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권 20화
420화
‘패배는 염두에 둘 필요가 없다 면……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를 피워낸 서준이 걸음을 옮기려던 순간이었다.
“잠시만요.”
“……하실 말씀이 더 있나요?”
서준의 질문에 자넷이 조심스레 입을 연다.
“런던 지리를 모두 알고 있는 제
가 길을 안내해드리는 게 좋지 않 을까요?”
옳은 판단이라 할 수 있었다.
지금 영국은 중요한 보고들이 누 락될 정도로 승배자들의 영향력이 엄청나게 막강한 상태였다.
시민 전부가 숭배자들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거대한 권력을 거머 쥐고 있고, 엄청나게 많은 눈과 귀 과 존재한다는 것은 확실했다.
이런 상황에서 지리도 제대로 알 지 못하는 런던 거리를 활보하며 대놓고 행동하게 된다면 생각지도 못한 변수들이 생길 수도 있었다.
중요한 것은 신뢰도의 문제였다.
서준이 눈매를 가늘게 뜬 채로 자넷을 응시한다.
‘자넷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 까?’
세상에 공짜는 없었다.
어느 정도 이해관계가 존재해야 지만 이런 교류를 이어나갈 수 있 는 것이었다.
‘이 거래를 통하여 자넷이 얻어 갈 수 있는 게 뭐지?’
의심을 거두지 못하고 있는 서준 의 눈빛에 자넷은 이런 반응을 예
상하고 있었다는 듯, 곧장 입을 열 었다.
“단순히 목숨을 빚졌기 때문은 아닙니다, 저는 모국인 영국을 사 랑합니다, 그리고 한서준 의장님처 럼 제가 아끼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혼란의 시대를 살아가게 하지 않고 싶을 뿐입니다, 하지만 지금 제가 가진 힘은 너무나도 부 족합니다.”
어느 정도 납득이 가는 거래이긴 했지만, 여전히 서준은 침묵을 지 킨다.
단순히 협조하는 것이 아니었다.
영국은 현재 숭배자들의 손아귀 에 떨어져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 었다.
한번 지배되어봤던 이들은 아무 리 물갈이를 한다 할지라도 머릿속 에 각인된 사상들은 쉽사리 없앨 수 없었다.
최악의 경우 자넷은 내부의 적으로서 공표되며 그간 어렵게 쌓아놓 은 커리어, 직책들이 모두 사라질 수 있었다.
인생 그 자체를 배팅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상해.’
의심을 거두지 않는 서준의 모습 에 자넷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눈동자를 내리깔고 시선을 회피한 다.
“허튼 수작을 부리고 있는 건 아 니겠죠?”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거짓이어도 상관없습니다, 그렇 게 된다면 그에 따른 대가를 확실 하게 치르게 될 거니까요.”
기묘하게 휘어지는 서준의 눈동 자에 등골에 식은땀이 비 오듯이 흘러내린다.
마치 포식자 앞에 놓인 하룻강아
지가 된 기분이었다.
‘이게 한서준 의장이 가진 힘.’
괜히 한서준이 유일무이한 절대 자로서 군림할 수 있는 것이 아니 었다.
만약 수가 뒤틀리게 된다면 어떠 한 방식을 써서라도 본래의 위치로 되돌려 낼 것이 틀림없었다.
배신은 절대 해서는 안 된다.
“목숨을 걸고 맹세할 수 있습니 다! 제가 여태까지 내뱉은 말 중에 한 치의 거짓도 없다는 것을.”
“그렇다면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죠.”
“대신 추가적으로 부탁드리고 싶 은 게 있습니다.”
“ 뭐죠?”
“이번 일이 무사히 정리된다면 한서준 의장님께서 저를 영국의 총 리로 추대해주셨으면 합니다.”
같은 감정을 느껴본 적이 있기에 알 수 있었다.
‘그럴싸하게 포장한 말이 아니 군.’
권력욕 따위가 아닌, 스스로의 부족함을 메꾸기 위해 강한 힘과 권력을 취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을 뿐이다.
그리고 서준은 이런 야망을 가진 이를 좋아했다.
“약속하겠습니다, 이번 일이 끝 난다면 제가 가진 모든 힘과 권력 을 이용하여 자넷 님을 영국의 총 리로서 추대하겠습니다.”
“감,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해서 돕겠습니다.”
“인사는 됐습니다, 이동부터 하 도록 하죠.”
“우선 이쪽으로 들어가시면 됩니 다.”
