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권 14화
439화
영문을 모르겠다는 서준의 표정 에 위지강의 눈이 얇아졌다.
“무극이란 무엇이냐?”
이어지는 질문에서준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한다.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무의 극에 도달하는 것, 모 든 무인이 바라는 경지일 뿐이었다.
앞선 대련 덕분일까?
기이하게도 위지강이 해주었던 말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자연스레 입가로 헛웃음이 흘렀 다.
“싸움입니다.”
복잡하고 난해하게만 느껴졌던 무극을 간단하게 읊어버렸다.
놀라운 점은 이에 화답하듯 내면 의 벽이 짧은 진동을 토하고 있다 는 것이다.
애초에 무극의 근간은 결국 싸움 일 뿐이다.
드높은 경지에 오른 존재들의 싸
움이든, 시정잡배들의 싸움이든 크 게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해서는 똑같다고 말 할 수 있었다.
본인의 신념 혹은 생존을 위하여 치열한 싸움을 해오는 것이다.
아주 오랜 과거, 태초의 우주부 터 이어져 온 본능과 같았다.
지키기 위해 혹은 무언가를 뺏어 내기 위해 싸워왔다.
‘나 또한 마찬가지.’
지키기 위해서, 정확히 말하자면 잃고 싶지 않았기에 싸워 왔다.
때문에 무극이란 경지를 탐내고 도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허나 돌이켜서 생각해보면 무극 이란 것 자체가 여태껏 해왔던 싸 움들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말이 다.
굳이 다른 점을 꼽자면, 기존의 싸움보다 더 본능적이고 원초적이 게 다가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야 이해를 한 것 같구나.”
쾅-!
위지강이 내뻗은 빛의 속도를 뛰 어넘는, 초광속의 일격이 서준의 눈앞에서 폭발했다.
허나 서준의 몸에 닿지는 못했 다.
서준의 팔에 사로잡히게 된 주먹 을 황급히 거둔 위지강이 씩 웃어 보였다.
“몸은 본능적으로 행동하되 머리 는 냉철하게.”
아주 기초적인 것이라고 생각했 다.
애초에 무공이란 것 자체가 몸으로 움직이면서 머리로 생각을 해야 했으니 말이다.
하나 아니었다.
여태껏 오롯이 머릿속으로 생각 하고 행동을 해왔다.
계산하고, 견주고, 조심스레 움직 여왔다.
때문에 본능을 이끌어내지 못했 고, 진정한 싸움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깨달음에 온몸에 전율이 찾아왔 다.
“너를 가로막고 있던 벽의 실체 가 보이느냐?”
“제 자신, 스스로……
웃음을 보인 위지강이 뒷짐을 지
었다.
“이제야 벽을 똑바로 마주했구 나.”
서준은 헛웃음을 홀릴 수밖에 없 었다.
머릿속으로는 이해했지만 육신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뜻 을 확실히 알았다.
즉, 서준은 지금까지 가진 가능 성을 스스로가 막아내고 있었다는 뜻이다.
‘아둔했네.’
무한의 가능성을 얻었음에도 결 국 스스로의 틀과 사고에 가로막혀
서 제대로 활용하지 못해왔다.
다소 자책하는 표정을 저도 모르 게 내비쳤음인가?
“그리 자책할 거 없다, 누구나 거쳐 가는 것이니.”
위지강이 입가에 호선을 그린 채 로 입을 열었다.
“나처럼 뛰어난 스승에게 가르침 을 받고 있으니, 아마 머지않아서 나처럼 잘나질 수 있을 거다.”
“……스승님을 만나기 전에도, 저는 이미 충분히 잘나 있었습니 다.”
“그렇겠지. 스스로 무한의 가능
성을 열어냈으니.”
입가에 미소를 띤 채로 고개를 주억이고 있던, 위지강이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준비는 이만하면 된 것 같으니, 이제 다음 수련으로 넘어가면 되겠 구나.”
“다음 수련이요?”
서준의 눈동자가 반짝 빛을 낸 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끝 없이 대련만 할 줄 알았는데 ‘다른 수련’이라는 말을 들은 것이다.
자연스레 마음 한편에서 기대감
이 부풀어 올랐다.
위지강 덕분에 스스로의 가능성 을 제대로 인지한 상황이었으니 말 이다.
“그래, 네가 억눌러가면서 품고 있는 그 힘 말이다. 나도 제법 잘 알고 있거든.”
“혹시 혼돈기를 말씀하시는 건가 요?”
