.
죽는다.
눈앞의 존재는 우주의 최상위 포 식자 중 한 명이다.
맞서 싸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때문에 몸이 굳어가기 시작했다.
허나 포기할 수는 없었다.
살아남고 싶다.
아직 해보고 싶은 것들도 많았고, 해야 할 일들도 있었다.
생명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본능이 서연을 움직이게끔 한다.
“포기하거라, 너도 알고 있지 않 느냐?”
“……닥쳐.”
내뱉은 말과 달리 육신의 떨림은 멈추지 않았고, 보크루그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번진다.
“헛된 발버둥이다, 나는 행하고 너희는 따른다, 그게 미물들의 운 명이다.”
날름거리던 혓바닥이 부드럽게 서연의 볼가를 핥아낸 후, 서연의 몸을 휘감는다.
두려움은 잠시뿐이었다.
일시적이라지만 비어있던 마음 한편이 차오르며 만족감이 밀려든 다.
동시에, 가까스로 억눌러두었던
감정들이 폭발하기 시작하며 악의 로 가득 찬 말들이 머릿속에 울려 퍼진다.
힘을 받아들이고 집어삼켜라!
은하를 파괴해라.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공허로 만 들어 내는 거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동공이 풀리며 간신히 부여잡고 있던 두 다리가 무너져 내린다.
하나 어째서일까?
서연의 눈앞에 가족들의 얼굴이 스쳐지나간다.
‘이 힘을 받아들이면……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뿐만이 아니었다.
함께 전장을 헤쳐오던 수많은 동 료들,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지만 누구보다도 따뜻한 위로를 건네주 었던 위지율과 함께 보냈던 시간의 풍경 역시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내…… 몸에서 나가.’
이 힘을 받아들이며, 모든 것이 부서져 버릴 것만 같다.
서걱-!
자연스레 그려지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육신을 휘감고 있던 혓바닥 을 잘라낸다.
남아있는 감정은 만족감이 아니 었다.
모든 것을 부정하고 파괴하고 집 어삼키려는 지독한 악의다.
시야 속에는 처참한 전장의 모습 이 들어온다.
그중에는 서연 역시 익히 알고 있는 고대의 존재들도 있었다.
‘위험해.’
고대의 존재들이 훨씬 더 강해졌
과거, 마주했던 이들과는 비교조 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위협적인 기 세.
나름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순 식간에 거리가 멀어졌다.
‘우선 전장을 벗어나야 해.’
어차피 이곳은 버려진 세계다.
피해를 입을 사람들도 없었다.
빠르게 몸을 빼내고, 추후의 싸 움을 대비해야 한다.
허나 상황이 그리 녹록치가 않았다.
“정복왕의 사도여.”
혓바닥을 날름거리고 있는 보크 루그가 서연의 앞길을 가로막는다.
“어째서 내 힘을 거부하는 것이 냐‘?”
보크루그의 음성에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의문스러운, 동시에 잔 뜩 화가 난 듯한 감정이 담겨져 있었다.
그 목소리를 들으며 서연은 머릿 속에 계속해서 울려 퍼지는 악의에 찬 음성들에 귀를 기울였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라고 소리치 던 음성들이, 지금 그 어느 때보다
격렬히 날뛰고 있었다.
먹어치워!
파괴를 손에 넣는 거다!
공허의 힘을 보여주는 거다!
짜릿짜릿하게 머리를 울리는 음 성에 짜증이 난다.
“좀.. 꺼지라고!”
고개를 내저으며 외치자, 머릿속 에 울려 퍼지던 음성들이 거짓말처 럼 흩어졌다.
순간적으로 백색의 기운이 허공 까지 치솟았다.
“정복왕의 사도여, 애써 억누를
필요 없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 이고 바라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다.”
“너도 닥쳐.”
“……부정할수록 너만 괴로워질 뿐이다.”
“제발…… 제발 나 좀 가만히 좀 내버려둬!”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서연은 머 릿속이 그 어느 때보다도 혼란스럽 다고 느꼈다.
억눌러두었던 거대한 악의와, 파 괴 본능들이 폭발하여 괴이한 방향 으로 날뛰려고 하고 있다.
휘이이잉-!
바람이 불어왔다.
그 순간 서연의 머리카락이 회색 빛, 흑색도 아닌 백색으로 물들어 간다.
눈동자 역시 새하얀 백색으로 변 해가고 있었다.
