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권 23화
398화
“감사합니다.”
약조를 한 정복왕이 등을 돌리자 서연이 고개를 숙이며 말한다.
그 말에 담긴 미묘한 감정에, 잠 시 걸음을 멈칫한 정복왕은 씁쓸한 미소를 짓는다.
“약속한 거는 잊지 않았겠지?”
물음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정복왕 또한 완전히 지켜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적 없었다.
애초에 생물의 감정 자체를 배제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처음부터 완벽히 지켜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우주의 존재 자체를 서연에게 인 지시키는 것, 이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 자체를 이해시키기 위함이 분 명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서연은 머지않 아 또 한 가지 사실을 눈치채게 될 것이다.
‘다른 세계선의 존재들……
개인의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다 른 세계선에 도달하여, 제멋대로 개입을 한 이기적인 존재.
시간과 공간에 대해 인지를 한 지금의 서연이 그를 어떤 시선, 생 각으로 바라볼지는 뻔하였다.
‘혐오와 경멸.’
하나 같이 견뎌내기 힘든 감정들 이다.
허나 걱정을 할 필요는 없었다.
절대 그 상황이 닥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확실하게 정리해낸다.’
얼굴에는 씁쓸한 미소가 피어난 다.
본래 가진 힘의 회복을 끝마친 만큼 사실상 드넓은 우주에서도 최 강에 가까운 존재가 되었다고 자부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다른 누구도 아닌 정복 왕, 본인이 찾아올 역천의 운명에 대한 우주의 분노를 맞이할 준비해 야만 했다.
때문에 정복왕은 가르침을 남기 지만 이들에게 스승 혹은 은인이 되며, 인연으로 서로를 묶을 수는 없었다.
너무나도 쓸쓸하고 외롭지만 ‘고 독’이라는 고통을 오랜 세월 견뎌 온 만큼,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인 정복왕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신 을 직시하고 있는 서연을 바라본다.
“수련이 끝난다면 모두 잊어.”
모든 것을 초탈한 듯한 미소를 지은 정복왕이 다시 한번 선언했다.
“수련을 끝내고 혼돈의 세계로 가게 된다면, 나에 대한 감정과 추 억들을 모두 잊는다는 약속올 반드 시 지켜.”
그 말과 함께 정복왕이 공간을
넘어 사라진다.
홀로 남은 서연은 정복왕의 말을 다시금 곱씹었다.
‘이해할 수 없는 말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조건이 다.
언젠가는 이를 납득할 수 있는 날이 올까?
우주의 분노를 맞이할 준비를 하 고 있는 정복왕의 각오에 대해서 관계를 전혀 짐작할 수 없는 서연 으로서는 고개를 크게 내저을 수밖 에 없었다.
“어렵네.”
하지만 이 또한 아주 먼 이야기 다.
지금은 눈앞의 현실에 집중을 해 야 할 때다.
고개를 내저은 서연은 당장은 눈 앞에 있는 검과 붉은 장미를 노려 보았다.
‘이 모든 것을 해낸다면……
제멋대로 행동하는 사고뭉치인 오빠를 구하러 갈 수 있다.
부모님들의 불안감을 확실하게 지워내고, 가족의 행복을 되찾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오래 지체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급박한 마음으로는 무엇 도 이룰 수 없단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단순히 빠른 게 아니라, 잘해내 야 해.’
주변에 넘치는 공허의 힘으로 단 숨에 기운을 회복한 서연은 의식을 집중하며, 정신을 집중한다.
‘강해지자. 열심히, 누가 됐든 더 이상 우리 가족의 행복을 방해하지 못하게……!’
드넓은 우주와 그 내면을 이해했 지만, 지금의 서연이 바라는 것은
단 하나, 오로지 그것뿐이다.
때문에 성장한다.
‘조금만 더 기다려 줘.’
한 달, 그 시간 안에 정복왕이 만족할 만한 성장을 이루어 내어 반드시 혼돈의 세계로 향할 것이다.
평화자, 혼돈인들이 모인 철벽의
보루는 오랜만에 싸움이 없는 평화 로운 나날을 보냈다.
매일같이 이어지던 파멸자 혼돈 인들의 침공 없이 1개월.
폭풍전야와 같은 상황이라 볼 수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이 상태로 전쟁이 끝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기대감을 품은 채로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카리안의 하늘에 떠 있는 인공 달이 가늘어지는 순간.
