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권 18화
393화
“나쁜 건 너나 내가 아니야. 우 리는 이미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기 위한 방법을 알고 있잖아?”
“모두 부수고, 새로 만드는 게 좋겠군.”
“정답이야.”
씩 웃은 서준의 몸 안으로 눈앞 의 똑 닮은 분신이 깃들며 사라진
홀로 남게 된 서준의 마음속에
는, 그 순간 더욱 큰 혼란이 가득 찼다.
어차피 아무 의미 없는 세상이 다.
이 상태로 부숴버리고 새로 만드 는 쪽이 분명히 좋을 듯하다.
그 순간, 마치 재촉이라도 하듯 이 몸에 힘이 넘쳐흐르기 시작한다.
전 우주에서 손에 꼽힐 것이라 말할 수 있는 수준, 여태껏 한 번 도 느껴본 적 없었던 막대한 양의 혼돈이 차오른다.
-모두 부수자, 아무런 의미도 없 는 세상. 우리가 새로이 만들어 내
는 거야.
뇌리에 울려 퍼지는 마음의 소리 에 고개를 푹 숙인 서준의 입가로 기이한 웃음이 떠오른다.
괴로움으로 일그러진 얼굴, 방금 전 눈앞에서 싸늘한 주검이 된 가 족들을 떠올린 서준은 다시 한번 눈물을 흘리며 손을 높게 들었다.
그 손바닥에 뭉친 회색빛 기운이 요동치며 포악함을 자랑한다.
혼란스러웠던 마음을 잠재우기 시작한 것은 세상에 대한 분노와 증오.
-우리가 잘못된 게 아니야, 세상 이 잘못된 거지.
고개를 주억인 서준의 손에 혼돈 의 힘이 모여든다.
-부수고 새로 만드는 거야, 바라 던 형태로.
“맞아.”
긍정을 표하는 서준의 손에서 발 출된 혼돈의 힘이 스스로의 심장을 파고든다.
푹-!
뜨거운 감촉과 함께 손끝에 느껴 지는 끔찍한 감촉에서준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무슨 짓을……! 진정해. 한서준. 이건 옳은 선택이 아니다.
“나쁜 건 너지, 어떻게 세상이겠 어.”
이어서 서준의 손은 천천히 심장 한편에 자리 잡은 회색빛 기운을 끄집어내기 시작한다.
-나는 네가 바라는 대로 하게 해 줬을 뿐이다, 스스로를 원망하겠다 는 말이냐?!
조금씩 떨어져 나오는 회색빛 기 운이 던진 질문에 눈물을 쏟아내고 있는 서준의 화답이 돌아온다.
“개소리하지 마, 내가 바라는 게 가족들의 죽음일 리가 없잖아.”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진짜 네가 바라는 대로 행동하 는 거라면 날뛰지 말고 내 말에 복 종하기나 해.”
차가운 선언과 함께 심장에서부 터 뽑아낸 회색빛 기운을 손에 꽈 악- 말아 잡은 서준이 말한다.
“안 그러면 너부터 부숴버릴 거 니까.”
차가운 선언을 내리는 순간.
쨍그랑-!
유리 파편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서준이 서 있던 꿈속 세계가 무너 져 내리기 시작했다.
거대한 회색빛 기운이 서준의 몸 주변에 회오리치듯 몰아치는가 싶 더니,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이 빠 져나가며 자취를 감춘다.
처음 내공을 비우고 혼돈기를 채
웠을 때와 같았다.
‘이제 남은 건 공허의 힘뿐이네.’
내공처럼 체내에 머물며 호홉을 타고 되돌아와야 할 혼돈기가 외부 에 머문 채 주변을 감싸고만 있었다.
덕분에 몸 전체에 강대한 기운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무언가 허탈한 느낌은 아니었다.
‘오히려 더 꽉 차있는 듯한 느낌 이야……
세상 전체에 흐르고 있는 혼돈기 가 서준의 전신을 감싸 안은 채 언 제든지 반응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상당히 익숙한 감각이다.
이미 무공으로 이와 비슷한 감각 을 느낀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신격.’
처음 서준이 혼돈의 시련장에 입 장할 때 혼돈기를 조율해냈다면, 이제는 그를 지배하고 다뤄낼 수 있게 되었다.
또 하나의 벽을 넘은 것이다.
벅찬 감정을 느끼며 눈을 번쩍 뜬 서준의 시선에 여전히 평온한 표정으로 두 눈을 감고 있던 크라 후가 눈꺼풀을 들어올린다.
