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권 4화
404화
혼돈제의 경지에 있어, 혼돈구의 숫자는 절대적인 지위이자 힘의 상 징이다.
[헌데 어째서……]
고작 네 개의 구체를 가진 바깥 은하의 인간에게 패배해야 한단 말 인가?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카리안이 고개를 내저으며 부정하고 있을 때, 고고한 절대자의 모습을 하고 있던
무결천마의 형태를 벗어 던진 서준 이 지상에 안착한다.
이윽고, 힘없이 무릎 꿇고 있는 카리안의 앞에 당도했다.
카리안의 주변에 강력하게 유지 되던 혼돈구들은 일어난 균열을 견 디지 못하고, 부서져 먼지처럼 사 라지고 있었다.
“그런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으 니까 진 거야. 네 개니, 다섯 개 니……. 원래 싸움이란 숫자가 전 부가 아니야.”
수많은 전투를 치루고 지켜봄에 있어 때로는 더 약한 자가 강한 자
를 물리치고 생존하는 경우는 흔했 다.
어떠한 도구의 힘이든, 피치 못 할 환경 혹은 행운의 요소가 존재 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런 상황들 이 아니었다.
“살아남은 쪽은 패배한 쪽보다 어떤 형태로든 더 유능하고 강하니 까 살아남은 거야.”
결과가 나왔기에 카리안 또한 확 실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자신이 비웃고 얕보았던 무공의 힘에 패배한 것이다.
[……그런 건가. 확실히 우주는 넓고 강자들은 많군.]
“그러니까 절대적인 강함의 지표 같은 것은 없어……
물론,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이 느 껴질 정도의 강자가 존재하긴 했다.
하지만 결국 살아남아 끝까지 버 티다 보면 그 강자를 뛰어넘을 수 있다고 확신한다.
애초에서준이 그 산증인 아니던 가?
적지 않은 피와 땀을 흘려야 하 겠지만, 결국 끝까지 버텨낸다면 승자가 될 수 있었다.
[크흐흐...]
낮은 웃음소리를 토한 카리안이 고개를 들어 올리며 주변을 둘러본 다.
전장의 흔적, 치열한 전투와 그 로 인해 터져 나오는 굉음 소리.
그 무엇 하나도 보이고 들리지 않는다.
패배한 것이다.
개인의 패배가 아니었다.
혼돈제, 카리안으로서 이룩한 모 든 것이 무너졌다.
[아쉽구나, 갑작스러운 침공에 소
중한 것들을 잃게 되었던 우리의 심정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으나, 결국 무너진 것은 이 몸이 되었구 나.]
부서져가는 육체는 더 이상 기회 를 줄 수 없었다.
허무한 소멸이었지만,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 카리안의 눈에서는 불길이 꺼지지 않았다.
마구잡이로 뒤섞여 정의를 내릴 수 없는 혼돈의 눈빛 속에 담긴 감 정은 지독한 원한과 분노였다.
[한서준이라 했나……. 너는 승리 하여 기쁜가? 즐거운가?]
“당연한 거를 묻고 있네.”
[나는 패배하였지만 슬프지 않다. 왜냐하면 언제나 우리의 역할은 이 렇게 일방적인 피해를 입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슨 뜻이야?”
[바깥 은하, 허락도 없이 제멋대 로 남의 세계에 들어와 난동을 부 리고 미쳐간 존재들이 몇이라 생각 하느냐? 백만? 천만? 아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 많은 불 청객들로 인해, 그로 인해 소중한 가족 혹은 동료들을 잃은 이들이 몇이나 될까?]
서준의 말문이 턱하니 막혔다.
비록 그들이 원한 것은 아니었겠 지만 실제로 혼돈의 세계는 카리안 의 말대로 일방적인 침공을 받은 것이니 말이다.
[그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어째서 우리는 늘 막아야 하는 입장이며, 너희는 늘 침공해오는 입장인가?]
“……난 정당방위였을 뿐이야.”
[알고 있다.]
처음으로 서준을 바라보고 있는 카리안의 눈동자에 분노와 원한이 라는 감정이 보이지 않았다.
[네 선택이 아니지. 길을 헤매다 발견할 수도 있는 것이고, 어쩔 수 없는 균열에 휘말려 빨려들어 온 것이겠지,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 리는 항상 잃어왔다는 것이다.]
[한서준.]
마침내 다섯 개의 혼돈구가 전부 붕괴된 카리안의 발끝이 먼지처럼 흩어지기 시작했다.
