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권 17화
392화
혼돈의 세계, 시련의 탑 10층.
회색빛 기운이 넘실거리고 있는 탑 정상의 문이 열리며 혼돈인이 아닌, 바깥 은하의 존재가 발을 들 이밀 었다.
6층을 오랜 시간에 걸려 돌파한 이후 남은 7, 8, 9층을 일주일도 걸리지 않아 통과해 낸 서준이 마 침내 탑의 정상에 도달한 것이다.
서준의 등장에 홀로 회색빛뿐인
세상에 주저앉아 두 눈을 감고 있 던 혼돈인의 가는 눈이 천천히 뜨 였다.
_왔네…….
“크라후.”
탑의 입구에서 마주했었던 만큼 서준은 혼돈인의 이름을 자연스레 부른다.
-예상했던 것보다 빠르네.
주저앉아 있던 몸을 천천히 일으 킨 크라후는 서준을 바라보며 말한 다.
-마지막 시련을 받을 준비는 되 었겠지?
“당연하지.”
서준이 자신 있게 고개를 주억였 지만, 크라후는 다시 처음과 같은 자세로 주저앉으며 두 눈을 감는다.
“크라후, 뭐 하는 거야?”
다급히 그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 섰지만, 몸을 움직임 생각은 추호 도 없어 보였다.
마음을 다잡고 있던 서준의 입장 에서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뭐 이런……
드디어 마지막 시련.
뭔가 특별한 것이 있을지도 모른
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고 정상 에 도달한서준의 입장에서는 다소 힘이 빠지는 상황이었다.
‘어떻게 하지?’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혼돈의 세계에 어울리지 않을 정 도의 평온한 분위기 때문일까?
아니면 고요하게 눈을 감고 있는 크라후의 모습 때문일지도 모른다.
묘한 편안함을 느낀 서준은 벽에 등을 기대며 자리에 주저앉는다.
‘마지막 시련이 시작되기 전에 휴식을 취해둬서 나쁠 거 없지.’
신격이 되돌아와 육체적 피로는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고는 하나 지 친 정신에는 어느 정도 회복이 필 요했다.
실제로도 서준은 생각해 보면 탑 에 들어선 이후로 하루도 휴식을 취한 적이 없었다.
시련과 성장,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머릿속에 가득했으니 당연 한 것이다.
그렇게 서준은 두 눈을 감고 잠 에 빠져들었다.
꿈이라는 것이 말도 안 될 정도 로 기억이 선명할 때가 있었다.
이런 상태가 지속된다면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모든 것이 꿈이라는 사실 자체를 인지할 수 있게 된다.
지금 서준의 상태가 딱 그러했 다.
“또 덤비려고?”
“죽여주마!”
잠이 든 직후, 계속 싸움을 이어
왔다.
처음 중원 대륙에 시작했던 싸움 부터 천마에 이르러 최강이자 최악 의 마선이라 불리던 시절까지.
종국에는 지구로 되돌아와 마주 했던 수많은 빌런과 이종족, 천사 와 악마들이 계속해서 적으로 달려 온다.
아득한 힘의 격차가 있는 만큼 가벼운 손짓과 발짓으로 달려드는 적들을 처치해 내는 서준은 강한 불쾌감을 느꼈다.
‘본래 조금 쉬려고 잠을 잔 건 데……
적을 쓰러뜨리면 곧장 새로운 적 이 나타난다.
끝이 없는 싸움인 만큼 휴식은 존재치 않는다.
‘크라후 녀석의 시련이 바로 이 건가?’
쏟아지는 부정적인 감정들과 누 적되는 피로에서준의 미간이 서서 히 찌푸려져 간다.
‘짜증 나네.’
쉽고 어렵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당연하지만, 이게 시련의 끝일 리가 없었다.
일종의 몸풀기와도 같은 것일 거 다.
제대로 된 시련이 주어지기도 전 에 이런 싸움에 정신력을 허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빠르게 정리해낸다.’
은하에서 주신이라 칭송받고 혼 돈의 세계에서도 수준급의 강자의 반열에 오른 서준이 기운을 이끌어 낸다.
표정을 굳힌 서준의 손에서 혼돈 의 응집체가 생성된다.
쏟아지던 적들이 일제히 사라지 고, 꿈에서 깨어나게 될 것이다.
이런 확신의 생각을 하며 혼돈의 웅집체를 쏘아 냈다.
허나 폭발이 가신 후 보이는 황 폐한 풍경에서준은 헛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꿈이 조금 기네. 누군가 장난을 치고 있는 것 같은데.”
피식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고 있 는 서준의 시선 속에 익숙한 모습 을 한 실루엣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뭐 하자는 거지?”
