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권 21화
396화
[아직은 때가 아니다. 수호자 녀 석이 숨기고 있는 것이 남아 있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허나 생존 본능으로부터 발현된 직감이 알 수 없는 불안감과 찝찝 함을 일으킨다.
대부분 욕망에 잡아 먹혀 앞뒤를 가리지 못하는 혼돈제들 중 카리안 과 같이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 는 존재는 너무나 적었다.
애초에 이런 본능과 이성에 뒤섞 인 카리안의 기묘함에 이끌려 주카 로 또한 뜻을 함께한 것이었다.
[하지만…….]
[머지않았다, 주카로, 아주 조금, 조금만 더 참으면 된다.]
평소였다면 주카로는 여기서 대 화를 끝마치고서 다른 혼돈인들을 학살하러 갔을 것이다.
허나 이제는 한계점에 도달해버 렸다.
[얼마나?]
떨리는 주카로의 목소리를 통해
카리안은 그의 폭력성이 당장에라 도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은 시한폭 탄과 같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다행인 것은 카리안은 이런 상황 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당연하지만, 이때를 위하여 주카 로의 구미가 당길 만한 것을 준비 해놓았다.
[또 하나의 혼돈제가 우리와 함께하기로 약속했다.]
[누구지……’?]
[정복의 아리안투.]
그를 혼돈에 잠식시키기 위하여 카리안이 어찌나 바삐 움직여야 했 는가?
가지고 있는 욕망에 잠식시키기 위해선 다소 삐뚤어진 마음을 자극 할 수밖에 없었고, 카리안은 그 어 려운 일을 결국 해냈다.
[그가 바깥 은하들을 정복해내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주카로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피 어난다.
[하늘에 떠 있는 인공 달이 가늘 어지게 되는 시점, 그의 첫 번째
군단을 이끌고 참전하기로 했다.]
[달이 가늘어질 때!]
주카로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허 공에 뜬 인공 달을 향한다.
[수호자가 아무리 강하다고 할지 라도 결국 한계가 존재할 것이다, 군단과 맞서 싸우다 보면 머지않아 지칠 것이다, 주카로 네가 그의 목 을 베어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올 거라는 거지.]
계획은 완벽했다.
여태껏 지켜봐 온 수호자는 저장 할 수 있는 힘에 한계치가 명확했 다.
아리안투의 군단이 이 혼돈의 세 계에 상륙하는 순간 끝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오늘 수호자의 진영 측에 제법 강력한 존재가 합세했다는 소식은 들었겠지?]
지휘관이자 황제로서 군림하고 있는 카리안이 소식을 듣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허나 카리안은 개의치 않는 표정 으로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예상치 못한 변수이긴 하나 변 하는 것은 없다.]
혼돈제, 아리안투가 합류를 선언
했다.
심지어 가장 강력하다는 첫 번째 군단을 보내준다.
강자가 한 명 늘었다고 해서 변 하는 것은 없었다.
[새로이 나타난 강자는 내가 맡 으마, 지친 수호자는 주카로 네가 맡아서 처리하는 거지.]
갑작스레 아리안투의 첫 번째 군 단 혹은 혼돈제와 견줄 수 있을 정 도의 엄청난 강자들이 합세하는 것 이 아닌 이상 전쟁의 판도가 변할 것은 없었다.
[그리고 승리를 거머쥔 우리는
곧장 바깥 은하를 파괴하러 가는 거다.]
카리안의 선언에 광기 어린 미소 를 그린 주카로에게서부터 난폭한 회색빛 기운이 뻗어 올라온다.
[우오오그!]
[크우오-!]
그 기운을 감당하지 못한 혼돈왕 들이 몸을 파르르 떨며 비명을 내 질렀지만 주카로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카리안 또한 그런 주카로를 말리 지 않았다.
[본능적인 감정에 충실하고 잠식
될수록 더욱더 혼돈에 가까워지는 법…….]
그 증거로 본래는 고작 1개에 불 과했던 주카로의 혼돈구가 어느덧 다섯을 넘어가고 있었다.
본래 혼돈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 일수록 더욱더 큰 힘을 얻어낼 수 있다.
완벽한 계획과 더불어 나날이 강 대해져가는 군단의 힘에 카리안은 자신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바깥 은하에 위치한 정복왕의 성 역.
그는 서연을 본격적으로 수련을 시키기에 몇 가지 조건을 덧붙였다.
첫째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믿을 수 있는 이를 한 명 더 데려올 것.