- 어때?
“……최악의 꿈이었어.”
-그게 바로 혼돈이지.
“혼돈인들이 공격적인 이유가 이 제야 납득이 가네.”
본인, 혼돈을 제외한 세상 모든 것을 파괴해내야 한다는 본능만이 존재한다.
혼돈인들 대다수가 이러한 감정 을 느끼고 있을 것인 만큼 바깥 은 하의 존재를 만나자마자 분노와 증 오를 표출하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라 볼 수 있었다.
“만약 내가 혼돈에 사로잡혀 휘 둘렸다면……
-아마 우리와 비슷한 형태가 되 겠지.
말을 끝맺은 크라후가 자신의 촉 수를 들어 올리며 꿈틀거리는 모습 을 보여준다.
“혼돈인이 되었다는 건가?”
-주체하지 못한 혼돈을 품으려면 대가를 치룰 생각도 했던 거 아니 었나.
“정말 끔찍한 상황이었겠네.”
-우리가 끔찍해 보이나 보네?
씁쓸한 미소가 어린 크라후의 질 문에서준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하지만 혼돈인이 된 난 끔찍했을 거야.”
아마도 그 상태로 혼돈에 잡아먹 혔다면 꿈속의 기억에 사로잡혀 끝 없는 증오와 분노를 발산하는 끔찍 한 악의 결집체가 되었을 것이다.
정말 이 세상을 모두 부숴낼 수 있는, 종말을 불러 낼 마신의 모습 이었을 것이다.
서준의 속내를 훤히 꿰뚫어 보는 듯, 크라후가 묘한 미소를 짓는다.
-우선 모든 시련을 통과해낸 것
축하해.
“고마워.”
-원하던 것은 얻어냈어?
짧은 시간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 어 냈다고 말할 수 있었다.
허나 만족을 하냐고 묻는다면 쉽 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크라후 주변에 머무는 혼돈기 가……
둥글게 응축되어 구의 형태를 취 하고 있었다.
비록 크기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어지간한 행성보다 더 많은 기운을
품고 있는 구체들이 크라후의 주변 을 회전하고 있었다.
시련을 이겨내고, 혼돈을 원하는 대로 지배할 수 있게 된 덕분일까. 크라후의 힘을 두 눈으로 볼 수 있 게 되었다는 걸 서준은 어렵지 않 게 깨달았다.
‘크라후의 주변의 구체의 숫자는 총 열 개.’
동시에서준은 자신의 주변을 빠 르게 훑어보았다.
‘고작 셋인가……
자연스레 얼굴 위로 실망스러운 감정이 피어난다.
대기 중의 혼돈기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다고는 하나 자연기와는 엄연히 다른 특성이 존재했다.
‘혼돈의 세계를 벗어나게 되면, 외부로부터 끌어올 수 없어.’
즉, 지금 서준의 주변을 감돌고 있는 이 작은 공허구들은 하나하나 가 단전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는 말이다.
이런 구체의 숫자가 적다는 것은 기운 자체가 부족하단 뜻이니 아쉬 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실망할 거 없어, 나는 처음 시 련을 극복했을 때 고작 일구(一具)
밖에 되지 않았어, 이제 갓 벽을 부순 자네는 삼구나 되면서 그런 표정을 지으면 내가 뭐가 되겠어?
크라후는 서준의 그 아쉬운 감정 을 눈치채고는 너털웃음을 토하며 말한다.
“내가 힘이 워낙 많이 필요해서 요.”
-이미 알고 있겠지만, 단순히 힘 만으로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
씁쓸한 미소를 짓고 있던 크라후 가 다시 두 눈을 감은 채로 명상에 빠져든다.
서준은 그 모습을 기묘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자주 명상에 잠기네?”
부동의 자세, 입술을 달싹이지 않고 있었지만 뇌리에 직접 의사를 전달하는 만큼 대화에는 문제가 없 었다.
-차오르는 혼돈을 억누르기 위해 서야, 지배해냈다고는 하나 힘을 다루는 이상 자유로울 수는 없는 법이니까.
서준은 크라후의 말이 무슨 뜻인 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나도 끝없는 싸움을 해야 한다
는 거네……
시련을 통과함으로써 지배해냈지 만 혼돈을 다루는 이상 그 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으니 말이다.
‘심마(心魔)나 다름없는 혼돈을 이겨내는 것.’
쉽지 않은 일이다.
허나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이미 해봤던 일이야.’
마인들이 말하는 탈마(脫魔)의 경지와 같았다.