[너는 혼돈인을 이해하고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바깥 은하의 존재 가 시련을 통과하지 못했겠지, 그 렇기에 부탁하고 염원한다, 이 일
방적인 세상에 올바른 질서를 바로 잡아 주기를 말이다.]
“사연은 딱하긴 한데, 그럴 수는 없어. 바깥 은하와 전쟁을 벌인다 면 내가 아끼던 모든 것도 사라질 테니까.”
서준은 쓴웃음을 지으며 인간을 닮은 카리안의 두 눈동자를 바라보 았다.
“또 생각해 봤는데, 복수하는 것 만으로 질서를 바로잡을 수 있는 건 아니잖아?”
[평화나 화해 같은 바깥 은하의 존재들이 떠드는 헛소리를 지껄이
려 하나 보군 결국 너는 대의 를 위해 스스로의 작은 것을 희생 할 수 없는 그런 나약한 존재에 불 과하다는 것이다.]
“나약하지 않아, 그저 인간으로 서 응당 가져야 할 마음일 뿐이지.”
애초에 가족들을 생각하지 않았 다면 지금 이 자리에 있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목표와 바람이 없었던 것 이기에 중원 대륙에서 허무하게 죽 음을 맞이했을 거다.
[인간이라니, 크하하…… 그렇군. 너는 아직도 그런 나약한 존재로
스스로를 규명하고, 묶어두고 있었 구나. 아쉬워. 내가 그 사실을 조금 더 빨리 알았더라면…….]
쓴웃음을 지은 카리안의 육신이 빠른 속도로 흩어져 간다.
[괜찮다, 내가 하지 못했고, 네가 이루어주지 않을 것이나 언젠가는 이 몸보다 더 큰 혼돈이 되어 이 불합리한 세상의 질서를 바로잡아 줄 새로운 지도자가 나타날 것이 니…… 아아…… 그 순간에 내가 없음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구 나…….]
마지막 말을 끝맺는 순간, 먼지 가루와 같은 눈물을 홀린 카리안의
존재가 허망하게 사라졌다.
새로운 경지로 나아가는 길을 열 어준 상대에 대한 예우로 끝까지 카리안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서준 이 아랫입술을 질끈- 깨문다.
“……내가 아는 혼돈인은 과거의 일에 사로잡혀 우리를 증오하지 않 았어, 그들도, 우리와 함께할 수 있 는 길을 찾도록 노력은 해보지.”
올바른 질서와 균형, 그리고 더 큰 혼돈.
솔직히 말하자면 이런 것은 잘 모른다.
서준이 알고 있는 것은 단 하나
였다.
소중한 것들을 지켜내고, 행복을 거머쥔다.
이 목표만큼은 처음부터 현재까 지 변함이 없었다.
다만 카리안의 마지막 유언과도 같은 말들이 마음에 걸리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어째서 카리안의 눈빛에서 정복 왕의 얼굴이 떠오른 거지.’
바깥 은하의 가장 강력한 주신, 서준이 목표로 잡고 있는 정복왕의 얼굴은 늘 딱딱하고, 무감정했지만 기이하게도 눈빛에서는 깊은 고독
에 잠겨 있음이 느껴졌다.
어쩌면 그 고독에 담겨있는 감정 이 변화를 불러오는 것 아닐까?
잠시 그런 생각에 빠져 있던 서준이 재빨리 고개를 내저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정복왕이 그 런 감정에 나약하게 무너질 리가 없지.’
드넓은 우주, 수많은 강자들이 존재하고 있으나 서준에게 있어 최 강이란 호칭은 정복왕의 것이다.
그토록 강력하고 견고한 정복왕 이 무너지는 것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손쉽게 마음속에 피어오르던 불 안감을 떨쳐내고 있던 서준의 시선 에 한 가지 변화가 감지되었다.
‘이건?’
카리안이 죽으며 그의 주변을 맴 돌고 있던 모든 것들이 먼지가 되 어 흩날리고 있었다.
분명 그렇게 보였는데 단 하나, 먼지가 되어 흩어져가고 있던 하나 의 혼돈구가 갑작스럽게 서준에게 로 달려들었다.
이어서는 서준의 주변을 배회하 고 있는 혼돈구들에 자연스럽게 합 류하며 흩어져가던 형체를 조금씩
회복하기 시작했다.
‘혼돈구가……
다섯으로 늘어났다.
또한서준은 자신에게 새로운 권 능이 주어졌음을 깨달았다.
‘ 이건......
