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권 16화
391 화
다시 한번 그 사람을 보고 싶다 는 일념 하나에 살아남았다.
도울 것이다.
정복왕은 이미 마음속으로 어느 정도 결론을 내린 채였다.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어.”
“뭐죠?”
“수련의 과정에 대한 의심을 품 지 않을 것.”
“그게 끝인가요?”
생각지도 못했을 정도로 너무나 도 허무맹랑한 조건에서연의 갸우 뚱 젖혀진다.
“마지막으로 이번 일이 끝난 이 후, 사도로서의 계약을 해지하며 우리 사이엔 어떤 인연도 가르침도 남지 않아야 해.”
“……은혜를 잊으라고 하시는 건 가요?”
“추억과 감정까지 모두.”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말이었지만 정복왕의 눈동자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절대로 방법을 가르쳐 주지 않을 것이다.
가족을 구하러 가지 못한다는 말 이다.
선택을 내려야 한다.
정복왕의 굳은 표정을 바라보던 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쉽지 않겠지만 잊기 위해 노력 할게요.”
“그 정도면 충분해.”
피식 웃은 정복왕이 한 손에 회 색빛 기운, 공허의 힘을 띄워 올리
며 허공에 빙글빙글 돌리며 말한다.
“네 경지를 한 단계 더 상승시켜 줄게.”
주신의 경지에 오른 경지를 상승 시켜 준다?
다른 이라면 믿을 수 없겠지만 두 눈으로 보았던 정복왕의 능력들 이 있기에 믿을 수 있었다.
서연은 곧장 정복왕을 향해 머리 를 조아렸다.
“부탁드립니다!”
* *
사실 서연은 다소 당황스러운 감 정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혼돈의 세계에는 대체 얼마나 강한 이들이 있길래?’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더니 정복왕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주신 급에 오른 영주들은 지천 으로 널리고 널렸어.”
“……혼돈의 세계가 그토록 위험
한 세상인가요?”
“위험하지. 특히 지금의 너처럼 약자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을 정도 로.”
약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 어 강자로서 칭송받아 온 서연이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었던 말이 다.
자연스레 서연의 표정이 살짝 굳 어진다.
“자존심이라도 상하나 봐?”
“……솔직히, 그리 기분이 좋지 는 않네요.”
“확실히 수련을 시작하기 전에
스스로의 수준을 정확하게 알고 있 는 게 좋겠네.”
고개를 주억인 정복왕이 공간을 찢자 회색빛 공간 내부에서 익숙한 실루엣의 노신사가 걸어나온다.
서양의 중세 시대에서나 볼 수 있었던 깔끔한 검은 정장의 차림을 한 남자의 정체는 아벨이었다.
다만 푸근했던 평소의 모습과 달 리 지금은 절제된 날카로움을 보이 고 있었다.
그런 그가, 포털을 건너와서는 정복왕을 향해 고개를 조아린다.
“위대하신 정복왕님을 뵙습니다.”
“아벨, 부탁할 일이 한 가지 있 어서 불렀어.”
“무엇이든 명을 내리셔도 됩니 다.”
“눈앞에 있는 사도, 한서연 보이 지?”
정복왕의 말에 고개를 돌린 아벨 의 시선이 서연을 훑는다.
“ 예.”
“사도에게 너의 실력을 보여줬으 면 해.”
그 말에 조금 서연을 응시하고 있던 아벨이 조심스레 물음을 던진
다.
“어느 정도로 상대해야 하면 되 겠습니까?”
“전력으로.”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습니 다.”
“뭐라고요?”
대화를 듣고 있던 서연이 어이가 없다는 듯 되묻는다.
눈앞의 아벨이 강한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간 보고 느껴왔던 격 은 결코 주신의 수준에 이르지 못 했었다.
그런데 주신의 자리에 오른 서연 을 보며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을 하 고 있었다.
자연스레 서연이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기세를 끌어올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벨의 얼굴 에는 조금의 당황도 보이지 않았다.
“경고할게, 여태껏 지켜봐 온 거 로 아벨을 평가하지 마, 모든 제약 이 풀린 아벨은 과거에 꿈의 세계 에서도 마왕이라고 불렸던 존재니 까.”
꿈의 세계?
이해할 수 없는 말에서연의 고
개가 7우뚱- 젖혀진다.
“창조와 파멸로 인한 은하와 행 성들의 탄생, 허나 모든 것이 우주 의 지배하에 있지는 않아, 때론 변 질적인 세계 또한 존재하는 법이야, 그리고 아벨이 있던 꿈의 세계와 네가 지금 가려고 하는 혼돈의 세 계가 그런 곳이지, 쉽게 말하자면 비슷한 역량과 특이성을 가진 세계 라는 거야.”