자넷은 손가락으로 바닥에 있는 맨홀 뚜껑을 가리키고 있었다.
“꼭 여기로만 들어가야 하는 건 가요?”
적의 본거지로 가는 것이기에 활 짝 열린 정문으로 들어가 환대를 받을 생각까지는 없었다.
그렇지만 폐수가 흐르고 악취가 코를 찌르는 하수구 속으로 들어가 야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말씀드렸다시피 회색빛 안개가 펼쳐져 있는 런던 타워 내부로 들 어갈 수 있었던 것은 단 한 대의 드론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하수 구가 드론이 침입했던 루트입니다.”
이어진 자넷의 말에서준은 고개 를 주억일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겠네요.”
숭배자들은 오늘의 계획을 신중 히 검토하고 치밀하게 준비해왔다.
드론이 내부로 침투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 었다.
‘아무리 강력한 힘에도 일종의 틈은 존재하는 법.’
그 말은 즉, 드론이 침투했던 그 루트가 가장 안전한 길이라는 말이 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런던의 지리를 완벽히 알고 있는 자넷은 삽시간에 길을 안내해주었다.
“이 앞으로 직진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바로 런던 타워로 갈 수 있는 건가요?”
자넷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주억 인다.
“네, 확실합니다.”
“약속은 반드시 지키도록 하겠습 니다.”
“의장님의 무운을 빌며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고개를 주억인 후, 앞으로 걸음 을 옮기고 있는 서준의 입가에 기 분 좋은 미소가 흐른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새 로운 경지에 들어선 이후 처음 벌 이는 싸움이었다.
이미 앞서 정복왕의 성역에서 힘 을 어느 정도 시험해보고 왔다지만 수련과 실전은 엄연히 다른 법이다.
심지어 안전을 생각할 필요도 없 었다.
‘최고의 수련상대라고 할 수 있었다.’
운이 좋다면, 고대의 존재들이
있는 은하의 위치를 알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기나긴 싸움의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단서를 얻을 수도 있다는 말 이었다.
매번 침공당하기만 해왔던 구도 자체가 바뀌게 된다는 것이었다.
‘완전히 뿌리 뽑을 수 있어.’
물론, 쉬운 일은 아닐 것이라 생 각한다.
지금 숭배자들의 본거지는 고대 의 존재들의 영토, 적진 바로 한복 판이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순간의 방심으로 예기치 못한 상
황이 발생될 수도 있는 곳이었다.
“ 후우......
심호흡을 내뱉은 서준은 마음을 안정시켜낸다.
집중된 정신이 적당한 긴장감을 이끌어낸다.
과하지 않은, 그렇다고 덜하지도 않은 적당한 긴장감이 몸을 최고의 컨디션으로 만들어내간다.
그렇게 최고조의 컨디션에 도달 하자, 무뎌졌던 감각들이 하나둘 눈을 뜨기 시작한다.
마음의 준비를 끝마치는 것으로 나른했던 근육에 긴장감을 불어넣
는 순간, 바로 앞에서 익숙한 기운 이 느껴진다.
‘왔다.’
자넷이 말한 회색빛 안개가 눈앞 에 있었다.
모든 준비는 갖춰진 상황에서 망 설일 이유는 없다.
“마음껏 날뛰어 보자.”
말을 끝맺은 서준은 곧장 발걸음 을 내디디며 모습을 감추었다.
* *
회색빛 안개가 몸을 휘감는 순간 펼쳐진 풍경은 이야기를 들었던 대 로 회색빛 평야였다.
동시에 혼돈과 비슷하지만 명백 히 다른 힘이 세계를 휘감고 있었다.
“ 이건......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확 인하고 있던 서준은 이 기운을 확 연하게 알고 있었다.
‘ 망각.’
서준이 고대의 힘 중 한 가지인 망각의 힘을 감지하고 있던 찰나, 눈앞에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띠링-!
[잊혀진 차원에 진입했습니다.]
[망각의 힘이 일대의 모든 힘을 소실시킵니다.]
메지시가 사라짐과 동시에, 망각 의 힘을 상징하는 잿빛의 기운이 파장을 일으켜 서준의 육신을 휘감 았다.
이후, 체내의 내력을 강제로 흩 어지게 만들어내려 한다.
갑작스러운 상황인 만큼, 예상치 못했다면 당황을 금치 못했을 것이 다.
하지만 이미 고대의 존재들과 연 관되어 있었다는 걸 알고 있던 만 큼 생각했던 상황 중 한 가지였다.
