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권 5화
405화
짧은 말과 함께 카터가 주카로의 몸체 내부에서부터 회색빛이 강렬 하게 뿜어져 나오는 코어를 뽑아낸 다.
[아, 안 돼, 그것만은…….]
“질긴 악연, 이만 끝내도록 합 세.”
표정을 딱딱하게 굳힌 카터는 코 어를 따라 재생하려는 주카로의 육 체를 타오르는 불꽃으로 휘감아 모
두 불태워버린다.
그렇게 짧은 시간, 재생이 따라 오지 못할 수준의 엄청난 불꽃에 이내 주카로가 영멸을 맞이하며 사 라진다.
뒤이어 나라연천의 벼락이 마지 막 남아 있던 혼돈왕의 머리 위로 내리치며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코 어를 박살 내버린다.
콰과광-!
끝이 났다.
방금 전까지 치열한 전투가 가득 했던 전장에 침묵이 자리 잡았다.
“정말 끝났군.”
씁쓸한 미소를 흘린 카터는 한 손에 들고 있던 주카로의 코어를 서준을 향해 내민다.
«..
갑작스러운 행동에서준이 고개 를 갸웃거리자, 카터는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바깥 은하로 되돌아가는 문을
열기 위한 열쇠라 생각하면 될 걸 세, 자네에게 말한다는 것을 깜빡 해서 내가 챙겼네.”
“괜히 민폐를 끼친 것 같네요.”
서준의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가 흐른다.
수천만에 달하는 마법을 익히고 배운 카터가 까먹었을 리가 만무했 다.
혼돈구의 숫자에서 차이가 나는 만큼 힘든 싸움이 될 수밖에 없었 기에 그저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설사 알고 있었어도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겠지.’
카리안은 새로운 경지로 나아가 는 길을 보지 못했다면 패배했을 정도의 강자였다.
이러한 사실을 카터 또한 알고 있었기에 직접 손을 쓴 것이었다.
“민폐라니. 그저 배려라고 해주
게.”
“그렇다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코어를 집어 들고 있는 서준을 응시하고 있던 카터의 입이 다시 한번 열렸다.
“찾은 길로 나아가다 보면 분명 자네가 원하는 목적지에 닿을 수 있을 걸세.”
“길을 걸어 보신 건가요?”
“아니, 생명체들이 저마다 각기 다른 인생을 살듯이 자네가 본 길 을 나는 걸어 본 적이 없네, 오랜 세월을 살아 온 늙은이의 혜안이라 고 해주게나.”
“조언 감사합니다.”
인사를 나누고 있는 두 사내의 사이로 서연이 갑작스럽게 끼어들 었다.
“이분은 대체 누구야?”
간결하고 적절한 대답을 줄 수가 없었다.
‘은인, 스승, 동료……
머릿속에 떠오르는 무수히 많은 수식어들 중 한 가지를 고르지 못 한서준이 뒷머리를 긁적인다.
“그냥 마음 편히 수호자라고 불 러주게.”
뒤를 이어 카터가 수염을 쓰다듬 으며 말을 내뱉자,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기만 하고 있던 나라연천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수호자……시라고요?”
“자네는 나를 알고 있나 보군.”
“이야기를 통해 들었을 뿐입니 다.”
“과거의 이야기들은 과장되기 마 련이지, 자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대단한 사람은 아닐세.”
“그렇지만……!”
“나는 이들과 같은 인간일 뿐일
세.”
이해할 수 없는 대화에 궁금증을 참지 못한서준이 앞으로 나섰다.
“카터 님을 알고 있어?”
“저도 고서에 적힌 것들을 보았 을 뿐입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는...”
한껏 들뜬 모습으로 이야기를 하 려던 나라연천의 말은 끝을 맺지 못하고 잘라졌다.
“이야기는 나중에 하는 게 좋을 것 같군.”
씁쓸한 미소를 지은 카터의 검지 가 하늘로 향한다.
“나도 오랜만에 내 얼굴에 금칠 을 해보고 싶네만 아쉽게도 이제 시간이 없네.”
서연과 나라연천이 넘어온 뒤로 서준이 일으켰던 균열이 메꿔지며 하늘이 조금씩 본래의 모습으로 되 돌아오고 있었다.
“외부에서 일어난 침입으로 혼돈 의 세계가 상처를 인지하고 회복하 려 하고 있네, 홀륭한 열쇠가 있다 할지라도 지금이 아니라면 빠져나 가기 힘들 걸세.”
