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권 25화
425화
자리에 모여 있던 망각의 황제들 의 눈에 이채가 어린다.
“드디어 출전인 건가?”
“오랜 기다림이었다.”
“마음껏 날뛸 수 있겠군.”
저마다의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망각의 황제들의 입가에 기쁨의 미 소가 피어나고 있었지만, 그들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아니, 굳이 치자면 방어 명령이
라고 볼 수 있겠군.”
쿠루후의 말에 카리아나와 크로 투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방어?”
“설마, 또 대기하고 있으라는 거 야?”
쏟아지는 원성에도 쿠루후는 조 금의 동요도 없이 차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고대의 존재님들을 소멸시켰었 던 바깥 은하의 인간이 망각의 은 하에 발을 들였다.”
쿠루후의 말에, 불만을 토해내던 크로투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흐
른다.
“여러 가지 제약이 있긴 했다만, 그래도 고대의 존재님들을 한 번이 라도 격파한 놈이다, 더 이상 바깥 은하의 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 놈 이지.”
크로투의 말에 쿠루후는 천천히 고개를 주억인다.
“심지어 혼돈의 시련을 통과하고 우리와 같은 황제인 혼돈제에 올랐 지.”
“혼돈제라……. 상당히 매력적이 긴 하네.”
홍분을 숨기지 못하고 거친 숨을
몰아쉬는 카리아나의 모습에 크로 투가 고개를 내젓는다.
“헛된 욕심은 버리는 게 좋을 거 다.”
고된 전쟁을 거쳐 생존해온 만큼 고대의 존재들은 누구보다도 강한 지배력을 행사하고 싶어 한다.
자신들의 수하라고 볼 수 있는 망각의 황제들이 강한 힘을 얻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망각의 황제들에게 성 장의 실마리를 주거나, 계기가 될 수 있는 존재를 사냥하는 것을 허 락하지 않아왔다.
당연히 이번에도 과거와 같은 명 령이 떨어질 것이라 생각했다.
허나 쿠루후의 입에서는 전혀 예 상치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고대의 존재들께서 침입자, 혼 돈제를 취하는 것을 허락하셨다.”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던 카리 아나와 크로투의 눈이 휘둥그레진 다.
“뭐라고?”
“먹어치워도 된다는 말인가?”
“아마 회복에 전념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내리신 거겠
지.”
쿠루후의 추측에 카리아나와 크 로투가 동조를 표한다.
“아무리 혼돈에서 파생되었다지 만 역시 부활은 쉽지 않았나 보네.”
“정신적인 충격까지 엄청나 근간 이 흔들린 것도 있을 거다.”
많은 제약이 있었다지만 바깥의 은하의 인간에게 패배를 했다.
고대의 존재들 또한 드높은 격을 가진 만큼 패배는 단순히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었다.
근간이라 할 수 있는 힘이 흔들 린 것이다.
카리아나가 고개를 주억인다.
“고대의 존재들의 의도가 뭔지는 상관없어,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두 번 다시 없을 기회가 쥐어졌다 는 거지, 중요한 사냥인 만큼 그 전에 우리끼리 괜한 분쟁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할 것 같은데……
눈을 흘기며 반응을 살피고 있는 카리아나의 모습에, 망각의 황제들 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마냥 입 을 다문 채로, 마른침을 삼킨다.
자연스레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 는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자
그마치 혼돈제다.
혼돈은 모든 고대의 힘의 근간이 었다.
그런 혼돈제의 영혼을 먹어 치울 수만 있다면 많은 망각을 취하여, 한층 더 강력한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성장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이 다.
망각의 황제들 중에서 혼돈제에 오른 서준을 탐내지 않을 이가 없 다는 말이었다.
실제로도 이 자리에 모여 있는 망각의 황제들의 눈동자에는 숨길
수 없는 탐욕이 흐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입술을 달 싹인 것은 크로투였고, 그는 노골 적인 욕망을 드러내며 선언했다.
“내가 선봉으로 나서지.”
욕심에 눈이 멀어 내뱉는 말이 아니었다.
한서준은 바깥 은하의 인간이라 고는 하나, 혼돈제에 오른 존재였 다.
그리 쉬운 상대는 아니라는 것이 다.
하지만 그렇다고 패배를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이곳은 망각의 은하였다.