“그러니까 아벨 님 정도는 견줄 정도는 되어야 혼돈의 세계에서 개 죽음을 당하지 않는다는 말이네 요?”
담담히 고개를 끄덕인 정복왕이
다시 아벨을 바라본다.
“어느 정도 이해를 한 것 같으 니, 이제 대련을 시작하도록 하지.”
“정복왕님께서 저의 제약을 모두 풀어주신 것은 정말 오랜만이군요. 절대로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아벨의 기세가 눈 에 뜨이게 변했다.
마치 잘 벼려진 칼과 같던 기운 이 순식간에 폭주하듯 주변을 거칠 게 뒤덮는다.
먼저 얼굴이 굳히며 방어 자세를 취한 측은 서연이었다.
단지 은연중에 흘러나오는 기운
일 뿐인데, 그 사이로 온몸을 난자 할 듯한 날카로운 예기가 느껴진다.
실제로도 펼쳐놓은 방어막을 아 벨의 기운이 거칠게 찢고 지나가고 있었다.
‘이건 대체 무슨……
어이없는 상황에서연이 헛웃음 을 흘릴 때였다.
“감이 좋군.”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와 함께 서늘한 감각이 느껴진다.
‘죽는다.’
저도 모르게 느낀 본능에서연의
주변으로 회색빛 촉수가 솟아오르 며 등 뒤를 감싼다.
쾅-!
폭음이 울려 퍼진 순간, 분명히 성역 내부였던 주변의 풍경이 황무 지로 뒤바뀌며 서연의 신형이 허공 을 빠른 속도로 가로질러 높이 솟 은 돌산에 처박힌다.
콰과광-!
돌산이 무너지며 자욱한 먼지구 름이 일어났다.
“크읍......
다급히 발산해 낸 공허의 힘으로 치명적인 부상을 면한 서연이 제
자리에 누운 채 짧은 신음을 흘렸 다.
머리 위, 허공에는 기다란 장검 을 손에 든 채 여유로운 표정을 짓 고 있는 아벨이 보인다.
‘엄청 얕잡아 보이고 있네.’
그런 아벨을 보며 눈을 가늘게 뜬 서연은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 을 시작한다.
고작 일격을 받아낸 것이었지만, 격차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정면 승부는 필패야.’
정복왕이 말했던 그대로다.
알고 있었던 아벨이 아니었다.
지금 눈앞의 검사는 위대하다고 칭송받는 주신과 고대의 존재들을 뛰어넘을 정도의 힘을 가진 괴물이 었다.
실제로도 공허의 힘을 둘러막았 음에도 불구하고 전신에 적지 않은 충격이 전해지고 있지 않은가?
‘다소 방심하고 있었다지만……
아벨 또한 첫 공격인지라 여유를 두었을 것인 만큼 딱히 긍정적인 상황이라 볼 수 없었다.
‘그래도 저런 시선은 도저히 받 아들이기가 힘드네.’
입가로 쓴웃음을 짓고 있는 서연 을 보며 여유로운 표정으로 자세를 다 잡아낸 아벨이 말한다.
“그간 인사를 나눴던 정을 생각 해서 다시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주 도록 하지.”
“……주신에 오르신 것도 아니신 데, 대체 어떻게 이렇게까지 강하 실 수 있는 거죠?”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해 준 것은 아벨이 아니었다.
첫 격돌의 순간 가볍게 손가락을 튕겨 주변의 공간을 완전히 뒤바꾼 정복왕이 입을 열었다.
“말했잖아, 우주가 정한 규격대 로만 모든 것이 흘러가지는 않는다 고…… 너도 알고 있잖아 이레귤러 라고.”
“……이해하기 힘드네요.”
“우주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너 나, 서준이나 그리고 지금 앞에 있 는 아벨까지 모두 이해하기 힘든 존재일 뿐이야, 본래 주신의 자리 란 것이 그리 쉽게 오를 수 있는 게 아니거든.”
“정복왕님께서도 오랜 세월을 필 요로 하셨나요?”
문득 떠오른 서연의 질문에 정복
왕이 턱에 손을 괸 채로 생각에 잠 긴다.
이어서 입가에 피식- 미소가 피 어났다.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었지, 이런 과거의 이야기는 집어치우고, 지금 표정을 보아하니 궁금증이 어느 정도 풀려 스스로의 수준을 확실히 안 것 같은데 대련 을 굳이 필요 없겠지?”
“아니요, 더욱더 확인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질 거라는 걸 알고 있을 텐데?”
“아벨 님이 강하다는 것은 알겠
지만 제 수준을 정확히 안 거는 아 니잖아요.”
“죽을 수도 있어.”
“그러면 그게 운명이겠죠.”
“너무 무모하군.”