불쾌감에서준의 인상이 일그러 진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번에 눈앞에 나타난 형상들은 서준 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것이기 때문 이었다.
중원 대륙에서 시작된 인연이자 충직한 수하였던 천마신교의 교원 과 무명신의와 강석호 협회장을 비 롯한 지구와 동료가 된 신격들에 더불어 마지막으로 가족들의 얼굴 들도 보인다.
‘대체 무슨 일을 해야 할까?’
사실 지금까지 보였던 행동을 생 각한다면 답은 명확했다.
‘눈앞의 이들을 죽이는 것.’
허나 너무나도 생생한 꿈은 거부 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섣부르게 행동하지 말자.’
애초에 정확한 시련의 내용도 알 수 없었다.
가슴 한편에 차오르는 부정적인 감정을 밀어내며 마음을 달래본다.
‘정답이 있는 시련이 아닐 수도 있으니.’
일단은 이 눈앞의 실루엣을 확실 하게 제압을 해 놓는다.
그리 생각하며 하늘로 떠올라 혼 돈의 힘을 일으킨 서준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뭔가……. 이상해.’
혼돈이 끝없이 차오르는 느낌이 든다.
평소와 같은 방식으로 이끌어 내 고 있는데 마치 끈적한 늪이 온몸 을 잠식해가는 듯했다.
‘멈춰야 해.’
서준의 눈가 사이가 깊게 파였 다.
본능적인 생각을 한서준이 치솟 으려는 기운을 억눌러 낸다.
허나 몸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
는다.
의지를 벗어나 고개를 돌린 서준 의 시선이 바닥으로 향한다.
평소라면 반갑고 그리웠을 얼굴 이었는데 순간 부정적인 감정이 차 오른다.
서준의 두 눈동자는 적을 마주할 때와 같이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점점, 이 세계가 꿈이란 것도 잊 게 된다.
그 순간, 서준의 신형이 지상으로 낙하한다.
거리가 빠르게 좁혀지며 어느덧 손아귀가 붉게 물들어 간다.
‘안 돼......
몸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고 있 었지만 감각은 이전의 싸움과 같았다.
아니, 어쩌면 여태껏 자신의 의 지라 생각했던 행동들이 본인의 것 이 아니었을 수도 있었다.
좋지 않은 예감이 가슴 속에서 불쾌하게 기어오른다.
‘멈춰, 멈추라고!’
실이 풀린 인형처럼 쓰러져 나가 는 사람들의 모습과 코끝을 파고드 는 비릿한 내음에 다급히 외쳐본다.
허나 애석하게도 몸은 재빠른 동 작으로 믿음과 신뢰를 주었던 신하 들과 동료를 베어나간다.
하나둘, 그리고 수십의 사람들이 찢어발겨지는 모습에서준의 눈에 차오른 포악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붉게 물든 황야 위, 그토록 보고 싶었던 얼굴들이 보인다.
그리웠던 온기는 남아 있지 않았다.
부모님과 동생.
서준의 전부와 다름없는 가족이 다.
‘제발 그만해.’
엄청난 충격과 혼란에서준이 다 급히 고개를 내저어 낸다.
“진정하자, 이건 꿈이야……. 꿈.”
그래, 꿈이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세계다.
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꿈이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가로 눈물 이 흘러내린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슬픔과 분노 는 혈관을 자극하며 전신에 전류가
흐르는 듯한 감각을 일깨워 낸다.
터벅-.
그 날카로운 감각에 기묘한 소리 가 걸려들었다.
서준은 재빨리 고개를 돌리자, 깊게 후드를 눌러쓴 남자를 마주할 수 있었다.
얼굴 전체를 뒤덮고 있는 후드 때문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이빨이 훤히 보이는 긴 미소가 눈 에 띈다.
이어서 다가온 남자가 천천히 입 을 연다.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거
지.”
서준은 바보가 아니었다.
눈앞에 펼쳐진 현실과 같은 꿈의 세계를 만들어내고 육신을 제어한 것은 누군가의 개입이 있었다.
그리고 그 대상은 눈앞에 후드를 쓴 남자일 것이다.
“이딴 장난질을 하는 게 시련이 야?”
“그럴 리가 없잖아, 네가, 정확히 말하자면 너의 본능이 선택한 거지, 실제로도 가장 추구하는 방식이잖 아.”
“닥쳐!”
분노에 찬 서준은 남자를 거칠게 밀어내고 소리친다.
폭발하듯이 터진 분노에서준은 본능적으로 혼돈의 기운을 폭발시 킨다.
콰과광-!
