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권 23화
423화
하지만 마냥 이 상황을 기쁘게만 받아들이고 있을 수는 없었다.
‘모두 일시적인 것뿐이야.’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머지않아서 욕망에 눈이 멀어 고 대의 존재들 혹은 외세의 세력들과 손을 잡으려는 이들이 나오게 될 것이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닌 이상 역사는 되풀이될 뿐이다.
‘확실하게 제거해둬야 해.’
심지어 잿빛 기운을 다루고 있던 미지의 존재의 입에서 정복왕의 진 명, 가이사의 이름이 흘러나왔었다.
본능적인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정체불명의 존재가 내뱉은 말은 절대 허세 따위가 아니었다.
알지 못하는 곳에서 운명이라는 거대한 수레바퀴가 돌아가려 하고 있었다.
당장 눈앞에 평화가 쥐어졌다고 해서 손을 놓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무릇, 평화를 원하는 자는 전쟁 을 준비하는 법이다.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대비 한다.’
다행히도 흘려보냈었던 혼돈기를 통하여 잿빛 기운을 다루던 미지의 존재의 위치를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었다.
물론, 안전을 보장받을 수는 없 었다.
어쩌면 미지의 존재가 있는 잿빛 의 세계는 혼돈의 세계보다도 더 위험할 수 있는 곳이었다.
허나 다가올 운명에 힘없이 쓰러
져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어떻게든 발악하고 발버둥 쳐서 비틀어 내야지.”
결단을 내린 서준은 고개를 주억 인 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출 정의 준비를 시작했다.
며칠 후.
리벨리온 내에서 회의를 거쳐 출 정 준비를 어느 정도 끝낸 서준이 뒤이어 향한 곳은 가족들이 있는 집이었다.
문을 열어젖힌 서준은 내부의 기 척을 확인하고서는 입을 열었다.
“다녀왔어.”
서준의 인사에 안쪽에서 서연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오늘은 일찍 왔네?”
그간 리벨리온의 업무들로 집 밖 에 나가있었던 덕분일까?
거실에 놓인 소파에 늘어져 있던
서연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반 겨주고 있었다.
“어느 정도 업무들이 정리가 됐 거든.”
“다행이네, 근데 대체 어디로 들 어 온 거야?”
“그냥 문 열고 들어왔는데.”
시선을 마주하고 있던 서연의 동 공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냥 걸어 들어왔다고?”
“뒤따라 붙는 기자들이 좀 있어 서 기척을 어느 정도 죽이고 오긴 했어.”
어하하..J
서준의 태연한 말에서연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온다.
‘그냥 걸어왔는데 기척조차 느끼 지 못했다고?’
정복왕에게 고된 수련을 받은 이 후 단 한 번도 누군가의 기척을 놓 친 적이 없었다.
심지어 서준은 작정하고 은밀하게 움직인 것도 아니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이보다 더 기척 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정복왕의 성역으로 수련을 하러 갔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었지만, 실질적으로 수련한 시간은 고작 몇 시간밖에 되지 않았다.
헌데 지금 이 말도 안 되는 성장 은 무엇이란 말인가?
나날이 성장을 해가는 모습에서 연은 혼란스러운 감정을 느낄 수밖 에 없었다.
이전 혼돈의 세계에서처럼 든든 한 힘이 되어 주고 싶은데 그럴 수 가 없게 된다는 것이다.
‘분명 기쁘기는 한데, 아쉽기도 하네.’
하지만 이런 감정을 겉으로 내색 하지는 않는다.
그렇지 않아도 바쁜 서준에게 괜 한 고민거리를 안겨 주고 싶지 않 기 때문이었다.
때문에서준을 마주하고 있던 서 연은 평소와 같은 미소를 보이며 이야기의 화두를 돌린다.
“근데 리벨리온 내부에서 오빠가 또 출정한다는 소식이 있던데, 거 짓말이지?”
서준이 숙식을 모두 의장실에서 해결한 만큼, 직접 만나서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서연 또한 리벨
리온 소속인 만큼 내부에서 들려오 는 소문 정도는 들을 수 있었다.
“아니, 사실이야, 출정을 준비하 고 있어.”
서연의 두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것마냥 흔들린다.
“……진짜라고?”
서준은 이미 8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자리를 비웠었다.
남아있던 가족들이 했던 걱정들을 떠올려 본다면 쉽사리 기분이 좋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서준의 행동 을 강제할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니
었다.
