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권 3화
403화
주카로와 카리안, 두 명의 혼돈 제와 전투를 이어가고 있는 도중임 에도 불구하고 카터의 귀에는 서준 의 대화가 명확히 들렸다.
‘가족들이 무사한 것 같으니 다 행이군.’
먼 훗날, 필멸의 굴레로 인하여 자신과 같은 슬픔을 겪어야 하겠지 만 가능하다면 조금 더 많은 행복 을 누리기를 바라기 때문이었다.
표정을 굳힌 카터의 손에서 발현 된 마법들이 단숨에 거대한 방패의 모양으로 변해 미친 듯이 날뛰고 있는 주카로의 신형을 저 먼 곳으로 밀쳐내 버린다.
[쿠오오오-!]
카터는 괴성과 함께 날아가고 있 는 주카로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 으며 시선을 돌려 서준을 바라봤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과 눈빛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제가 맡겠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그 상대는 카리 안이었다.
‘죽지 말게.’
입가에 호선을 그린 채로 서준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주억인 카터의 몸이 육망성의 마법진에 휘감기며 주카로의 신형을 쫓는다.
카리안은 그렇게 이동하는 카터 를 굳이 뒤따라가지 않았다.
대신하여 어느새 자신의 시선 속 에 들어온 서준을 바라보며 코웃음 을 칠 뿐이다.
[내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가 지 않아서 그러는데…… 지금 네가 날 지목한 건가?]
“완벽하게 이해했네.”
[허허…… 어이가 없군, 자존심도 상하고 말이야.]
“걱정 마, 곧 느끼지 못할 감정 이니까.”
[무슨 뜻이지?]
“나한테 엄청 맞고 나면 그런 생 각들이 전부 사라질 거거든.”
[뭐……? 푸하하!]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린 카리안 이 혼돈구를 허공에 띄워 올리며 서준의 시선 안에 담아낸다.
[오만해, 정말로 오만하구나, 바 깥 은하의 인간이여……. 네 눈엔
이 다섯 개의 혼돈구가 보이지 않 는 것이냐?]
“잘 보이는데.”
[그에 비해서 네 혼돈구는 네 개 뿐이군.]
“ 정확하네.”
[격차가 이렇게 눈에 훤히 보이 는데도 네가 정녕 이 몸의 상대로 나서겠다고?]
“나는 뭐 다른 특별한 애기를 하 는 건가 싶어서 들어 줬는데, 그냥 쓸데없이 혓바닥이 긴 거였네.”
피식 웃은 서준의 검은 신형이 길게 늘어져 단숨에 카리안의 목줄
을 움켜쥐려 한다.
[가소롭구나…….]
코웃음을 친 카리안이 강력한 혼 돈기를 담아 날아오는 서준의 손을 쳐낸다.
쾅-!
폭음과 함께 서준의 손이 밀려나 는 것이 정상이었으나, 놀랍게도 현실은 다소 달랐다.
순간적으로 서준의 손이 먹이를 사냥하는 뱀처럼 휘어지며 팔을 휘 감아 내더니, 카리안의 목줄을 움 켜 잡아냈다.
[으음……?]
눈을 동그랗게 뜬 카리안이 짧은 신음을 흘린다.
하지만 그 이상의 감정은 없다.
[바깥 은하의 인간들이 개발한 잔재주인가. 신기하군.]
비릿한 미소를 흘린 카리안의 손 날이 단숨에 목을 움켜잡고 있던 서준의 손목을 쳐내려 한다.
인간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었지만 카리안의 태생은 혼돈인이다.
설사 목이 꺾인다고 해도 큰 타 격이 없었다.
물론, 지난 시간 무수히 많은 혼
돈인들과 싸워 온 서준도 이러한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중요한 건, 경각심을 일으키는 거지.’
저렇게 방심하고 있으면 제대로 된 전투를 할 수가 없었다.
재미도 없을뿐더러 이긴다 할지 라도 이렇다 할 성장을 이뤄내지 못할 것이다.
강렬한 자극을 위해 서준이 선택 한 것은 카리안의 왼쪽 가슴 주변 에 위치한 응집체, 코어를 자극하 는 것이었다.
[……
목을 움켜 잡고 있는 손목을 잘 라내려는 듯 손날을 휘두르던 카리 안은 전류에 감전된 듯 몸을 파르 르 떨었다.
직후, 신형이 마치 그림자처럼 검게 변하며 서준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나 거리를 잔뜩 벌렸다.
[방금 무슨 짓을 한 거냐……?!]
“단순한 잔재주는 아닌 것 같 지‘?”