“단순히 대화만으로는 현실을 받 아들이기 힘든가 보군.”
고개를 내저은 보크루그가 거대 한 입을 벌린다.
쿠구구궁-!
거대한 뱀의 형태인 보크루그의
입에서 보랏빛 기운, 파괴의 힘이 넘실거리는 찰나였다.
“그만, 그만! 제발 조용히 좀 하 라고!”
턱-!
입을 열고 파괴의 힘을 발산하려 던 보크루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 었다.
서연의 주변을 자욱하게 감싸는 백색의 기운이 더욱더 강렬해진다.
‘공허의 힘이 빠르게 강해져가고 있다.’
일부러 고대의 힘을 흘리는 것으로 자극을 하여 제한해두었던 감정
들을 폭발시켰다.
세계에서는 부정적인 감정, 악의 라 부르는 것 자체가 고대의 힘들 의 가장 근본적인 힘이다.
억눌러두었던 감정들을 폭발시켜 본능을 이끌어내게 된다면 본래의 힘이 강력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 였다.
‘ 귀찮아졌군.’
공허의 힘 자체는 상당히 위험하 다.
같은 고대의 힘으로 묶여있지만 위험도를 생각하자면, 가장 최상위 라고 볼 수 있는 힘이었다.
심지어 서연에게 공허의 힘을 내 준 것은 우주의 패자라고 불렸던 ‘정복왕’이었다.
고작 감정을 폭발시킨 것만으로 보크루그가 발산하려던 파괴의 힘 을 집어삼켜버렸다.
이 상태로 시간이 더 지난다면 공허의 힘이 완전히 개방될 것이다.
그리고 아직 그를 견딜 준비가 되지 않은 서연의 정신은 붕괴되고, 폭주가 시작될 확률이 높았다.
보크루그의 두 눈에 고심이 깃들 었다.
‘전력을 다한다면 저 폭주를 파
괴해낼 수 있겠지.’
하지만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
고대의 존재들이 바라는 것은 모 든 은하의 파멸이다.
그리고 공허의 힘을 완전히 풀어 헤치는 것으로 폭주하게 된 한서연 이라면 알아서 은하를 파멸시키고 다닐 확률이 높았다.
본래 고대의 존재들이 바라는 목 표를 알아서 이루어 준다는 것이다.
‘하나 이 상태로 단순한 폭주 상 태에 들어가면, 내 뜻대로 제어할 수 없다.’
고대의 존재들이 파멸을 바라는
것은 비단 타 종족, 타 은하뿐만이 아니었다.
동족이라 볼 수 있는 고대의 존재들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지금이야 수많은 은하들이 남아 있어 뜻을 함께하고 있다고는 하나, 만약 대부분의 은하가 파멸을 맞이 하고 고대의 존재들만이 남게 된다 면?
질문에 대한 해답은 그리 멀리 있지 않았다.
당장 주샤콘을 공격하고 있는 다 른 고대의 존재들만 봐도 미래를 알 수 있었다.
마지막 승자로 살아남기 위해서 는 어렵사리 잡은 이 기회를 놓쳐 서는 안 된다.
심지어 이곳에 오기 전 대가를 치러가면서까지 우선순위를 얻어내 고, 나름의 규율을 정하여 온 만큼 다른 고대의 존재들은 절대 개입할 수 없는 상황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머지않은 미래, 다른 고대의 존재들과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위협 적인 힘이 필요했다.
‘정복왕의 힘을 품은 존재라면 분명 훌륭한 전력이 되겠지.’
보크루그는 오랜 고민 끝에 결정 을 내렸다.
전력, 자신이 가진 파괴의 힘을 모두 이끌어낸다.
‘기회가 왔을 때 확실하게 취해 낸다.’
거대했던 뱀의 형태가 인간과 같 은 형태로 변모한다.
비록 크기는 작아졌으나 내뿜는 기세는 더욱더 위협적이다.
쿠구구궁-!
세계 전체가 뒤흔들리며 부서져 간다.
“보크루그, 미친 거냐!”
위지율과 한창 전투를 벌이던 심 연의 거주자가 거친 욕을 내뱉으며 황급히 자리를 벗어난다.
보크루그가 가진 것은 흔하게 퍼 져있는 파괴의 힘들과는 궤를 달리 한다.
고대의 존재로서 살아오며 쌓아 오고 연마해온 파괴의 정수.