“이유 정도는 들을 수 있을까?”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만큼 서준은 곧장 입을 열었다.
숭배자들과 고대의 존재, 잿빛 기운을 다루던 미지의 존재와 정복 왕 가이사의 언급까지.
꽤 긴 이야기가 서준의 입에서 홀러 나왔다.
베일 속에 가려져있던 이야기를 들은 서연은 결국 고개를 주억일 수밖에 없었다.
“직접 가서 확인해봐야겠네.”
“최대한 빠르게 돌아올게.”
“천천히 와도 괜찮으니까 몸 성 히, 다치지만 말고 돌아와.”
단순히 걱정된다는 이유로 짐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가족이긴 했지만 서준, 본인의 삶이고 결정이었다.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당연 한 것이었다.
“그런데 부모님들한테는 이야기 했어?”
서연의 질문에서준이 고개를 내 젓는다.
“괜찮을 거야, 아빠랑 엄마 성격 알잖아, 게다가 두 분 다 나처럼 소문도 들으셔서 마음의 준비를 해 놓은 상태이실 거야.”
“그래도 직접 들으시면 힘드시겠 지.”
8년 만에 돌아와서 한 달도 되지 않아서 또 출정을 선언했다.
심지어 근방의 차원이 아닌 드넓 은 우주를 횡단하는 일이 될 것이 다.
선례가 있는 만큼 부모 된 입장 으로서 걱정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그늘이 진 서준의 얼굴에서연이 환한 미소를 띤 채로 입을 연다.
“오빠답지 않게, 일어나지 않은 일로 걱정하지 마.”
맞는 말이었다.
걱정을 사서 할 필요는 없는 법 이다.
“일단 부딪혀 봐, 어차피 오늘 저녁은 부모님이랑 같이 먹기로 했 잖아.”
오랜만에 가족끼리 모여서 식사 를 하고 있는 한석훈과 양정화는 어느 때보다도 환한 미소를 지은 채로 서준을 바라본다.
“이렇게 얼굴을 보니 좋구나.”
“근래 엄청나게 바쁜 것 같던데 어디 아픈 곳은 없지?”
“네, 저 엄청 튼튼한 거 아시잖 아요.”
양정화의 질문에 미소를 보이며 답한서준은 식사를 이어간다.
안부 인사를 끝낸 이후로는 평소 와 같은 저녁 식사 자리가 되었다.
가족들이 둘러앉아, 맛있는 음식 을 먹으며 그간 나누지 못했던 잡 다한 이야기들을 주고받는다.
중대 발표를 준비하느라 떨리고 있던 감정이 빠르게 안정이 되어간 다.
대화를 주고받는 활기찬 가족들 의 목소리가 마음속 평안을 가져다 준 덕이었다.
“……본부 뒤쪽 공터에 교육을 받고 있는 예쁜 강아지들이 엄청 많다니까요.”
“정말?”
“너무 귀여워서 다가가도 되냐고 물어봤는데 훈련 중에는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아쉬웠겠네, 나중에 엄마랑 같 이 애견 카페라도 같이 가자구나.”
“좋아요! 아, 맞다, 근데 아까 전 에 오빠. 아까 할 말이 있다고 하 지 않았어?”
어느덧 식사를 끝내고, 마무리로 후식을 먹어가고 있던 와중 서연이 급하게 화두를 돌려내더니 서준을 바라보며 말한다.
더 이상은 미룰 수가 없는 상황.
아니, 미뤄서는 안 되는 상황에 당도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을 알고 있는 만큼 서준 또한 물러서지 않고 입을 열었다.
“이미 어느 정도 소문은 들으셔 서 알고 있겠지만……. 다시 한번 출정을 나갈 생각이에요.”
방 안에 무거운 침묵 내려앉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헌데 예상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졌다.
“언제나 그렇지만, 아빠랑 엄마 는 항상 아들을 응원하고 있단다.”
“……괜찮으세요?”
놀란 서준의 질문에 양정화가 손 을 내저으며 말한다.
“부모 된 도리로 자식의 일을 방 해해서는 안 되는 거잖니.”
“가능하다면 본인이 해야 하는, 하고 싶은 일을 모두 하면서 살라 고 말해주고 싶구나.”
한 치의 거짓도 느껴지지 않는 다.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에는 진심 이 가득 담겨있었다.