망각의 황제들의 영토이자, 창조 된 근원지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압도적인 망각 의 힘으로 존재 자체를 지워버릴 자신이 있었다.
허나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 은 비단 크로투뿐만이 아니었다.
“나도 선봉으로 나서고 싶은데.”
“끼어들지 마라, 혼돈제는 내가 취할 거다.”
싸늘한 크로투의 대답에 카리아 나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는다.
두 망각의 황제가 서로를 향해 발산하는 살기에 대기가 떨리기 시 작한다.
일촉즉발, 언제 싸움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순간이었다.
쿵-!
쿠루후가 앞에 놓인 테이블을 내 려치며 말한다.
“고대의 존재들께서 사냥을 허락 한 것이지 우리끼리의 분쟁을 허락 한 적은 없다, 자중하도록 해라.”
이어진 쿠루후의 말에 카리아나 와 크로투가 고개를 주억인다.
쿠루후의 말이 옳았다.
망각의 황제들은 모두 고대의 존재들과 계약으로 묶여있는 몸이었다.
눈앞의 욕심에 눈이 멀어서 섣부 른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허나 쉽사리 물러서고 싶지도 않 았다.
혼돈제만 잘 취해내어 새로운 경 지, 신세계에 도달하게 된다면 이 지긋지긋한 계약마저도 끊어내 버 릴 수 있을 것이다.
카리아나는 최대한 투기를 죽이 며 쿠루후를 바라보며 질문을 던진
“그러면 너는 어떤 방식으로 순 서를 정하고 싶은데?”
“균형이 무너질 수 있는 만큼 당 장은 모두 대기하는 쪽이 좋다고 본다.”
쿠루후의 말에 망각의 황제들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대기를 하라고? 제정신이야?”
“전우여, 선을 넘지 말거라, 두 번 다시 없을 기회를 허무하게 놓 치란 말인가?”
쏟아지는 망각의 황제들의 언성 에 쿠루후는 여유로운 미소를 흘린
다.
“가장 공평하게 침입자가 우리를 선택하게 하는 거지, 침공을 받게 되는 쪽이 우선권을 가져가는 것이 지, 이 정도면 공평하다고 볼 수 있지 않은가?”
운에 맡기자는 것이다.
모두들 그리 탐탁지 않아 보였지 만 이보다 더 공정한 방식이 떠오 르지가 않았기에 반대 의견을 내세 우지 못했다.
결국, 자리에 앉아있던 망각의 황제들은 마지못해 고개를 주억였 다.
“좋아, 대신 뒤에서 더러운 짓거 리를 하다가 걸린다면 자격을 박탈, 배신자로서 처형시키도록 하자고.”
바깥 은하의 인간, 한서준은 매 력적인 먹잇감이면서도 강력한 적 이었다.
만약 망각의 황제들끼리 괜한 신 경전과 경쟁을 벌이게 된다면 한서준을 처치하기 전에 본인들이 소멸 당할 수도 있었다.
오랜 시간 억눌러두었던 욕망을 해소할 수 있는 기회를 그리 허무 하게 날리고 싶지 않았다.
“나 또한 카리아나와 같은 의견
이다.”
고개를 주억이고 있는 망각의 황 제들의 눈동자에 탐욕이 넘실거린 다.
고대의 존재들이 강제로 체결한 계약을 끊어낼 수 있을 정도로 강 한 힘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은 망각 의 황제들에게 너무나도 달콤한 일 이다.
“모두들 동의를 했으니 더 이상 회의는 불필요하겠군.”
그 말과 함께 자리에 앉아있던 쿠루후의 신형이 잿빛 기운에 휘감 기며 모습을 감추었다.
뒤를 이어, 크로투가 자리를 박 차고 일어나며 말한다.
“만약 혼자 힘으로 버거울 것 같 으면 바로 도움을 청하도록 해라, 헛된 욕심 때문에 소멸당하는 것보 다는 좋을 테니 말이야.”
이야기를 듣던 카리아나가 코웃 음을 친다.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군, 여기, 망각의 은하는 우리의 땅이라고.”
이어진, 카리아나의 말에 크로투 는 차마 반박을 하지 못했다.
“한서준 그놈이 고대의 존재님들 과 같은 신세계에 들어선 존재가
아닌 이상 패배할 리가 없어.”
“농담이 과하군.”
“네가 먼저 말도 안 되는 걱정을 했잖아.”