이 부분에 대해서 서연은 깊은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리벨리온 연합에 소속된 신격들 은 모두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 고 볼 수 있는 만큼 그중에서 한
명을 꼽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렇기에서연은 단순히 믿을 수 있는 동료가 아닌 한서준, 오빠가 직접 선택을 한 이를 골랐다.
영역을 좁혀내고 나자 남는 것은 단 한 명뿐이었다.
‘ 나라연천.’
이보다 적합한 이는 없었다.
서준, 무결의 주신이 직접 선택 한 사도이자 오랜 시간 변하지 않 는 모습을 보이며 서준이 돌아올 자리를 지키고 있는 충신(忠臣).
정복왕 또한 순순히 수긍하며 나 라연천을 받아들였다.
이후 정복왕은 두 번째 조건으로 수련 과정에서도 절대로 의심을 품 지 않고 따를 것을 요구했다.
갑작스레 자율의지를 빼앗기게 된 것이었지만 서연과 나라연천은 모두 그 의견에 동의했다.
그렇게 해서 수련을 시작하게 된 지도 어언 1년을 넘어서고 있었지만 서연이 하고 있는 수련이라고는 그저 책을 읽는 것뿐이었다.
“……이걸 언제까지?”
서연은 저도 모르게 의문과 불만 이 가득 섞인 반문을 내뱉었지만, 정복왕과의 약속을 떠올리며 황급
히 입을 가렸다.
“시키는 대로 하기 싫으면 포기 하고 돌아가.”
속내를 전혀 알 수 없는 정복왕 의 행동들에 한숨을 내쉰 서연이 다시 책을 읽어가기 시작한다.
“죄송해요, 읽었던 걸 계속해서 다시 읽다 보니까 저도 모르게 마 음이 혼들렸나 봐요.”
심지어 재미있는 책을 읽는 것도 아니었다.
도덕경, 사서오경, 법화경, 반야 경, 아미타경과 같은 따분하고 두 껍기 그지없는 책들을 읽은 지 벌
써 1년을 넘어서고 있다.
물론, 지금의 서연이라면 아무리 두껍고 지겨운 책이라 할지라도 1 시간도 채 되지 않아 다 읽어낼 수 있었다.
허나 신격인 서연의 입장에서도 책의 숫자가 상당하다고 느껴질 정 도로 양이 많았다.
정복왕은 유교와 도교에서부터 불교까지 수백 권에 달하는 경전들을 건네어 왔다.
불행 중 다행히도 신격에 오른 서연의 입장에서는 한 번씩만 읽어 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
었다.
문제는 모든 책을 읽더라도 계속 해서 다시 읽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시간이 없는데.’
반복되는 독서에 아랫입술을 질 끈- 깨물며 인내하고 있는 서연을 보며 정복왕은 고개를 내젓는다.
“무언가에 강제되어서, 쫓기듯이 보지 말고 그대로 받아들여야 해.”
“노력해볼게요.”
“시간이 얼마 안 남았어……. 이 번에는 정말 성공해야 할 거야.”
이어서 등을 돌린 정복왕은 서연
에게서 관심을 끄고 나라연천의 앞 에 섰다.
“……벌써 시작하는 건가요?”
“5분이면 많이 쉰 거야, 이제 남 은 시간이 없다고 했잖아.”
“알겠습니다.”
표정을 딱딱하게 굳힌 정복왕이 손가락을 튕긴다.
회색빛뿐이었던 주변의 풍경이 대리석 바닥이 깔린 수련장 내부로 변했다.
“언제 보아도 신기하군요.”
독서 중이던 서연이 완전히 시야
에서 사라졌다.
단순히 공간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란 말이었다.
실질적인 이동, 아무런 흔적이나 반웅도 없이 공간을 넘어온 것이었다.
대체 얼마나 많은 묘리들이 담겨 있을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격차 다.
자연스레 나라연천의, 전신에 소 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같은 주신이라 할지라도 급이 따르다.’
정복왕의 이능을 보고 나면 다른
주신들이 보이는 힘은 그저 우습지 도 않은 어린아이 재롱 수준처럼 느껴진다.
눈앞에 펼쳐진 그야말로 신의 이 적과 같은 정복왕의 힘을 보고 있 자면, 솔직히 그녀를 주신이라 칭 하는 것도 말이 안 되었다.
그저 칭하는 명칭을 모르기에 주 신이라 부르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 이 들 정도였다.