생각해보면 익숙한 상황이었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해도 반대하 지 않으셨지.’
혹시나 찾아올지 모르는 위기에 대해서 주의만 했을 뿐이지 반대를 하신 적은 없었다.
입가에 미소를 띤 서준이 말했 다.
“고마워요.”
“고맙기는, 당연한 거란다, 대신 가능하다면 이번에는 너무 늦지 않 게 돌아와줬으면 좋겠구나.”
양정화가 눈을 흘기며 장난기 가 득한 눈빛으로 한석훈을 바라본다.
“너희 아빠가 얼마나 걱정을 하 는지, 나는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 았다니까.”
“아니, 그건……
“이번 출정 소식을 들었을 때도 엄청나게 걱정을 해서 이 엄마가 설득을 하느라 엄청나게 애를 먹었 단다.”
“여보……
놀란 한석훈이 목소리를 드높인 다.
서준과 서연의 시선이 자연스럽 게 한석훈에게로 향한다.
쏠린 시선에 얼굴을 붉힌 한석훈 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부모 된 도리로 걱정을 안 할 수는 없다만, 그렇다고 해서 너희 들을 옭아맬 생각은 없단다.”
서연과 서준을 바라보고 있는 한 석훈의 눈에는 자식을 아끼고, 걱 정하는 마음이 가득 담겨 있었다.
“아무리 엄청난 부, 막강한 힘과 권력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스스 로가 행복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 가 없는 거잖니, 그러니까 이 아비는 우리들에게 얽매이지 않고 너희들이 너희를 위해서 살았으면 한단다.”
진심어린 행복을 바라는 말이 다.
서준은 새삼스럽게, 왜 자신이 그토록 지구로 되돌아오고 싶어 했 는지 알 수 있었다.
‘이런 가족들이 있어서였지.’
드높은 신위에 오르고, 아무리 강한 힘을 얻는다 할지라도, 가족 들의 이러한 따뜻한 마음처럼 가슴 을 풍족하게 채워줄 수는 없었다.
인간, 사람으로서 존재하게 된다.
칭송받고 경외받는 존재가 아닌 한 명의 사람이자 가족으로서 대해 준다.
그 커다란 충족감으로 가득 찬 기쁨에서준의 입가에는 어느 때보 다도 환한 미소가 흐른다.
“하하하!”
결국 서준은 오랜만에 소리가 홀 러나올 만큼 기쁨 어린 웃음을 터 뜨린다.
역시 지구, 가족들이 있는 이 집 은 서준에게 있어 사랑할 수밖에 없는 보금자리였다.
부모님들에게까지 최종적으로 허 락은 받아낸 서준은 곧장 리벨리온 본부의 지하실에 보관 중인 우주선 에 탑승한다.
‘목적지는 잿빛 세계.’
정확히 말하자면, 잿빛 기운이 넘실거리고 있던 우주였다.
지구, 아니 은하의 그 누구도 가 보지 못했던 곳에 처음으로 발을 들인 존재가 된 것이다.
이어진 혼돈기를 추적하여 워프
를 하는 순간, 펼쳐진 것은 잿빛뿐 인 우주,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 곳 이었다.
“여기가 미지의 존재가 있는 은 하……
서준이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고 있던 그 순간, 메시지가 전해진다.
띠링-!
[망각의 은하에 진입했습니다.]
[잊혀진 은하의 패권을 쥐고 있 는 고대의 존재들이 사용자 ‘한서준’을 인지합니다.]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를 읽어가 던, 서준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 역시나였네……
은하라고 함은 우주 한복판, 미 지의 존재가 있던 차원에 진입했다 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부터 연고도 없는 이 드넓은 은하를 뒤져야 한다는 말이었다.
위치를 대놓고 드러냈을 때부터 어느 정도 의아함을 느끼고 있긴 했다.
‘분명 무언가 꿍꿍이가 있어서
날 이 은하로 부른 거겠지.’
이어지는 고민에 눈가가 깊게 파 였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서 고개를 크게 내저었다.
“이렇게 혼자서 머리를 굴리고 있을 필요가 없지.”
어차피 이곳은 적진 한복판, 돌 아다니다 보면 다른 고대의 존재들 혹은 그를 따르는 숭배자들에게 정 보를 캐물을 수 있을 것이다.
서준은 생각을 갈무리하고, 대신 하여,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근방의 행성, 차원을 확인했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