애초에서준이 근거 없는 자신감 으로 혼돈구의 숫자가 하나 더 많 은 카리안을 상대하겠다고 나선 것 이 아니었다.
‘나한테는 무공이 있어.’
무공이란 서준의 자존심이자 상 징, 지금 이 자리에 올 때까지 근 본이 되어준 것이다.
그리고 이 무공은 혼돈의 세계에 존재하는 외계의 생명체 혼돈인에 게도 치명적으로 작용한다는 사실 은 명확했다.
많은 이들이, 더욱 강력한 힘을 읊으며 무공을 단순한 잔재주라고 말한다.
하지만 서준의 생각은 달랐다.
‘만류귀종.’
모든 길은 하나로 통한다.
강력하다는 고대의 힘들과 마찬 가지로, 무공 또한 궁극에 달한다 면 그 이치이자 근본적인 힘에 도 달하게 될 것이다.
‘비록 닿지 못하여 확신할 수 없 지만……
그 경지가 바로 무극이 될 것이 다.
강렬한 위협과 함께, 서준의 의 지를 느낀 것일까?
다소 오만한 시선을 보내왔던 카 리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과연…… 너 또한 혼돈제. 자격 이 충분한 존재임을 인정하마.]
풀어져 있던 자세 또한 새로이 잡은 카리안이 다시 한번 입을 열 었다.
[바깥 은하에서 태어나 위대한 혼돈의 힘을 수여받은 자여. 이 몸 의 이름은 카리안, 자네의 이름은 무엇이냐?]
“……한서준.”
짧게 답한서준의 눈매가 가늘어 졌다.
그러고는 고심 끝에, 뒤를 이어 한마디 말을 덧붙였다.
“무결의 신.”
[뭐?]
“작은 흠조차도 존재하지 않는 완벽의 신.”
그것이 신명의 힘, 혼돈의 세계 에서까지 사용할 수 있게 된 신의 권능을 만끽하는 서준의 전신에 힘 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오늘 네놈이 쌓아올린 신화에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겨주도록 하마!]
동시에 카리안의 전신에서 뻗어 져 나온 혼돈기가 수천 개의 응집 체가 되어 서준의 시야를 뒤덮는다.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저 회색빛 구체에 맞으면 위험하 다.
서준은 양 손바닥을 박수를 치듯 강하게 부딪친 후 정면으로 넓게 펼쳤다.
‘ 천마신장(天魔如來).’
거대한 두 개의 천마의 손바닥 이, 황금빛을 뿜어내는 무결기를 감싼 채 거리를 좁혀냄에 따라 일 대를 뒤덮은 회색빛 구체들과 충돌 한다.
콰과광-!
폭음과 함께 천마신장의 거대한 손바닥에 금이 가고 균열이 일어나 붕괴된다.
일반적인 천마신장이라면 이를 견디지 못해 사라져야 했으나, 서준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천마강림(天魔降臨)!’
단순한 손바닥은 이내 불꽃처럼 타오르는가 싶더니 황금빛을 휘감 은 천마의 모습으로 현신하여 형상 을 유지한다.
하지만 여전히 불안불안하며, 지 금 당장 힘이 다해 부서져도 이상 하지 않을 상황이다.
무공으로써 무림 세계에 전설로 만 전해져 오는 초대 천마의 힘을 발현해냈다.
이것만 해도 혼돈의 세계에 오기 전까지의 서준은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
하지만 이것으로도 부족하다.
애초에 혼돈제라는 존재는 어지 간한 전설 그 자체라고 볼 수 있 는, 주신 하나를 우습게 뛰어넘는 존재다.
‘아무리 천마가 전설로 내려올 정도의 압도적인 강자라지만……
본신도 아닌 화신이었다.
그 힘을 일부 빌려 사용해서는 다섯 개나 되는 혼돈구를 가진 카 리안이 내뿜는 힘에 밀릴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이 천마강림으로 불러낸 화신 자체를 완전히 다른 존재로 바꾸어야 한다.
‘상상 속 초대 천마의 모습을 하 고 있지만…… 나의 것과 다름없
무결의 주신, 스스로의 상징이 되어야 한다.
서준의 전투의지가 불꽃처럼 타 오르며 천마의 화신을 휘감아 또
하나의 변화를 이루어냈다.
그리고 서준의 완벽을 추구하는 집념은 이 순간, 언뜻이나마 이 불 리한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무극으로 나아가는 길을 비추어 낸 다.
‘아아......!’