혼돈에서 파생된 직계, 가장 근 본적이라 알려진 파괴의 힘이 담겨 져 있었다.
보크루그의 파괴에 닿는 모든 것 은 부서지고, 무너져 내리며 형체
조차 남지 않도록 완벽히 파괴시켜 버린다.
황급히 달아나는 심연의 거주자 의 행보 덕분에 생긴 잠깐의 여유 동안 시선을 돌린 위지율은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서연!”
백색의 기운을 내뿜는 그녀의 상 태가 범상치 않아 보인다.
보크루그의 파괴의 힘을 정면에서 응수해내고 있었지만 아슬아슬 해 보이는 모습이다.
심지어 지금 이 순간에도 보크루 그의 파괴는 더욱더 강력해져간다.
앞서 발산된 힘은 본래 발산하던 파괴를 가장 효율적인 형태로 변환 시킨 것에 불과하다.
거대한 뱀의 형태에서, 긴 꼬리 를 가진 반인반수의 형태로 모습을 바꾼 보크루그가 위지율을 노려보 았다.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떤 위지 율의 눈매가 날카롭게 솟는다.
‘역시 강해.’
용언만으로는 눈앞의 보크루그를 감당할 수 없었다.
위지율은 낮은 울음소리를 흘리 며 고심했다.
‘황금안을 개안해야 하나?’
모든 것을 통찰해낼 수 있는 용 안을 한층 더 성장시킴으로써 얻은 힘.
위지강과 헤쳐 온 많은 전장에서 수많은 마법과 무공, 새로운 힘들을 보는 것으로 개안해낸 비장의 수다.
문제는 모든 것을 꿰뚫어내는 황 금안을 개안할 경우 위지율 역시 이성의 일부가 사라진다는 점이었다.
무언가를 지킨다는 수호룡미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은, 짐승과 다름
없는 형태가 되는 것이다.
애초에 본래 용족 자체가 오만하 면서도 난폭한 성격을 가진 종족이 다.
같은 용족을 제외하고는 다른 존재들에게 악의를 내뿜을 수밖에 없 었다.
‘위지강 놈은 대체 어디서 뭘 하 고 있는 거야!’
전장이 개판이 된 이후부터, 계 속해서 위지강에게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한데 처음 연락을 취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제대로 된 답변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연락 자체가 닿지 않고 있었다.
지난 수천 년간, 위지율의 경험 상 이런 경우는 둘 중 하나였다.
‘고대의 신의 개입 혹은……
위지강이 무언가에 극도로 집중 하고 있을 때뿐이다.
결국 이 상황을 타개하는 것은 스스로 해야 할 일이었다.
하나 이성을 잃고, 오만하고 난 폭한 짐승이 되는 것은 원하지 않 는다.
‘생각해보면, 마지막으로 황금안 을 개안했던 게 천 년 전 이야기
지금이라면 조금 더 이성을 부여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애초에 선택권이 없다.
황금안이 없다면 저 파괴의 힘을 막아낼 수 없다.
결단을 내렸다면 망설여서는 안 된다.
거대한 용의 눈동자가 황금빛으로 물든 것은 순식간이었다.
사르르륵-!
고작 눈동자.
색깔이 바뀐 것만으로 위지율의 기세가 확연하게 달라졌다.
“미친……. 여태껏 힘을 아끼고 있었다고?”
심연의 거주자가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비......켜!”
날카롭게 눈을 부라린 위지율에 게서 홀러나오는 황금빛 기류에 심 연의 거주자는 망설임 없이 등을 돌리어 달아나는 것을 택했다.
“이러면 너무 손해인데.”
이곳에 오기 전 맺은 규율은 우 선 순서와 서로를 방해하지 않는다 는 것뿐이었다.
혹여나 순서가 찾아올 때를 대비 해 보크루그를 돕고 있었지만 전력 을 다하여 도울 필요는 없다는 것 이다.
“……운이 좋은 줄 알아라!”
계산을 끝마친 심연의 거주자가 전장을 이탈한 이후, 위지율은 보 크루그에게 집중한다.
‘천 년 전보다는 나아.’
흐릿해져가는 시야, 용족의 본성 이 폭주하려 했지만 아직 이성을
잡아낼 수 있다.
확실히 천 년이라는 긴 시간 동 안 마냥 정체되어 있던 것만은 아 니었다.
보크루그 역시 그녀의 존재를 느 끼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