요란한 굉음과 함께 시야 속 평 야가 자취를 감춘다.
이 세계는 꿈속이며, 어차피 깨 어나면 사라질 허상이란 사실 따위 는 서준의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 졌다.
이런 장난질을 벌인 눈앞의 존재 를 용서할 수 없다는 분노.
그 지독한 감정을 가슴과 뇌리에 가득 채운 서준은 후드를 눌러쓴 남자를 향해 주먹을 내지른다.
후웅-!
손끝에 걸리는 감각이 없었지만 상관없다.
공격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눈앞의 남자에게 그간 쌓아온 힘, 가진 모든 것을 퍼부어 낼 것이다.
서준의 감각은 그 어느 때 보다 도 날카롭게 벼려졌으며, 예리한 움직임은 마치 먹이를 노리는 뱀과 같았다.
손에 꼽히는 강자가 된 덕분일 까?
생각보다 도망치는 남자를 빠르 게 쫓을수 있었다.
서준은 너무나도 증오스러운 그 모습을 보며 응집시킨 혼돈의 기운 을 쏘아 낸다.
쿠구궁-!
세계가 뒤혼들리는 소리와 함께 쏘아진 혼돈의 기운이 다급히 거리 를 벌리고 있던 상대의 등 뒤를 가 격한다.
“커헙-!”
짧은 신음과 함께 지상으로 추락 하는 사내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서준은 곧장 땅을 박차고 이동하 며, 바닥에 엎어져 피를 흘리며 고 통스러워하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 았다.
“누구냐?”
얼음장보다 차가운 음성을 흘린 서준이 상대를 뒤집는다.
새하얀 눈과, 붉은 입술.
하지만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 는다.
깊게 눌러 쓴 후드 때문이 아니 었다.
이 꿈속 세계가 남자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허나 지금 서준에게 중요한 것은 상대가 누군지가 아니었다.
“왜!? 어째서 왜……!?”
내 가족들을 죽인 거지?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난폭한 행동을 보이게 한 것인가?
분노에 대한 화답은 간단했다.
“ 흐흐.
조소, 아무런 의미도 배여 있지
않은, 즐거움만이 느껴지는 그 저 열한 웃음이 내부의 분노를 폭발시 킨다.
서준의 무릎은 상대의 복부를 가 격하고, 양 주먹은 마구잡이로 상 대의 얼굴을 난타한다.
눈동자 위로 축축한 피눈물이 쏟 아진다.
“대체...... 왜!?”
그리하여 상대의 숨이 끊어졌음 을 느끼는 순간, 서준이 할 수 있 는 거라고는 허탈하게 주저앉아 헛 웃음을 흘리는 것밖에 없었다.
가족도 사라지고, 복수도 끝을
맺었다.
하지만 바뀐 것은 무엇 하나 없 었다.
가슴과 뇌리에 남은 것은 휘몰아 치는 혼란뿐이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 못 된 걸까?
어째서 이런 받아들일 수 없는 꿈 아니, 현실을 마주해야 되는 것 인가?
이어지는 혼란 속, 목이 꺾여 죽 은 줄로만 알았던 사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서준을 바라본다.
이어서 천천히 후드를 걷어 젖히
며, 얼굴을 드러낸 후에 목소리를 흘린다.
“한서준.”
꿈이라고 해도 이해할 수 없고 기괴한 광경이었지만, 이 순간 서준은 그런 사태에 대한 의문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저 허망하고, 떨리는 눈으로 시선 속 남자를 직시하는 것이 서준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 너는......
“ 맞아.”
환히 웃었던 범인, 악마와 같았 던 그는 자신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복수란 게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지?”
“그 입 찢어버리기 전에, 닥쳐.”
다시금 분노를 폭발시키기 시작 한서준을 향해, 또 다른 그가 말 한다.
“진정해. 나 자신. 너도 이미 알 고 있잖아? 이건 꿈이야. 쉽게 말 하자면 가장 너답고 본능적인 무의 식의 세계라고.”
이를 아득 가는 서준의 눈매가 사납게 치솟는다.
“그러니까 내가 너를 조종한 게 아니야, 그저 내가 마음 깊게 바라 왔던 방법이지, 마냥 부정적으로만 보지 말고 대답해 봐, 여태껏 내가 추구해온 평화에는 이런 패도가 동 반됐잖아. 안 그래?”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본능대로 행동하자는 거야, 부 숴버리자고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고 더 큰 힘을 거머쥐고 원하 는 세상을 만들어 내는 거야.”
비릿한 눈웃음을 짓는 상대가 천 천히 서준에게로 다가와 어깨에 손 을 올리며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