카리안의 힘,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자랑하던 회색빛 구체.
밤하늘에 떠있는 별빛처럼 작은 형체를 가지고 있으나, 그 어떠한 혼돈인의 힘보다 강력함을 뽐냈던 힘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이거 잘하면……
서준은 확인을 위해 곧장 아직 살아남아서 전투를 이어가고 있는 혼돈왕과 혼돈의 영주들을 향하여 손을 내뻗는다.
동시에 손에서 뻗어진 회색빛 구 체들은 끝까지 살아남아서 위용을 보이던 혼돈왕들을 집어삼킨다.
“……
그렇지 않아도 힘에 부쳐가던 혼 돈왕들이 갑작스레 쏟아진 회색빛 구체들을 피하지 못하고 폭발에 휘 말려 영멸을 맞이한다.
가까스로 쏟아지던 적의 군세를 막고 있던 나라연천의 얼굴에 헛웃
음이 흐른다.
“마지막까지 이런 힘을 숨기고 계셨다니, 대체 얼마나 강해지신 겁니까?”
“……이건 나도 방금 얻은 힘이 야.”
생각지도 못한 수확이었지만 나 쁠 것은 없었다.
‘심지어 잘 사용하면 더 좋은 활 용법이 있을 것 같아.’
속으로 생각을 이어가던 서준의 시선이 이번에는 서연에게로 향했 다.
이어서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뭐야?”
분명, 네 개의 혼돈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연은 다섯 개 의 혼돈구를 가진 아리안투를 압도 하고 있었다.
지면과 하늘에서 솟아난 회색빛 의 촉수들에 사로잡혀 거친 숨을 내뱉고 있는 것이 전부인 아리안투 를 오연하게 내려다보며 웃음을 지 어 보일 뿐이다.
“태초의 시작점이라 해서 기대했 는데, 혼돈의 힘은 생각보다 보잘 것없네.”
[크으으……
자존심에 상처가 될 수도 있는 서연의 도발에도 아리안투는 별다 른 반박을 하지 못한 채 신음만을 흘리고 있을 뿐이다.
애초에 망가지고 뒤틀린 육신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때문인지 눈동자에도 전의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서연은 손을 아래로 내리그으며 선 언했다.
“먹어 치워.”
콰직-!
꿰뚫리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널 브러져 있는 아리안투의 육신을 거 대한 촉수들이 뒤덮는다.
거대한 촉수들의 밑에 깔린 아리 안투의 육신이 마치 종이 접히듯 작아져간다.
[끄아아악-!]
마지막 순간, 무얼 보았는지 공 포가 서린 비명과 함께 아리안투가 거세게 저항했으나, 무의미한 발악 에 불과했다.
이미 모든 상황은 끝난 것과 다 름없다는 사실을 알려주듯 회색빛
의 촉수들은 단숨에 그 거대한 덩 치를 어딘가로 이끌고는 종적을 감 추었다.
“시시하네……
혀를 짧게 차며 촉수들을 거둬들 인 서연의 검은 눈동자가 서준을 향한다.
“거기도 끝났나 보네……
“방금 전에.”
“약속은 잊지 않았지?”
이어서는 차가운 눈동자로 물음 을 던진다.
‘.이제 와서 잊었다고 오리발
을 내밀면 큰일 날 것 같은데.’
본능이 외치고 있었다.
장난은 금물이다.
서준은 흔쾌히 고개를 주억이며 답했다.
“당연히 기억하지.”
그 대답에 겨울날의 얼음장보다 차가웠던 서연의 표정이 눈 녹듯이 녹아내리고 있을 때였다.
콰광-!
고막을 뒤흔드는 굉음을 일으키 며 서준과 서연이 마주 보고 있던 시선의 중간에, 고통으로 얼룩진
얼굴을 한 또 다른 혼돈제가 지면 에 처박힌다.
[살, 살려줘……!]
회색빛 피를 입 바깥으로 토하는 주카로가 하늘 위에서부터 떨어지 는 무언가를 보며 고개를 크게 좌 우로 내저었다.
쾅-!
그와 함께 하늘에서부터 강렬하게 떨어져 내린 붉은빛 창이 주카 로의 머리통을 박살 냈다.
무심한 눈빛을 한 카터는 그 공 격으로 그치지 않고 수천 가지의 마법을 쏟아내며 주카로의 전신을
고기 다지듯 찢어발겨낸다.
뒤이어, 고개를 돌리어 서준을 바라보고 있는 카터의 눈이 반짝인 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