광량한 평야뿐이었던 혼돈의 세 계의 일부에서 커다란 문이 열렸다.
다른 세계와 오갈 수 있는 통로 를 거칠게 열어젖힌 이는 괴성을
울부짖는 혼돈제, 주카로였다.
그리고 그 너머로부터 혼돈제, 정복의 아리안투라 불리는 존재와 그를 따르는 군단이 쏟아지듯이 뛰 어나와 철벽의 보루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성채 위, 공격을 직감하고 허공 으로 날아올라 있던 카터의 얼굴이 단숨에 창백하게 변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군.”
주카로가 찢어발긴 공간 너머로 뛰어오는 괴이한 존재들은, 지금까 지 싸워왔던 혼돈인들과 달랐다.
일말의 이성도 남지 않은, 오롯
이 전투만을 바라는 광기에 물든 듯한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느껴지는 기운 역시 일반적 인 혼돈인에 비해 아주 폭력적이다.
심지어 그 숫자가 마치 개미 떼 와 같이 많았다.
말 그대로, 엄청난 숫자의 전쟁 광들이 군단을 이루어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카터는 지금까지 중 그 어느 때 보다도 큰 위기를 느끼고 있었으며, 서준 또한 지금의 사태를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혼돈제가 하나 늘었네요……
“뭐……?”
이미 서준으로부터 혼돈제란 것 이 누군가의 이름이 아닌, 어떤 호 칭이란 설명을 들어 알고 있던 카 터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당장 저 멀리 보이는 주카로와, 머리를 굴리며 견주고 있는 카리안 도 골치가 아픈데 또 하나의 강적 이 나타났으니, 기껏 서준이 강해 져서 귀환한 의미가 없어졌다고 느 낀 탓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직접 움직이 지는 않고 있다는 점 정도네요.”
대신하여 어지간한 혼돈왕들을
압도해낼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기운을 머금은 존재가 문을 넘어 나타났다.
우르르 미친 듯이 몰려드는 혼돈 인들도 까다로웠는데 새로운 걱정 거리가 생긴 것이다.
심지어 흡사 거인을 닮은 그 존재의 어깨 위에는 거대하면서도 둔 탁한 철제 봉이 수십 개씩 들려 있었다.
철제 봉은 둥근 형태로 날카롭지 는 않았지만, 서준과 카터는 저 무 기의 용도에 대해서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공성병기?”
“성문을 부수려는 것 같군.”
두 사람이 대화를 주고받고 있을 때, 날카로운 바람 소리와 함께 허 공을 날아 온 철제 봉이 철벽의 보 루의 성문을 강타한다.
콰광광-!
지축을 뒤흔드는 소리와 함께 견 고했던 성문이 형태를 잃고 일그러 졌고, 이를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 오던 붉은 는의 혼돈인들이 속도를 높인다.
[키에에엑-!]
놈들이 지르는 비명에 기겁한 카 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져갔다.
“최악의 상황인 것 같군.”
얼굴에는 그늘이 가득했고, 미간 은 찌푸려져 있었다.
성문이 완전히 부서진 것은 아니 었지만 이 기세라면 시간문제다.
당장 저 거인이 날리는 철제 봉 이 두 번 정도만 더 날아와도 완전 히 파괴될 것이었다.
점점 더 얼굴이 창백해지던 카터 는 문득, 태평한 얼굴을 한서준을 보며 의문을 느꼈다.
“자네 혹시 무슨 방법이라도 있 는 건가?”
“성채에 다가오지 못하게 눈앞의 적들을 쓸어내면 그만 아닌가요?”
“말처럼 쉽지는 않을 걸세.”
고개를 내젓는 카터의 앞, 손바 닥 위로 혼돈기를 일으킨 서준이 미소를 보인다.
“직접 두 눈으로 보시는 게 빠르 실 것 같네요.”
* *
성벽 위에 올라, 물밀듯이 몰려 드는 적군을 본 평화자 혼돈인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렇게 끝나는구나.’
지겹도록 힘겨운 전쟁이었다.
아득할 정도의 격차를 보니 싸워 보고 싶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냥 이 상태로 모든 것을 끝내 고 최후를 맞이하겠다는 생각을 할 무렵.
다급히 성채의 가장 높은 곳에 선 크로고가 외쳤다.
[다들 절대 포기하지 마라! 수호 자님과 함께 싸우는 한 우리에게 패배는 없다-!]
