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권 4화
429화
“정말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쿠루후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주억였다.
“은하를 지배하고 있다지만 결국 실권을 쥐고 있는 것은 고대의 존재들이지, 온전한 내 것은 아무것 도 없는 실정이지, 그저 시키는 대 로 행동해야만 하는 꼭두각시와 다 를 바 없다는 거지, 불만이 쌓이지 않는 게 말이 안 되는 상황 아니겠 나?”
“지금 네가 원하는 건 자유라는 건가?”
“당장의 목표는 자네가 말한 대 로 자유라 할 수 있겠군.”
상황 자체는 다소 당황스럽지만, 쿠루후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되 었다.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면 아무리 많은 것을 가졌다 해도 소 용없는 법이다.
쿠루후는 강한 힘과 권력이 있는 만큼, 오히려 더욱더 답답하게 느 낄 것이다.
그렇게 오랜 시간 쌓여온 감정들
이 결국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 은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고대의 존재들이 두렵기 에 선뜻 나서지 못했었다.
‘쿠루후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고대의 존재들 전부를 상대할 수는 없었겠지.’
한 손으로는 열 손을 당해낼 수 는 없는 법이기에 억누르고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때마침 힘을 합칠 동료가 나타난 것이다.
더 이상 감정을 억누르고 있을 필요가 없어졌다는 말이었다.
“너무 부담스럽게 생각할 필요
없네, 자네 한 명에게 모든 것을 맡길 생각은 없으니 말이야……. 당장 나와 같은 목표를 가진 이들 이 있거든.”
“반역을 하겠다는 말이야?”
“ 필요하다면.”
“나쁘지는 않은 것 같은데, 굳이 내가 너희들 편에서줄 필요는 없 을 것 같은데.”
“괜한 허세 부릴 필요 없네, 이 미 눈치채지 않았나? 고대의 존재 들은 상식이나 기존의 순리마저 거 스르는 힘을 가진 이들이네, 아무 리 자네가 강하다 할지라도 혼자서
감당할 수는 없을 텐데.”
“그렇다고 적의 적과 손올 잡을 필요는 없잖아, 애초에 고대의 존재들의 수하였던 너를 어떻게 믿을 수 있겠어.”
“그 부분은 동의하네, 그렇기에 나도 자네에게 무언가 행동을 강요 할 생각은 없네, 그저 우리가 내어 주는 정보로 스스로 판단하고 움직 이면 된다네.”
동맹이라고는 하나 완전히 같은 편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쿠루후가 내어주는 정보를 듣고 혼자서 판단을 내리고 행동을
하면 된다.
고대의 존재들과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망각의 은하를 돌아 다니고 있던 서준에게는 상당히 매 력적인 제안이었다.
“자네에게도 제법 괜찮은 제안이 라는 생각이 드는데?”
부정할 수 없었다.
오히려 상당히 매력적인 제안이 라 할 수 있었다.
서준은 그 이야기에 짧은 고민을 했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주억이며 입을 열었다.
“일단 들어는 보지.”
고대의 존재의 영멸, 서로 최종 목표는 같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힘을 합치지는 않는다.
그저 고대의 존재들 위치, 강점 과 약점 같은 정보들을 내어줄 뿐 이었다.
제대로 된 정보 없이 미지의 싸 움을 해온 서준에게는 상당히 매력 적이면서도 효율적인 방식이라 할 수 있었다.
‘어차피 내 목표는 고대의 존재 들이야.’
망각제와 서준, 서로가 바라는 진정한 목표는 다를 것이다.
하지만 1차 목표는 ‘고대의 존재’ 의 말살이다.
심지어 일방적인 도움을 받는다 고 할 수 있는 만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선택지를 고를 수 있는 서준의
입장에서 전혀 손해 볼 것이 없었 으니 말이다.
물론, 쿠루후가 아무런 꿍꿍이 없이 이런 제안을 해왔을 거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는다.
다만 서준은 이 동맹이 깨지게 되는 순간, 망각제들의 우위에 있 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고대의 존재들이 사라진다면 더 이상 뒤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물론, 당장으로서는 망각제들과 의 싸움도 벅차다고 말할 수 있었다.
허나 고대의 존재들과의 싸움을
통하여 지금 느낀 벽을 무너뜨리게 된다면?