위지강은 대답 대신 싱긋- 웃어 보인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스스로의 가능성을 인지 한 상황에서 품고 있는 혼돈기마저 증폭시켜 낸다면 분명 내면에서 마 주했던 벽을 부숴낼 수 있을 것이 다.
실제로도 위지강의 말 한마디에 인지만 하고 있던 벽을 제대로 마 주하기 시작했다.
“그 전에 선택지를 고르거라. 느 리고 천천히, 편하게 돌아가겠느 냐? 아니면 빠르지만, 지독하게 고 통스러운 길을 가겠느냐?”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시간은 곧 금이다.
무엇보다도 더 이상 가족들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후자를 택하겠습니다.”
“천마다운 선택이구나.”
입가에 호선을 그린 위지강의 손 에서 흘러나온 검은빛 실이 단숨에서준의 심장을 관통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사태였고, 반 응할 틈도 없었다.
콰직-!
충격과 공포에서준의 동공이 흔 들린다.
이어지는 지독한 고통에는 머리 가 새하얗게 변할 정도였다.
서준의 위협에 반응하듯이 회색 빛 혼돈기가 전신에 폭주하듯이 들 끓어 오른다.
“오랜만이군, 혼돈.”
위지강은 피어오르는 그 힘을 차 갑게 직시했다.
과거 소중한 가족들과 동료들이 있던 은하를 멸망시킨 힘이니, 도 저히 달가울 수가 없었다.
하나 과거의 감정에 얽매여서는 안 되었다.
‘못난 제자 놈에게는 도움이 될 게 분명하거늘.’
과거, 위지강은 혼돈과 싸워왔다.
허나 지금에 와서는 혼돈을 성장 시키려 한다.
“최대한 강해지거라.”
콰아아아—!
서준의 몸에서 들끓어 오르던 혼 돈기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사 방으로 폭발했다.
다소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공통의 관심사를 가지고 있다 보면 쉽게 친해질 수 있기 마 련이었다.
천마라는 공통의 적을 둔 만큼, 서연에게는 위지율이라는 존재가 엄청나게 친근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어느새 손을 맞잡은 채로 걸어 다녔고, 쇼핑을 다니며 갖가지 옷 들과 귀걸이, 반지들을 쉴 새 없이 껴보았다.
“대체 어떻게 이런 영롱한 보석 이 있을 수 있는 거지? 다이아몬드 라는 건 되게 아름답구나, 금액이 얼마라고? 이천사백만 원? 비싼 건 가? 내가 아직 돈의 단위를 잘 몰 라서.”
직원이 옆에서 당황하건 말건 신 나게 떠드는 위지율의 말에서연은 이마를 짚을 수밖에 없었다.
“비싼 거죠, 아무 효과도 없는 평범한 반지인데……
반지 하나에 이천사백만 원.
큰돈을 벌고 있긴 했지만 서연은 이런 사치를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면 내가 가진 금은보화들이 랑 바꿀 수 있을까?”
“지구에서는 금 1kg 당 팔천만 원 정도 해.”
“kg?”
“가진 걸 보여주시는 게 빠를 것 같아요.”
“잠시, 지금 아공간에 보관해둔 게……
허공에서 손을 빼내고 있는 위지 율의 모습에서연의 눈이 휘둥그레 진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위
지율의 손아귀에는 언뜻 보아도 수 십 킬로는 나갈 것 같은 금괴가 쥐 어져 있었다.
“……충분하실 거예요, 아니 넘 치실 거예요.”
어찌 보자면 당연한 것이다.
아무리 비싼 명품 물건이라 할지 라도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을 살아 온 위지율의 보고만은 못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이구나! 그럼 저 가게도 가 보자!”
얼떨결에 위지율의 손을 맞잡은 채로 백화점 명품 코너를 돌아다니
며 그간 쌓인 스트레스를 해소해내 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진짜 이렇게 놀고 있어 도 되는 건가?’
머릿속으로는 의문이 이어졌지 만, 정신을 차리고 보면 물건이 손 에 쥐어져 있었다.
“진짜 잘 어울리는구나! 이건 무 조건 사거라! 아니 내가 사서 주도 록 하마!”
“그럼 아까 봤던 반지는 제가 사 드릴게요.”
“정말 고맙구나!”
평소라면 절대 사지 않았을 사치 품들이다.
위지율의 페이스와 분위기에 휘 둘리고 있기 때문일까?
홀린 듯이 말도 안 되는 금액들을 결제했고, 당당히 차고 매장을 나섰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귀금속뿐만 아니라, 옷도 몇 벌 이나 샀다.
