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권 22화
397화
다시 한번 책을 읽기 시작한 서 연은 책들을 읽는 데 자그마치 한 달이 넘는 시간을 소비하고 있었다.
그간 책들을 모두 읽는 데 일주 일이란 시간이 걸렸던 걸 생각한다 면 수배에 달하는 시간을 소모한 것이었다.
집중력이 저하되었거나 하고 싶 지 않은 것을 강제로 하게 되어 굼 떠진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어느 때보다도 맑은 정신 으로 집중을 했다.
정복왕의 가르침을 따른다고 약 속을 선언한 만큼 서연은 최선을 다하여 책을 꼼꼼히 읽어가며 받아 들였다.
‘이전처럼 대충 읽기만 하는 형 식으로는 안 돼..
촉박함이 느껴지는 시간 속, 오 랜 시간 독서에 몰두를 하게 되었지만 정작 책을 정독하기 시작한 이후로, 처음에는 짜증 나 있던 마 음이 점점 가라앉기 시작했다.
‘책에 무슨 술법이라도 걸어둔
건가?’
혹시나 싶어서 책을 들어올리고, 혼들어보며 확인해 보았지만 평범 한 종이일 뿐이었다.
아무리 정복왕의 능력이 뛰어나 다고 할지라도 술법을 사용해두었 다면 흔적 정도는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신기하네.’
기묘한 감정을 느낀 채로 계속해 서 책을 읽어가고 있을 때, 서연은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안정이라……
확실히 근래 느껴본 적이 없는
감정이었다.
계속되는 전쟁에 적들과의 끊임 없는 싸움 때문일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평온한 감정을 느껴 본 적은 서준이 사라지기 전 평온 한 일상을 누리고 있을 때뿐이었다.
‘정말 아득바득 살아왔구나.’
다시 한번 평정을 찾을 수 없는 것일까?
아니다.
이미 느껴본 적이 있는 만큼 충 분히 가능하다.
부동심, 중용, 의식하지 않았던
단어를 다시 한번 상기하고 받아들 여간다.
이윽고, 서연이 책의 마지막 페 이지를 넘긴다.
“아……
손에 들고 있던 마지막 책을 떨 어트린 서연은 안타까움의 탄식을 흘려낸다.
저도 모르게 홀러나온 탄식에서 연의 두 눈동자가 휘둥그레진다.
‘내가? 아쉬워한다고?’
위험에 빠진 가족, 오빠를 구해 와야 하는 이 상황 속에 책에 집중 한 채로 여유를 부리고 있었던 것
이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성과 달리 마음은 꽤나 평온 했다.
그런 서연의 옆에 다가온 정복왕 이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로 말한 다.
“혼자서 걱정한다고 당장 무언가 가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 지?”
그 질문에 놀란 표정을 한 서연 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를 바꿀 수 없는 걱 정은 그저 불안에 불과한 것이네
요.”
“그리고 불안감은 대체적으로 좋 지 않은 결과를 이끌어내지. 제대 로 책을 읽고 이해했네. 포악한 힘 들을 다루고 있는 만큼 마음을 다 스리기는 쉽지 않았을 텐데 잘해냈 어.”
“감사합니다,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네요.”
서연은 천천히 고개를 주억인다.
마음의 안정을 찾아낸 것만으로 도 차오르던 불안과 눈앞에 있던 거대한 벽이 무너진 느낌이다.
“공허의 힘도 훨씬 더 안정이 됐
지?”
“네. 지금이라면…… 더 많은 공 허를 다룰 수 있을 듯해요.”
“그렇다면……
정복왕은 일전에 나라연천에게 보여주었듯 기운을 실 가락처럼 뽑 아내고, 힘을 웅축시켜낸다.
심지어 이번에는 그것으로 끝나 지 않았다.
그 기운으로 구체 형태의 실타래 를 만들어낸다.
“공허의 힘으로 만들 수 있겠 어?”
일반적인 기운이 아닌 공허의 힘 으로 만들어야 하는 거다.
평소라면 절대 해내지 못했을 것 이다.
‘그리고 스스로의 무능함에 화가 났겠지.’
허나 지금이라면 다를 것이라 장 담할 수 있었다.
차분해진 마음으로 손바닥을 펼 친 서연에게서 회색빛 기운이 실 가락처럼 뽑혀 나온다.
이어서는 실타래의 형태로 가볍 게 얽힌다.