‘무극에 닿을 수 있어.’
무의 끝이라 일컬어지는 경지, 형상으로 빚어낸 무결천마가 다루 는 힘을 온전한 본인의 육신으로 다뤄낼 수 있다는 것이다.
쿠루후와 같은 망각제들이 더 있 다 할지라도 패배를 염두에 둘 필 요가 없었다.
분명 다른 꿍꿍이가 있는 쿠루후 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도 이런 자신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서준이 생각을 갈무리하고 있던 찰나, 근방에서 분주히 움직이던 혼돈인들이 식탁 위에 수백 가지의 만찬을 얹어놓고 있었다.
“망각제들도 일반적인 식사를 하 나?”
“손을 잡고 있는 이들 중 이런 미식을 즐기는 이가 있네.”
“나는 이런 미식을 즐기기보다는 우리 일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 하 고 싶은데.”
고대의 존재들이 엿들을 수 있다 는 언질 때문에 쿠루후의 영토라 할 수 있는 행성에 들어서기 전까
지,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지 못했 다.
아무것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만 큼, 물어볼 것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원한다면, 난 항상 자네의 뜻을 존중해줄 생각이네.”
“근래 망각의 은하에서 잿빛 기 운을 다룬 존재에 대해서 알고 있 어?”
가장 첫 번째로 물어볼 것은 지 구에 숭배자들을 양성해냈고, 정복 왕을 언급한 존재에 관한 질문이었다.
애초에 이번 출전의 가장 큰 목 적은 그 미지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서준의 질문을 받은 쿠루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알고는 있네. 하지만 이야기해 주기에 앞서 자네가 모르고 있는 고대의 존재들의…… 음, 그러니까 자네의 언어로 치자면 계급에 대해 서 먼저 알려주겠네.”
“말해 봐.”
“우리 황제들처럼 고대의 존재라 고 해서 다 똑같은 것은 아닐세, 바깥의 은하에서 그렇듯, 누군가는
주신으로 칭송받고 누군가는 신으로 칭송받기도 하지.”
고대의 존재들도 저마다 각기 다 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만큼, 오랜 세월 수없이 부딪혀왔다.
그로 인해 서로의 힘과 능력을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었고, 가진 힘과 권력이 나누어졌다.
“공식적인 것은 아니지만 암암리 에서로의 급이 나누어졌지, 고대 의 존재들 또한 별 불만 없이 이를 받아들이고 있는 추세이고 말이야.”
충분히 납득이 가는 상황이었다.
서준 또한 몇 번씩이나 보았던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처치했던 주샤콘과 같은 이들의 계급은 뭐지?”
“특별한 지위가 없는 평범한 고 대의 존재, 아니지 그마저도 아깝 지, 우주의 제약으로 인해 일종의 편린을 보내었다고 생각하면 되네.”
“편린?”
“설마 본체라 생각하고 있었나?”
당시에는 틀림없는 본체라고 생 각했었다.
허나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자니
말이 안 되었다.
망각제들조차도 뜻대로 다룰 수 있는 고대의 존재들이 당시 혼돈제 에 오르지도 못했던 서준에게 패배 를 했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마주했던 고대의 존재들 이 본체가 아니었다면?’
모든 퍼즐이 맞춰지기 시작한다.
동시에 자연스레 서준의 궁금증 이 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내가 물어본 잿빛 기운 을 다루는 존재의 계급은 어떻게 되지?”
다른 고대의 존재들의 본신을 보 지는 못했다.
허나 잿빛 기운을 다루던 놈은 여태껏 마주했던 고대의 존재들 중 가장 강력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존재라면 신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는 존재 지.”
“신이라고?”
이제야 잿빛 기운을 발산하던 목 소리에 어려 있던 자신감의 근원이 이해가 되었다.
한낱 황제라 칭해진 쿠루후조차 도 7개의 구체를 휘감고 있었다.
그런데 그를 수하로 다루고 있는 고대의 존재들, 그중에서도 신으로 군림하고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졌을지 상 상도 가지 않는다.
아니, 현재로서는 감히 추측할 수도 없었다.
“지금의 자네가 그와 맞붙게 된 다면 필패하겠지, 정확히 말하자면 근처에 다가갈 수도 없겠지.”