순식간에 변화를 눈치챘고, 이 상황을 파훼할 해답마저 도출해낸 다.
‘혼돈기.’
몸 주변에 혼돈기를 둘러내자, 두 개의 기운이 맞부딪히며 힘 싸
움을 벌인다.
그러나 사실, 이미 승자는 정해 져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혼돈은 태초부터 존재하는 힘이 다.
세계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힘 은 설사 망각이라 할지라도 잊게 할 수 없었다.
결국, 얼마 가지 않아서 전신을 휘감던 잿빛 기운들은 형체를 잃고 사방으로 흩어져나간다.
망각의 힘을 가볍게 흩는 데는 성공했지만, 서준은 개방한 혼돈의 힘올 거두어들이지 않는다.
‘추적해.’
오히려 홀러들어오는 힘을 역으로 이용한다.
파고들어온 망각에 혼돈기를 흘 려내는 것으로, 힘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곳을 추적해낸다.
빠른 속도로 타고 올라가는 순 간, 거대한 망각의 힘과 맞부딪힌 다.
파지직-!
미약한 양이었던 만큼 혼돈기가 망각에 역으로 잡아먹히게 되었지만 상관은 없었다.
이미 위치는 파악해내었다.
‘멀지 않은 곳.’
가늘어진 눈매를 한서준은 허공 위로 떠오르며 주변의 지형을 살핀 다.
동시에 익숙한 모습을 한 존재들 이 눈에 들어온다.
기이한 형태의 가면을 뒤덮은 인 간들과 무수히 많은 촉수를 뻗어내 고 있는 모습.
밖에서도 보았던 숭배자들의 모 습이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밖에서 보았던
숭배자들과 달리 저들의 촉수와 육 신에는 잿빛 기운이 자리 잡고 있 다는 것쯤이었다.
그렇게 고개를 돌린 채로 일대를 둘러보고 있던 순간, 가슴 편에서 기운이 폭발하듯 터져나갔다.
쾅-!
갑작스러운 공격이었지만, 서준 이 둘러놓은 혼돈기를 뚫어내지는 못했다.
시선을 돌려보니 방금 전 느꼈던 거대한 망각의 힘을 가진 존재가 수백에 달하는 촉수들을 휘날리며 날아오는 모습이 보인다.
“네놈이 머리인가 보네.”
그 역시 서준을 인지했는지 경악 에 가득 찬 표정이 되어 있었다.
“한서준 의장……. 네놈이 언제 이곳에……!”
이후, 존의 가늘어진 시선은 서준의 바로 뒤편에 갈라져 있는 회 색빛 안개를 확인한다.
경악이 서린 눈동자가 지진이라 도 난 것처럼 흔들리기 시작한다.
모든 권력과 힘을 이용해서 애써 감춰놓고 은폐하려 했던 통로가 한서준에게 발각되었다.
세워놓았던 계획에 없었던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왜 그렇게 놀라지? 직접 부른 거 아니었어?”
당황한 존의 시선이 분주히 움직 이기 시작한다.
“……그래, 어차피 이곳에 들어 선 이상 변하는 것은 없다.”
미소를 흘린 존의 촉수에서 잿빛 기운이 넘실거린다.
“ 잊혀져라.”
이어서 내뱉은 말은 화려한 소용 돌이를 일으킨다.
방금과 같은 가벼운 공격이 아니 었다.
고대의 힘, 망각을 이용하여 쏘 아내는 강렬한 일격이었다.
잘못하면 몸에 두르고 있던 혼돈 기, 내부의 무결강기마저 깨질 수 도 있었다.
서준은 곧장 발을 놀려 휘몰아치 는 소용돌이를 피해냈다.
예상보다 훨씬 더 가벼이 공격을 피해낸 서준은 고개를 갸우뚱- 거 린다.
“고대의 힘 맞아? 왜 이렇게 약 해?”
몰아치던 바람을 모두 피해낸 서준이 헛웃음을 흘린 채로, 존을 마 주한다.
짧은 시간 존과 서준의 시선이 서로를 바라본다.
그 순간, 존의 눈동자가 지진이 라도 난 것마냥 거세게 혼들리기 시작했다.
“말도 안 돼…… 어, 어떻게…… 분명 이 차원 또한 잊혀진 곳이거 느..n
쓰러뜨려야 할 적에게 구태여 친 절하게 설명을 해줄 필요는 없었다.
존이 당황을 금치 못하고 있는
사이, 눈을 가늘게 뜬 서준은 빠르 게 빈틈을 찾아낸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