일련의 과정을 대수롭지 않게 해 낸 서연이 정복왕을 바라봤다.
“ 성공했네요.”
“잊지 마, 안정이야말로, 공허의 힘을 다루는 데 가장 큰 도움이 될 거야.”
“명심할게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정복왕 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면 이제 두 번째 과정으로 넘어가자, 지금 너는 공허의 힘을 외부로 이끌어낼 수 있지?”
“네. 사도로서 힘을 내려주신 뒤
로부터……
“하지만 이런 건 못 할 거야.”
정복왕이 손가락을 튕기자 주변 의 풍경이 아무것도 없는 회색빛 세계로 바뀐다.
주변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서 연은 그보다 더 경악을 금치 못했 다.
다만 마음속에 자리 잡은 안정은 무너지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이런 공간을 만들 어낼 수 있는 거죠?”
단순히 이동한 게 아니었다.
원하는 공간을 단숨에 창조해냈 다.
밑도 끝도 없는 강력한 권능을 보여준 정복왕이 뒷짐을 지며 말했 다.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시간 과 공간을 지배해내면 되는 거야.”
시간과 공간을 함께 지배한다는 것, 그 말도 안 되는 지경의 이야 기를 꽤나 신중한 표정으로 들은 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정복왕님께서도 완벽히 시공간을 모두 지배한 건 아니죠.”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놀란 표정을 한 정복왕의 질문에서연은 자신감 넘치는 어투로 말을 한다.
“정말로 시간과 공간을 원하는 대로 지배할 수 있으셨다면 애초에 정복왕님께서는 주신이라고도 불리 지 않으셨겠죠.”
“맞아, 창세신이라고 불렸겠지.”
서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정복왕 이 너털웃음을 홀린다.
“만약 그렇다면?”
정말로 시공간을 완벽하게 지배
할 수 있다면, 미래와 현재, 심지어 과거마저 뒤틀 수 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원하는 바를 모두 이뤄냈을 것이다.
아니, 단순히 원하는 바가 아닌 우주 전체를 지배해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고 계시죠.”
“ 흐음.
묘한 신음을 흘리는 정복왕은 고 개를 주억인다.
“당장 잠에 드시지도 않으셨을 거고 오빠가 사라지게 내버려 두지 도 않으셨겠죠.”
“반은 맞고 반은 틀렸어, 직접 확인해 봐.”
이어서 정복왕의 손에서 흘러나 온 기운이 서연의 뇌리를 꿰뚫듯 빠른 속도로 지나간다.
찰나의 순간, 정말로 눈 깜빡할 시간 동안 서연은 처음 주신이 되 었을 때 보았던 드넓은 우주를 보 게 되었다.
세계를 마주했었다고 스스로 자 부하던 그때, 서연이 보았던 세상 은 무수히 많은 은하계, 별의 바다 였다.
하지만 두 번째로 같은 경험을
한 이 순간, 서연은 충격을 받아 제자리에서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맙소사…… 제가 보았던 건…… 정말 우주의 일부분에 불과했던 건 가요?”
우주, 주신이 되는 순간 그 거대 한 세계를 마주했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서연이 방대하다 느낀 우주는 극 히 일부분에 불과했었다.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우 주는 드넓고 무수히 많은 변수가 존재하고, 서로 다른 시간 축으로 서 존재하고 있다는 거야, 정말로
시간과 공간을 모두 지배하고 있다 할지라도 우주 전체에 원하는 바를 전부 이뤄낼 수는 없다는 거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는 정복왕 의 이야기가 다시 한번 뇌리에 꽂 혀온다.
이제는 알 것 같았다.
눈을 닫고, 모든 감각을 하나로 집중한 채로 우주를 느끼려 한다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드넓은 세 계가 느껴진다.
“시간과 공간, 빛과 어둠, 창조와 소멸, 영혼과 존재와 같은 무수히 많은 변수들과 뒤틀린 시간 축
“A의 세계를 바꾼다는 것은 B의 세계에 도착했다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정복왕의 침착한 목소리에서연 의 몸이 파르르 떨려왔다.
새삼 혼돈의 세계의 거대한 존재 감에 저도 모르게 압도되어 버린 탓이다.
주신에 올라 강자가 되었다는 오 만함에 취했던 것은 그야말로 얕은 지식과 안목으로 인해 생겼던 어리 석음이 었다.
“이제 알겠지?”