쿠루후의 말에서준의 눈이 가늘 어진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 금’이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언가 방법이 있나 보네?”
생각해보면, 애초에 쿠루후는 가 능성을 훌륭히 평가했다.
당장 서준을 훌륭하게 평가한 것 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자네의 성장에 도움이 될 만한 인물을 알고 있네.”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쿠루후의 노림수가 읽혀진다.
서준의 눈에 이채가 어린다.
“나를 어느 정도 키워서 방패막 이로 쓰겠다는 거네.”
“강요는 아니네, 이 또한 자네가 선택을 할 수 있는 걸세.”
서준의 입가에 헛웃음이 흐른다.
‘거절할 수가 없는 거잖아.’
강자존의 법칙이 자리 잡은 망각 의 은하에서 약자로 남아 있겠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아니, 애초에 힘이 없다면 본래 의 목적조차 달성할 수 없는 상황 이다.
그렇다고 지레 겁을 먹고 지금 이 상태로 다시 지구로 되돌아간다 면 운명은 정해져 있다고 해도 과
언이 아니었다.
‘다가올 파멸을 기다리는 것뿐이 겠지.’
이건 선택을 가장한 강요라고 할 수 있었다.
애초에 쿠루후 또한 이러한 점들을 알고 있기에 제안을 건넨 것일 거다.
“어지간히도 훌륭한 방패가 필요 한가 봐?”
동맹이라고는 하나 일시적인 것 이다.
머지않아 적이 될 서준의 성장을 돕는다는 것은 쿠루후의 입장으로
도 절대 좋은 일이라고 볼 수 없었다.
그런데도 쿠루후는 서준의 성장 을 도우려 하고 있었다.
정곡을 찌르는 서준의 말에도 쿠 루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인다.
“상대는 고대의 존재, 태초부터 수많은 은하를 파멸로 이끌어냈던 존재들이네, 대비를 해도 해도 부 족할 수밖에 없지.”
납득이 가는 말이긴 했지만 짚이 는 점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의도는 이해가 되는데, 굳이 이
계획에 내가 필요하진 않아 보이는 데?”
단순히 방패막이 역할을 수행한 다고 보기에는 감당해야 하는 리스 크들이 상당히 많았다.
“계약으로 묶인 황제들은 고대의 존재들을 공격할 수 없네, 그렇기 에 자네의 힘이 필요한 거지.”
기다렸다는 듯이 서술되는 대답 에서준의 눈매가 가늘어진다.
“방패가 아니라 칼로 쓸 작정이 었네.”
애초에 단순한 시선 끌기용이라 면 성장까지 도와줄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자네의 목적은 고대의 존재들을 제거하는 거 아닌가?”
“정확히 말해야지. 내가 찾는 고 대의 존재가 아닌, 계약에 얽혀 있 는 고대의 존재들을 제거하게끔 유 도해서 자유를 얻으려는 거겠지.”
“부정하지 않겠네, 그래서 제안 을 거절할 건가?”
서준을 응시하고 있는 쿠루후의 눈매가 초승달처럼 휘어진다.
앞서 말했다시피 애초에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허나 아무런 대가 없이 이용만 당하는 것은 기분이 썩 좋지는 않
았다.
고민을 끝마친, 서준이 고개를 주억이며 입을 연다.
“계약을 조금 바꾸자.”
“어떤 형식을 원하는 거지?”
“굳이 유도할 거 없어, 나는 네 가 요청하는 고대의 존재들을 제거 해줄게.”
“그로 인해 내가 내주어야 하는 것은?”
“잿빛 기운을 다룬 존재를 포함 한 알고 있는 모든 고대의 존재들 에 관한 정보를 넘겨주는 것.”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군.”
자유를 얻는 것으로 싸움이 모두 끝나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서 는 그에 따른 힘과 준비가 필요한 법이었다.
애초에 고대의 존재들이 배신을 도모한 쿠루후를 살려둘 리가 만무 했다.
그런데 끈질기게 추적해 올 고대 의 존재들을 대신 제거해주려 하고 있으니 오히려 고마운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좋아, 네가 말한 대로 계약을
바꾸도록 하지.”
“현명한 선택이야.”
서준과 쿠루후가 서로의 손을 잡 는 순간이었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