체감하고 있던 주신들 사이의 극 명한 격이 날이 갈수록 더욱더 선 명하게 느껴진다.
“쓸데없는 소리 주고받을 시간
없어, 재능이 없는 너는 정말 죽자 고 노력해야 하거든.”
표정을 딱딱하게 굳힌 정복왕이 나라연천을 응시한 채로 말한다.
“재능이 없다니, 이런 대접을 받 아 본 건 처음입니다.”
“주신의 반열에 오른 존재들 중 에 자네 정도의 재능을 가지지 못 한 존재는 없어, 심지어 너는 서준 의 도움을 받아서 오른 것이지.”
이어진 정복왕의 말에 나라연천 의 얼굴에 씁쓸함이 어린다.
‘너무 오만하고 있었군.’
나라연천은 스스로의 길을 찾아
서 끊임없는 수련을 해오는 성실함 과 가진 재능, 마지막으로 서준이 남겨주고 간 무결의 힘을 통해 주 신의 반열에 올랐다.
문제는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정복왕에게 수련을 받기 전까지 는 성장에 대한 방향성조차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방금 전 정복왕의 말이 더욱더 심장을 후벼 파는 느낌이었다.
자연스레 자신감도 떨어져간다.
“……솔직히 말하자면 제가 성공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딱 하나만 제대로 가르 쳐주고 있는 거잖아.”
“하지만 그 하나조차 제대로 해 내지 못하고 있지요.”
정확하게 말하고 있지 않지만 근 래 들어 정복왕은 시간이 얼마 남 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촉박한 시간, 부족한 재능들은 벽에 가로막혀 있는 나라연천을 압 박해오기에 충분했다.
“스스로를 믿으라는 말은 하지 않겠어, 그냥 나를 믿어.”
흔들리지 않는 정복왕의 표정을 보며 너털웃음을 터트린 나라연천
은 빠르게 잡념을 지워낸다.
“시작하겠습니다.”
한차례 고개를 주억인 나라연천 이 팔을 앞으로 내뻗는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부터 일어난 푸른빛 기운은 마치 실처럼 얇게 만들어져 허공으로 뻗어나가기 시 작한다.
‘여기까지는 어렵지 않다.’
괜히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수련 을 해온 것이 아니었다.
문제는 다음 과정이었다.
“잘하고 있어, 이제 그 실에 내
가 가진 무결의 힘을 모조리 담아 내면 되는 거야.”
무결의 힘은 서준에게 하사받은 궁극의 힘이다.
말 그대로 흠이 없는 기운이며, 그렇기 때문에 강력하고 웅장했다.
이런 실 가닥에 모든 힘을 담아 내는 것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사실 불가능한 일이라고 외쳤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수련의 시작 날, 정복왕 이 직접 눈으로 보여주었단 점을 생각하면 차마 입을 열 수가 없었
다.
침묵을 지킨 나라연천은 손가락 의 끝에 일어난 실 가닥에 의식을 집중한다.
우선 무결의 힘은 완벽해야만 한 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게 바로 나라연천이 생각하는 무결의 힘이기 때문이다.
본래 일으킨 기운은 무수히 많은 상상과 의지로 인해 펼쳐지는 것이 다.
하지만 도저히 손가락에서 일어 난 실 가락이 완벽한 힘을 품었다 는 것이 상상이 되지 않았다.
결국, 황금빛으로 물들어가던 실 가락이 삽시간에 광채를 잃어간다.
“……죄송합니다.”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 있는 나라연천을 보며 차가운 표정의 정 복왕이 냉정하게 말한다.
“미안해할 거 없어, 너는 반드시 해낼 수 있을 거니까.”
천천히 고개를 주억인 나라연천 이 다시금 의식을 집중했다.
‘그래, 할 수 있어.’
눈앞의 정복왕이 단언한 만큼 불 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너는 이미 무결의 힘을 받아들 이고 다뤄내고 있어, 방금 전처럼 집중한 채로, 조금 더 생각을 돌려 서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곧 도달할 수 있을 거야, 아니 도달해야 할 거야.”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정복왕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너도 네가 모시고 있는 신, 서준을 허무하게 잃고 싶지는 않잖 아‘?”
“반드시 성공해내겠습니다.”
나라연천의 선언에 씩 웃은 정복 왕이 눈앞에서 사라진다.
홀로 남게 된 세상, 그 속에서 의식을 집중한 나라연천은 끊임없 는 수련을 시작했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