“네. 결국 이 세계의 결과는 바 뀌지 않는다는 거네요.”
어쩌면 똑같이 무결의 주신에 오 른 제2, 제3의 서준은 혼돈의 세계 에 빨려 들어가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를 인지할 수는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은하계가 아닌 무수히 많은 우주 를 뛰어넘은 후에야 뒤바뀐 시간 축을 간신히 인지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감히 허용할 수 없는 방대한 우 주의 규모에 입을 꾹 닫은 서연의
눈에 문득 빛이 번뜩였다.
“혼돈의 세계 또한 하나가 아니 겠네요.”
“정답.”
“상상 이상의 강자들이 있을 거 고요.”
“당연하지.”
“저는 정말 우물 안 개구리였네 요.”
“누구나 다 그런 시절이 있는 거 지.”
어째서인지 씁쓸한 미소를 짓고 있는 정복왕을 보던 서연은 또 하
나의 의문을 떠올렸다.
“제게 이런 것을 알려주신 이유 가 뭐죠?”
어쩌면 서연이 살아가는 평생 동 안 몰랐을지도 모를 세계의 거대한 비밀을 알게 되었다.
이 상황에 대해 의문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간단해, 시간과 공간을 지배한 다는 말을 확실히 이해시키기 위해 서지.”
“……지배한다고 해도 그 모든 것을 제멋대로 다룰 수 있다는 건 아니라는 말씀이시죠.”
“정확해. 정해진 법도 이상의 시 공간을 뒤트는 것은 다른 우주로 가는 것뿐이야, 아니면 세계가 그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는 일종의 거래가 필요하지.”
“예를 들자면 한 사람의 시간과 삶을 되돌리는 회귀 같은 거 말이 죠?”
“한 사람에게 회귀를 부여한다는 것은 그 세계 전체를 되돌린다는 거지, 있었던 것이 없어지고, 다시 시작되는 행위. 만약 정말 이런 기 적을 행하고 싶다면 그에 따른 대 가가 필요하겠지.”
“만약 제대로 된 거래가 이루어 지지 않은 상황이라면…… 시간을 되돌리는 것이 아닌 기억을 가진 채로 다른 세계로 가는 것뿐이겠네 요.”
“똑똑해, 괜한 설명이 필요 없어 좋아.”
미소를 흘리고 있는 정복왕을 보 며 서연이 질문했다.
“혹시 정복왕님께서도 그런 실수 를 하신 적이 있으신가요?”
“있을 것 같아?”
“……아니요.”
“맞아, 나는 없어.”
정복왕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피어나고 있었지만 서연은 이를 인 지하지 못했다.
방금 들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개 념에 대해 머릿속으로 빠르게 정립 해 나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가 없이 내가 움직일 수 있는 시간과 공간에는 한계가 존재할 수 밖에 없고, 그리고 그 폭을 늘려가 는 게 시공간 지배의 경지를 끌어 올리는 것이겠죠.”
“할 수 있겠어?”
정복왕은 질문을 던지며 허공에
손을 뻗더니, 검 한 자루를 꺼내어 낸다.
서연은 대답 대신 검을 향해 손 을 뻗어 의식을 집중했다.
‘우선 저 장미가 존재하는 공간 을 완전히 분리하고 지배해내야 해.’
아무리 무생물이라지만 이미 정 복왕이 지배하고 있는 이 넓은 세 계 전체를 서연이 어찌할 수는 없 다.
회색빛 촉수가 계속해서 휘감고 회전하기를 반복한다.
그러자 광이 흐르고 날카로웠던
검이 조금씩 녹이 생겨난다.
시간이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검을 완전히 녹슬게 할 만큼의 시간을 홀려보내지는 못 한 서연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제 자리에 주저앉았다.
“커헉......
실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복왕은 오 히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완벽히 이해하고 바로 적용해냈 네, 처음 시도에 해낼 거라고는 생 각도 못 했는데.”
“며칠만 주시면……
“해낼 수 있겠지, 하지만 다음 과제가 생기겠지.”
이번에 정복왕의 손에 붉은 장미 가 피어났다.
비생물이 아닌 생물의 시공간을 지배하는 것, 그 모든 것을 이해한 서연이 강렬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 덕인다.
“한 달 안에 해낼게요.”
“여기까지 해내고, 마지막 수련 까지 끝낸다면 약속했던 대로 혼돈 의 세계로 가는 방법을 가르쳐 줄 게.”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