“정확히 말하자면, 믿음이 있거 든요.”
싱긋 미소 짓는 서연의 말에 답 변을 한 것은 정복왕이 아니었다.
“지금이라도 기권을 하게.”
차가운 눈을 한 아벨이 서슬 퍼 런 경고를 흘리고 있었지만 서연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이렇게는 억울해서라도 못하지.”
누워 있던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 난 서연이 온몸에 덕지덕지 묻은 흙먼지를 툭툭 털어내며 한숨을 깊 게 내쉬었다.
“방금 전 일격 전력을 다 쓴 것 도 아니시잖아요.”
“당연한 이야기지.”
“대충 몇 프로 정도 썼다고 보면 될까?”
“굳이 치자면 30프로 정도.”
“정말 난 우물 안 개구리였네.”
피식 웃은 서연이 정복왕을 바라
본다.
“하나뿐인 사도를 죽게 내버려 두지는 않으실 거죠, 신이시여?”
갑작스런 요청에 정복왕이 입가 에 헛웃음을 흘린다.
“믿음이라는 게 나였던 거야?”
“그러면 믿겠습니다, 저의 신이 시여.”
짧게 화답한 서연이 아벨을 보며 자세를 다 잡는다.
“우선 내 수준이 얼마나 처참한 지는 확실히 알아야겠으니, 지금부 터는 저도 전력으로 가볼 테니 최 대한 사정을 봐주셨으면 합니다.”
이어서 서연이 일으킨 공허의 촉 수들이 아벨의 검과 맞부딪쳤다.
쾅-!
또 한 번의 커다란 폭음과 함께 세상 전체가 진동하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1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팽팽한 싸움이 이어진다.
꽤나 길게 이어진 싸움 끝에 다 소 지친 호흡을 내뱉는 아벨의 검 이 서연의 목 끝에 맞닿았다.
“제가 졌어요.”
“전력을 다한다는 것은 거짓말이
었군.”
아벨의 말에서연이 씁쓸한 미소 를 흘린다.
“공허를 더 불러내면 제가 제어 를 할 수가 없어서 정말로 아벨 님 이 죽으실 수 있거든요.”
“부정은 하지 못하겠군……
씁쓸한 미소를 지은 아벨이 정복 왕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힘을 쓰는 거라 많이 부족했습니다. 완전히 제압하지 못 하여 죄송합니다.”
이어진 대화는 상당히 충격적이 었다.
“충분히 훌륭했어, 별일 아니었 는데 이렇게 나서줘서 고맙네.”
“아닙니다. 정복왕님을 위한 일 중에 중대하지 않은 것이 있을 수 가 없죠, 그러면 전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싱긋 웃은 아벨의 시선이 서연을 향한다.
“다음에 다시 붙을 때는 공허의 힘을 모두 이끌어 내보도록 하지.”
“힘드실걸요.”
“그건 모르는 일이지.”
미소를 지은 아벨이 물러나고,
다시 둘이 되자 주변의 풍경을 본 래 회색빛 세상으로 돌린 정복왕이 서연을 바라본다.
“소감이 어때?”
“혼돈의 세계에 아벨 님과 같은 강자들이 얼마나 있죠?”
“상당히 많지, 심지어 몇몇은 아 벨 정도는 우습게 영멸시킬 수 있 을 정도로 강해.”
표정을 굳힌 정복왕이 서연을 바 라보며 말했다.
“이제 왜 수련을 해야 되는지 알 겠지?”
“완전히 이해했어요.”
서연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이 은하내에서는 손에 뽑히는 강 자라고 자부하지만, 이 상태로 혼 돈의 세계로 넘어갔다가는 정말 허 망하게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현실을 마주하게 되자 걱정이 밀 려오기 시작했다.
‘저런 강자가 무수히 많은 혼돈 의 세계.’
그곳에서 서준은 어찌 지내고 있 을까?
‘무사하긴 한 거지?’
반드시 무사할 것이다.
오랫동안 서준을 지켜봤기에 걱 정보다는 믿음이 더 클 수 있었다.
그렇게 안정을 찾아가는 서연의 모습에 정복왕의 입가에도 미소가 흐른다.
“아주 좋은 자세야, 서준을 믿어. 가진 가능성이 드넓은 우주에서도 제일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 니까……
“우주 제일이라……. 제가 도움 이 될 수는 있을까요?”
헛웃음을 흘린 서연이 자조적인 말을 흘린다.
“걱정하지 마.”
자신감 있게 고개를 주억인 정복 왕이 담담히 말했다.
“내가 반드시 도움이 될 수 있을 정도로 고된 수련을 시켜 줄 테니 까.”
장난기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정복왕의 말에서연의 목울대로 마 른침이 꿀꺽- 삼켜졌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