회색빛 혼돈기가 황금빛을 내뿜 는 천마의 몸을 집어삼키는 듯한 불꽃이 되어 하늘 높이 샘솟는다.
이어서 그 혼돈의 불꽃으로부터 다시 태어나듯 모습을 나타낸 존재 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흔히 생각하는 흉악하고 난폭한
형상을 한 천마의 모습이 아니었다.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무심과 권 태.
고고한 모습, 그 어떠한 감정조 차도 느껴지지 않는 절대자로서의 위엄과 존재감이 뿜어져 나온다.
‘변형, 무결천마〈無缺天魔)!’
서준은 자신이 만들어낸 무결천마와 스스로의 몸이 하나가 되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지금 이 순간, 서준은 세계의 지 배자이자, 눈빛만으로도 존재 자체 를 소멸시킬 수 있는 절대자가 되 었다.
서준은 자신이 도달하고자 하는 무극의 길 한편에 왜 이런 모습이 펼쳐졌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천마의 길.’
어떠한 존재라 할지라도 무릎 꿇 리고 지배할 수 있는 절대자, 모든 것을 익힌 무의 극에 달한 존재.
검, 도, 창, 궁, 권, 각 등과 같은 한 사람이 익혀도 끝을 보기 힘들 다는 모든 무예술을 궁극으로 익힌 존재다.
‘내가 정말 다룰 수 있을까?’
짧은 의문은 덮었다.
애초에 불가능했다면 이런 형태 의 무결의 화신이 태어났을 리도 없다.
서준은 의심하지 않았다.
스스로의 가능성을 믿으며 오직 눈앞의 적에 집중한다.
‘할 수 있어.’
생각해보면 애초에 과거 최강이 자 최악의 마선이라 불리던 시절 서준은 모든 무예를 익혔었다.
그 이후로는 가장 익숙한 권 혹 은 검에 치중하였으나 모든 것을 다룰 수 있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거듭 말하여, 만류귀종이 었다.
‘모든 무예는 결국 하나의 길로 통하는 법.’
그것이 곧 하나의 길이다.
쉴 새 없이 펼쳐지고 변화하는 천마의 무공들에 담긴 완벽기와 혼 돈기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던 카 리안의 구체들을 찢고, 자르고, 갈 라내며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그 틈새, 언뜻 비치는 경 악한 표정의 카리안을 향해 마지막 까지 기회를 노리며 사용하지 않고 있던 최후의 한 방이 뻗어진다.
‘오랜만이네.’
본래 서준은 주먹을 주로 사용해 왔지만 훌륭한 검들을 얻은 뒤로는 휘두르지 않았었다.
애초에 모든 것을 다룰 수 있는 만큼 더 효율적인 무기를 다루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허나 지금은 다시 한번 반대의 상황이 되었다.
단순한 무기가 아닌 그야말로 절 대자의 주먹.
어떠한 방패나 방어막으로도 막 을 수 없는 압도적인 힘이다.
그렇기에 지금 서준이 내뻗을 주 먹은 어떠한 무기보다도 위협적이 고 파괴적인 것이다.
완성된 주먹에 무결기와 혼돈기 가 뒤섞여 강렬한 기운으로 승화되 며 하나의 결론을 만들어 낸다.
‘이 주먹은 막을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다.’
개연성을 역전시키는 것이 아니 다.
운명을 확정시킨 것이다.
이미 결과가 정해진 운명을 향해 서준의 전력을 담은 주먹이 강렬한 기운을 휘감은 채로 공간을 가로지
른다.
수천만에 달하는 회색빛 구체들을 부숴내고, 뚫어내며 그 안에 웅 크린 채로 몸을 숨기고 있는 혼돈 제, 카리안의 심장을 향해 쇄도한 다.
[……!?]
공격에 적중당한 순간 다시금 검 은 그림자로 변하며 위기를 모면하 려던 카리안의 몸이 자연스럽게 본 래의 형태로 변하며 심장이 관통한 다.
[커헙...]
두 눈동자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격하게 떨려오고 있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자 랑하는 능력 중 하나가 확정된 운 명에 봉인되듯 사라졌다.
[어째서 내 힘이……?]
그리고 이미 죽음을 선언한 주먹 은, 당연하다는 듯 힘의 원천인 카 리안의 코어를 부숴내며 딱딱하게 굳은 등 뒤로 튀어나와 하늘 위로 치솟았다.
[말도 안 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젓 는 카리안의 두 눈동자에는 절망이 깃든다.
허나 현실은 너무나도 잔인한 법 이다.
그의 힘을 대변해주고 있던 혼돈 구에 균열이 일어나고 있었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