“맞아, 바깥 은하와 혼돈의 세계 를 오가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
니니…… 균열이 메꿔지게 된다면 시간의 오차와 같은 불상사가 생길 거야, 수호자님은 엄청나게 똑똑하 시네요.”
서연이 카터를 바라보며 말했다.
“고맙네, 자네 또한 우주를 보았 나 보군……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서연 이 서준을 바라본다.
“단순히 수호자님은 아니지?”
“내 은인이셔서.”
“동료라는 표현이 옳다고 보네.”
“그렇다고 보기에는 너무 많은
신세를 졌죠.”
“내가 자처해서 한 일이었을 뿐 일세.”
“반드시 갚겠습니다.”
“그리 말한다면 기대를 해보도록 하지.”
두 사내는 서로를 응시한 채로 기분 좋은 미소를 보인다.
이제는 정말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다.
“정식으로 모두와 인사를 하고 떠나고 싶었는데, 이렇게 바로 떠 나야 될 줄은 몰랐네요……
“원래 삶이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는 것일세.”
“구로그랑, 다른 친구들한테도 소식 좀 전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끙, 은혜를 갚지도 않고 곧장 다시 늙은이를 부려먹으려 하다니.”
“죄송합니다.”
“농담일세, 그들은 나의 동료기 도 하네, 자네가 그리 부탁하지 않 았어도 당연히 전해줄 거였네.”
“감사합니다, 카터 님……
“무슨 생이별을 하는 것마냥 말 하지 말게, 반드시 은혜를 갚을 거
라 하지 않았나? 난 죽지 않네, 자 네도 계속해서 살아갈 거고.”
피식 웃은 카터가 손을 흔들었다.
“내 직감이 말해주고 있네, 우리 는 머지않아 또 보게 될 걸세, 그 러니 우울한 해후를 하지 말고 시 원하게 웃으며 헤어지는 게 좋지 않겠나?”
말없이 고개를 주억인 서준의 몸 이 조금씩 허공으로 떠오른다.
뒤를 따라 서연과 나라연천 또한 하늘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하늘에 벌어진 균열. 그 너머로 죽은 주카로의 코어를 밀어 넣자 다소 닫혀가던 균열에 사람 셋 정 도는 우습게 지나갈 법한 게이트가 생겨난다.
그 회색빛의 공간 너머로 발을 내딛기 전, 마지막으로 지상에 남 은 카터를 본 서준이 손을 흔들었다.
“또 봐요. 카터 님.”
“또 봅세.”
그 말을 마지막으로 서준은 망설 임 없이 게이트 너머로 발을 내디 뎠다.
그렇게 셋을 떠나보낸 카터는 천 천히 아물어가는 균열을 보며 홀로 남아 촉촉이 젖은 눈가 끝을 검지 로 홈친다.
“고독이라……. 오랜만에 느껴 보는 감정이군.”
최대한 아닌 척했지만 꽤나 정들 었던 서준을 떠나보내고 나니 마음 한편이 괜시리 허전했다.
“다시 만나는 건 적어도 10년은 흐른 이후겠지.”
그때까지 한서준은 또 어떻게든 성장해 있으리라.
“따라잡히지 않으려면 나도 힘
좀 내야겠군.”
카터는 한자리에서서 균열이 완 전히 닫힐 때까지 지켜보다 등을 돌렸다.
서준과 다시 재회할 그 날까지 이 혼돈의 세계에는 아직 카터가 해야 될 일이 많이 남아 있었다.
늦지 않은 귀환 시간과, 카터가
구해준 열쇠 덕에서준의 일행은 별다른 오차 없이 지구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이어서 나라연천은 오랫동안 자 리를 비웠다며 곧장 남도 차원으로 돌아갔다.
서준과 서연은 서울에 있는 집으로 향했다.
너무나 익숙한, 하지만 또 몇 년 이나 떠나 있어서 어색한 풍경이었다.
그 조용한 집에서 서연이 입을 열었다.
“모셔 올게.”
O 99
..흐.
서준이 고개를 끄덕이고, 서연의 신형이 집에서 사라졌다.
벽면에 걸린 달력을 보니 벌써 갑작스레 자리를 비운 뒤로부터 7 년가량이 흘렀다.
‘혼돈의 세계와 지구의 시간 격 차가 있구나.’