‘코트 한 벌에 천만 원……
이런 말도 안 되는 가격의 옷이 존재하는지도 몰랐헜지만, 입어 보
니 상당히 마음에 든다.
정신없이 이끌고 다니는 위지율 의 손에 잡혀, 서연의 몸에 잔뜩 무언가가 치장되어 가고 있었다.
‘이게 맞나……
뭔가 꺼림칙해져 간다.
돈의 문제는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서연의 통장에 는 가히 천문학적이다 싶은 숫자의 0이 적혀 있었으니 말이다.
문제는 계속 위지율의 페이스에 너무 끌려간다는 것이었다.
공통의 주제를 통하여 친근감을
느끼긴 했지만 이렇게 정신없이 휘 말려서는 안 되었다.
지금이라도 정신을 차려야겠다고 생각한 서연이 눈을 날카롭게 뜰 때였다.
백화점 내부에 마련된 카페에 전 시된 디저트들을 바라보는 위지율 의 눈이 반짝인다.
“이건 무엇이냐? 엄청나게 맛있 어 보이는구나.”
“……조각 케이크예요, 저는 너 무 달아서 그리 좋아하지는 않
“먹어 보고 싶구나!”
자그마치 용의 입에서 흘러나온 단호하면서도 확정적인 언사였다.
말에 담겨 있는 신묘한 힘에 이 끌렸고, 쇼핑백을 잔뜩 든 채 카페 에 앉아 조각 케이크를 시켰다.
뒤이어, 음식이 나오자마자 포크 를 든 위지율의 손이 빠르게 움직 였다.
다소 매혹적인 붉은빛이 도는 입 술이 케이크를 삼킨 이후에는, 표 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맛이 없나요?”
서연의 질문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대신하여 빠르게 포크질을 하며 케이크를 먹기 시작한다.
“맛있어-! 이렇게 맛있는 음식은 처음이구나! 너도 어서 먹어 보거 라!”
“저는 많이 먹어 왔어서 괜 찮…… 읍!”
입 안에 박힌 케이크에 말문이 막힌 서연의 입가에도 미소가 그려 진다.
“걱정이 많을 때는 달달한 게 최 고인 법이지.”
위지율의 눈동자가 초승달처럼 휘어진다.
방금 전 쇼핑과 같았다.
위지율, 본인의 즐거움도 있었지만 서연의 기분을 풀어주고 걱정을 덜어주기 위하여 노력을 해주고 있었다.
그 고마운 마음에 입가에 호선을 그린 서연이 고개를 주억인다.
“감사해요, 그런데 익숙하니까 이렇게 신경 써주실 필요는 없어 요.”
“익숙해져 간다는 것이 가장 무 서운 거지, 힘들고 슬플 때는 슬프 다고 말할 수도 있어야 하는 법이 란다.”
아랫입술을 질끈- 깨문 서연이 황급히 고개를 돌린다.
“감정에 충실한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 않느냐?”
고맙고 미안했다.
오늘 처음 본 이에게 따뜻한 위 로를 받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허나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인지, 주고받는 대화 속에서 위로 와 편안함이 느껴지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따뜻하다.
그 인정할 수 없는 감정이 심장 을 박차고 머리까지 이어진 순간 서연은 실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하……
“쇼핑하고 맛있는 것 먹으면 기 분이 풀리는 건 어느 세계를 가든 불변의 행복 법칙인데, 어찌 기분 이 조금 괜찮아졌느냐?”
“……조금은요.”
서연은 솔직하게 인정하기로 했 다.
아무리 부정하고 떼써봐야 눈앞
의 능구렁이와 같은 용에게서 감정 을 숨기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으니 말이다.
“ 후후......
부드럽게 웃은 위지율 역시 조각 케이크를 베어 입에 집어넣는다.
달달함에 녹아내리는 표정을 지 은 그녀는 기분이 좋은 듯 몸을 파 르르 떨기까지 했다.
“……고마워요.”
작게 읊조리는 서연의 입가로 미 소가 떠올랐다.
“동류끼리 서로 위로를 해주는 것은 당연한 거란다.”
그를 바라보는 위지율의 입가에 는 훈훈한 웃음이 가득 차오르고 있는 채였다.
뒤이어, 다시 한번 시작된 수다 에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제 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무렵.
쿵-!
하늘이 무너질 듯한 소리와 함께 갑작스러울 정도의 강렬한 기의 파 동이 세계를 뒤엎기 시작했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