실제로도 서준 또한 오래토록 스 스로의 정신을 단련해 온 무인이
아니었다면, 꿈속의 심마에 사로잡 혀 크게 흔들렸을지도 몰랐다.
‘내 스스로의 존재와 가치를 의 심하지 않는 강렬한 의지.’
그 힘이 서준을 혼돈에 폭주하지 않게 해주었다.
오히려 혼돈을 지배하게끔 이끌 었다.
서준이 스스로가 이룩한 경지를 확연히 이해하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크라후가 말을 건네 왔다.
-표정을 보아하니 전부 이해가 된 것 같네, 축하해. 이제 엄연한 혼돈제에 들어선 거야.
“혼돈제요?”
이는 시련장 바깥에서 날뛰고 있 는 파멸자들의 수장을 부르는 호칭 이었다.
서준의 의문을 느꼈는지 크라후 의 설명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혼돈제라는 건 원래 음……. 굳 이 따지자면 너랑 나처럼 혼돈을 지배해낸 자들을 일컫는 자들을 부 르는 호칭이야, 바깥에 있는 동생, 음. 네가 살던 세계의 말로 치자면 사제(師弟) 녀석이 제멋대로 혼자 만의 이름인 양 편하게 쓰고 있지 만 말이야.
“그러니까, 따지자면 혼돈제란 누군가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의 경지를 뜻하는 거였네?”
-맞아, 우리는 조금 더 편하게 스승님이란 단어로도 부르지.
문득 서준은 시련의 탑을 오르는 동안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스승, 크라후.”
-날 부르는 호칭이지.
혼돈의 억압을 거부하고, 지배해 낸 초월적 존재.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서준은 두 가지 의문을 동시에 느낄 수밖
에 없었다.
“잠깐만. 그렇다면 바깥에 있는 혼돈제라는 놈도 혼돈이 내뿜는 부 정적인 감정을 밀어냈다는 거 아니 야?”
그런데 어째서 파멸자들의 수장 이 되어 난리를 피우고 있단 말인 가?
이해가 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말했다시피, 혼돈을 완전히 지 배하는 것은 불가능해, 바깥에 있 는 사제 녀석 또한 마찬가지지.
한번 지배해냈었다고 혼돈을 상
대로 방심을 했고, 역으로 제압당 했다.
“맙소사……
아무리 강한 존재가 될지라도 혼 돈과의 싸움을 끝맺을 수는 없었다.
당연한 것이다.
애초에 감정이라는 것 자체가 어 느 방향으로 륄지 알 수 없는 법이 지 않은가?
이 부분은 서준이 이해하고 있던 탈마와는 다른 점이 있었다.
-납득하기 어렵지만 혼돈이란 그 런 것이지, 애초에 혼돈을 지배해 냈다고 해도 사고를 가지고 있다면
이미 마음속에 많은 감정이 가득 차있는 상태이니, 그렇기에 조금이 라도 방심하는 순간 혼돈에 휘둘릴 수밖에 없게 되는 거지.
그것이 혼돈을 품은 이들의 업보 이다.
꿈속에서 보았던 괴물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에
서준의 마음 한편에는 저도 모르 게 두려움이 피어나기 시작한다.
-너무 걱정하지 마, 오만을 보이 지 않고 계속해서 의식하고 억제한 다면 충분히 지배해낼 수 있을 거 니까.
“조언 고마워.”
-먼저 스승이 된 자로서 겪은 것 들에 대한 조언을 해줄 뿐이야.
미소를 띤 서준의 시선이 문득 명상에 잠겨있는 크라후를 향한다.
‘괜한 걱정이었어.’
일어나지 않은 일을 걱정할 필요 는 없었다.
게다가 파멸자의 수장이 된 녀석 도 존재했지만, 스스로를 억누르며 존재하고 있는 크라후 또한 존재했 다.
-한서준, 너라면 충분히 혼돈을
억제할 수 있을 거야.
스스로를 믿는다.
이번 혼돈을 제압할 때처럼 말이 다.
아니, 서준은 고작 이 정도로 만 족할 생각은 없었다.
“언젠가는……. 이 혼돈을 완벽 히 지배해낼 수 있겠지?”
서준의 시선이 크라후를 응시한 다.
-맞아, 이 시련의 탑들을 세운 창시자이자 위대한 스승께서도 혼 돈을 지배해내셨다는 전설이 있으 니 말이야.
서준의 얼굴에 차오르는 자신감 을 본 크라후가 다시 한번 입을 열 었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