한창 정정해 보였던 부모님의 모 습이 어찌 변했을까?
두 분 모두 무공을 익히신 덕분 에 그리 확연한 변화가 찾아오지는 않았겠지만, 긴 시간 자리를 비운 만큼 어색함이 존재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다시는 걱정을 끼치지 않기로 다짐했었는데.”
서준이 혼잣말을 내뱉으며 쓴웃 음올 짓고 있을 때였다.
서연이 사라졌던 거실에 다시 한 번 빛이 번쩍이며 세 사람이 모습 을 드러냈다.
감격에 차 있는, 또 한편으로는 다급한 표정의 두 사람을 본 서준 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아버지, 어머니.’
마음속에서만 맴돌던 말이 목 끝 에 차오르는 순간이었다.
“아들!”
황급히 달려온 양정화, 어머니가 서준의 손을 잡는다.
‘어머니.’
얼굴에서 드리워 있던 진한 그늘 에서준이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 었다.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하셨을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무공을 익히고 제법 높은 경지를 이룩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어머니 두 분 모두의 얼굴과 체형 이 눈에 띌 정도로 초췌해져 있었다.
“……죄송해요.”
이번에는 아버지, 한석훈이 고개 를 좌우로 내젓는다.
“아빠가 미안하다, 위험한 일에 처했음을 알고 있었지만 부족한 능 력으로는 너를 도울 방법이 기도하 는 것밖에 없었다.”
무력감, 하나뿐인 아들이 위험에 처했음에도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는 그 현실에서 찾아올 고통은 이 루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기에서준은 마음 한편이 아릿해짐을 느꼈 다.
‘아니에요, 저야말로 너무 늦게 돌아와서 죄송해요.’
머릿속에 맴도는 말들을 쉽사리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저 따뜻한 눈빛에 담겨 있는 부 모님들의 마음이 와닿기에, 내뱉고 나면 차오르려는 눈물을 참을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행복한 자리를 울음바다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기에, 입술을 깨물며 내뱉으려던 말을 목구멍으로 삼켰다.
서준의 침묵 끝에, 한석훈의 입 이 다시 한번 열렸다.
“지금이라도 돌아와 줘서 고맙구 나.”
“저도 이렇게 다시 뵐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해요.”
진심 어린 말이었다.
혼돈의 세계에서 보낸 고된 시간 을 매일 가족과의 재회를 바라며 버텨 왔었다.
너무나도 그리워했던 이 순간이 마침내 현실로 찾아온 것이 너무나 도 기뻤기에 부모님들과 마찬가지 로, 서준의 입가에는 주체할 수 없 는 미소가 피어났다.
“ 하하……
저도 모르게 커다랗게 터져 나온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있는 서준을 향해, 부모님이 양팔을 내뻗으며 휘감았다.
기억하던 것처럼 넓지는 않았지 만, 여전히 따뜻하다.
그리고 포근했다.
익숙한 집의 풍경, 웃고 있는 부 모님. 서준이 계속 그리워했던 가 족의 풍경이다.
혼돈의 세계 있는 동안 몇 번이 고 그리워했었던, 가짜가 아닌 진 실 된 풍경에서준의 코끝이 찡하게 울려왔다.
붉어진 눈시울에선 이내 참지 못 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오빠…… 지금 우는 거야?”
서연이 어이없다는 듯 말하고 있 었지만, 정작 본인의 눈시울도 붉 어지기 시작했다.
“너도 울고 있잖아.”
이어진 서준의 말에서연이 황급 히 검지로 눈물을 훔친다.
“내, 내가 언제. 그냥 눈에 먼지 가 들어와서 그런 거야……
“믿어줄게.”
“진, 진짜라고!”
횡설수설 핑계를 둘러대는 서연 의 모습에 부모님들의 입가에도 환 한 미소가 어린다.
“우리 서연이는 어쩜 나이를 먹 어갈수록 애가 되는 걸까?”
“그러게 말이야, 옛날에는 엄청 나게 어른스러웠던 것 같은데.”
정곡을 찌르는 부모님들의 말에서연의 얼굴이 잘 익은 사과처럼 시뻘게져 간다.
때문에서준은 다시 한번 크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하하......!”
“웃지 마.”
“왜? 그냥 웃는 거야.”
“그냥 웃지 말라고!”
소리를 내지르며 화를 내는 서연 의 모습에 부모님들의 얼굴에 피어 난 미소가 더욱더 짙어졌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