카리아나의 다소 까칠한 말투가 거슬리긴 했지만 크로투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내가 먼저 실언을 했군, 바깥 은하의 인간이 우리와 같은 황제의 자리에 오른 것만으로도 칭 찬할 만한데, 벌써 신세계에 들어 섰을 리가 없지.”
*
처음과 달리, 매우 고분고분해진 쟈우를 통해 망각의 은하에 대해 정보들을 얻어내고 있던 서준은 미 간을 찌푸린 채로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곳, 망각의 은하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건 고대 의 존재들이 아니라 황제들이라 고?”
“맞습니다, 고대의 존재들께서 거느리고 있긴 했지만 실질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적은 손에 꼽힐 정 도입니다.”
“그러면 고대의 존재들이 모습을 드러냈던 마지막이 언제인데?”
가늘어진 서준의 눈매에 흠칫-몸을 떤 쟈우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
“바깥 은하의 시간 기준으로는 어림잡아도 백 년! 아니, 천 년이 넘었습니다.”
“ 흐음......
흔들림 없는 눈동자와 당당한 목 소리까지, 쟈우가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진실된 정보라고는 볼 수 없었다.
당장 며칠 전, 서준은 고대의 존재로 추정되는 이의 힘을 추적하여 망각의 은하의 위치를 찾아내었다.
‘그저 모르고 있을 뿐이겠지.’
여기까지가 쟈우가 가진 정보의 한계였다.
확실한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서 는 직접적으로 고대의 존재들과 연 관되어 있는 이들, 망각의 황제들을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혹시 이 근방에 망각의 황제들 이 있는 행성이 있어?”
“ 네?”
“질문이 어려웠나?”
“아, 아닙니다! 그저 당황스러웠 을 뿐입니다.”
“뭐가?”
“아까부터 저희가 있던 이 행성 이 망각의 황제님께서 지배하고 있 는 곳입니다.”
생각해보면, 안착한 행성은 바깥 에서 보았던 것처럼 온통 잿빛뿐인 세계가 아니었다.
나름대로 문명을 이루고 있었을 뿐더러, 제법 위용 있는 성까지 쌓
아 올린 모습이 기이하다 했는데 그 이유가 따로 있던 것이었다.
“어떤 황제의 영토지?”
“카리아나의 영토입니다!”
“……황제들은 원래 이렇게 영토 를 방치하나?”
“그렇지 않습니다! 아마 중요한 회의가 있어서 참석을 한 것 같은 데, 조만간 모습을 드러낼 것……
쾅
쟈우의 말이 끝나기도 전, 그의 육신이 흩어져 버린다.
당연하지만, 아무런 이유 없는
소멸은 아니었다.
엄청난 잿빛 기운이 삼켜버린 것 이었다.
자연스레 서준의 입가에 미소가 흐른다.
“네가 카리아나인가 보네.”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필요 없었다.
허공에 거대하고 기다란 촉수를 가진 기이한 형태의 존재가, 혼돈 인들에게 황제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원형의 구체를 몸 주변에 두 른 채로 고고하게 서 있었다.
망각의 황제, 카리아나는 오롯이 한 가지의 꿈을 가지고 살아왔다.
‘종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삶.’
허나 괜히 꿈이라고 불리 우는 것이 아니었다.
이뤄내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 고 힘들기에 꿈이라고 칭하고 있었다.
하지만 예상치도 못한 행운이 갑
작스레 찾아왔다.
‘혼돈제를 취해도 된다니……
그토록 바라던 꿈을 이룰 수 일 생일대의 기회인만큼 카리아나는 단순히 운에 맡길 생각이 없었다.
‘암중에서 혼돈제 놈이 내 영토 를 침공하게끔 만들어 낸다.’
약속을 하긴 했지만 어차피 허울 뿐인 말이었다.
분명 다른 망각의 황제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움직이려 할 것이다.
애초에 혼돈제만 취해낼 수 있다 면 암중에서 손을 쓴 것을 들킨다 할지라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강한 힘을 가진 자가 곧 법이 되는 세계다.’
더 많은 망각, 강한 힘을 취하게 된다면 다른 황제들의 원성 따위 조금도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망각의 은하 또한 혼돈의 세계에서부터 파생된 곳인 만큼, 철저하게 강자존의 법칙으로 이루어진 세 계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