언제나처럼 우렁찬 크로고의 목 소리는 아군의 사기를 북돋는 역할 을 해야 했지만, 이번만큼은 달랐 다.
크로고에 비하자면 절반도 안 되 는 크기를 가진 혼돈인이 그의 곁 으로 다가와 고개를 내젓는다.
[끝났습니다. 총사령관님. 수호자 께서도 저 많은 악의 무리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실 수는 없습니다.]
크로고의 눈매가 단숨에 날카로 워지더니, 즉각 반응을 보였다.
거대한 크로고의 손바닥이, 단숨 에 반박 의견을 내뱉는 혼돈인의 얼굴을 후려친다.
[커첩一!]
신음을 내지르며 바닥에 엎어진 혼돈인의 모습에 크로고를 바라보 고 있던 눈동자들이 일제히 보름달 마냥 휘둥그레진다.
크로고는 평화자 혼돈인들 중에서도 가장 성격이 온화한 편으로 알려진 존재다.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화를 낸 적이 없었고, 아무리 다급한 상황 에서도 재촉을 하지 않았다.
그런 크로고가 말 한마디에 손찌 검까지 할 정도의 커다란 성을 내 고 있었다.
[어리석은!]
이어서 꾸짖는 목소리를 내뱉은 크로고가 고개를 좌우로 움직이며,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수호자께서 지켜주시는 게 아니 다. 함께 싸우는 것이다, 우리들의 힘으로 맞서야 한단 말이다!]
다소 정리가 되지 않는 듯한 말
이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크로고의 말을 이해했다.
[함께 싸운다. 스스로를 지켜내는 거야. 수호자께서는 도움을 주실 뿐이다.]
싸운다.
그 강렬한 의지를 불태운 크로고 는 시선을 돌리어 마치 해일처럼 밀려드는 적들을 바라본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숫자를 보니 눈앞이 캄캄해지는 심정이었다.
하지만 끝까지 싸울 것이다.
그게 먼저 떠난 동료들, 그리고 지금까지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싸 워 준 이들에 대한 의리였다.
이미 패배가 확정된 절망적인 상 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만, 양손 놓고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 이다.
‘더 이상 참을 필요도 없겠군.’
어차피 오늘이 끝이라면 모든 것 을 불태우고 생을 마감한다.
깊게 호홉을 들이마신 크로고가 전장을 향해 뛰어들려 할 때였다.
해일처럼 밀려드는 적군과 동시 에 하늘 위로 거대한 구체들이 떨
어져 내리기 시작한다.
혼돈의 세계에서 처음 보는 짙은 운석에 자연스레 크로고의 눈이 동 그랗게 뜨인다.
‘저게 뭐지?’
어찌나 많이 떨어지는지 혼돈왕 의 격을 갖추고 있는 크로고로서도 정신을 집중한 채로 숫자를 세어야 할 정도였다.
자연스레 처음으로 머릿속에 떠 오른 것은 걱정이었다.
‘설마 포격까지 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더욱더 전투가 아득해 진다.
그렇지 않아도 힘든 전투였는데, 하늘에서 쏟아지는 포격까지 요새 를 덮친다면 내부의 공황이 얼마나 더 커질지는 불 보듯 뻔하였다.
[아…….]
저도 모르게 입에서 아찔한 한숨 을 내쉰 크로고의 눈매가 점점 좁 혀 졌다.
[……이상해.]
예상대로 최악의 상황이라면 적 군이 도착함과 동시에 포격이 떨어 져야 한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떨어진 운석 들이 떨어진 곳은 요새가 아니었다.
콰과광-!
적들의 머리 위로 운석들이 낙하 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지?]
의문을 내뱉은 크로고의 시선이 문득 위를 향했다.
“허허허—!”
하늘 높은 곳에 선 카터가 갑작 스럽게 서준을 보며 박장대소를 터 트린 탓이다.
‘ 설마......?’
자연스레 크로고의 눈에는 놀라 움과, 희망이 깃든다.
저 아찔할 정도의 포격이 적이 아닌 아군의 것이라면?
희망을 품은 크로고의 마음에 대 한 화답은 하늘에 떠 있는 카터가 대신해주었다.
“설마 이런 골렘 군단을 데려왔 을 줄은 예상치 못했군, 이제 자네 만 있다면 천만 대군이 몰려와도 무섭지 않겠어!”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