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권 11화
386화
선 채로 잠을 자고 있는 듯 고개 를 꾸벅이고 있던 혼돈인이 서준이 등장하자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어, 어? 뭐야? 꿈인가?
내뱉은 말과 달리 혼돈인의 눈동 자가 지진이라도 난 것마냥 흔들리 고 있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단 순히 꿈이라고 보기에는 느껴지는 감각들이 너무 많았다.
찰싹-!
바닥에 늘어져있던 촉수로 스스 로의 볼을 가격한 혼돈인의 눈동자 가 휘둥그레진다.
-꿈이 아니네?
촉수를 내뻗어 턱으로 흐르고 있 던 침을 재빠르게 닦아낸 혼돈인이 황급히 딱딱한 표정이 되어 근엄하게 말한다.
-환영하네, 수행자여, 만나서 반 갑네. 내 이름은 쿠뤠리. 여섯 번째 시련의 시험관이네.
“반갑습니다, 한서준이라 합니 다.”
-혹시 시련 전에 한 가지 질문을 해도 되겠나?
서준이 대답 대신 고개를 주억이 기 무섭게 쿠뤠리가 질문을 해온다.
-자네 이 탑에 들어온 지 하루도 안 되지 않았나?
“제 기준상으로는 그런 것 같은 데, 탑의 정확한 시간 축을 알 수 가 없으니 확신은 못 하겠네요.”
어깨를 으쓱이는 서준을 보며 쿠 뤠리가 헛웃음을 홀리며 수염처럼 늘어져 있는 긴 촉수를 쓸어내린다.
-이렇게 빠르게 탑을 오른 자는 처음이로군, 아주 홍미로워.
미소를 짓고 있는 쿠뤠리는 서준 이 일전에 만났던, 스스로를 수호 기사라고 칭했던 시험관들과는 확 실히 다른 모습이었다.
“아래층이랑 다르게 상당히 특이 한 반응이네요.”
-인간이 그렇듯 우리 혼돈인들도 각기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네, 허 허.
“뭐든 생김새가 아니라 내면의 본질이 중요한 법이죠.”
-외부에 휘둘려서는 진실된 모습 을 보지 못하는 게 당연한 것이지, 아차, 내가 정신이 없었군.
고개를 한 차례 내저은 쿠뤠리는 다시금 근엄한 표정이 되어 서준을 바라보며 말한다.
-어찌 됐든 수행자가 이 5층에 도달했다는 것은 혼돈의 속성 변환 을 완료했다는 것이겠지.
“당연하지요, 그러면 이번에는 빛과 어둠을 더해내는 과정인가 요?”
-빛과 어둠? 허허-!
갑작스럽게 웃음을 터트린 쿠뤠 리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게 뜻대로 되겠나? 혼돈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태초의 빛과 어
둠은 초월의 섭리에 있는 힘, 자네 의 천재성은 인정하네만 쉽진 않을 걸세.
“그런 것 같더라고요……. 탑을 올라오면서 계속 실험해 봤는데 유 독 빛과 어둠은 잘 안 되는 게.”
서준은 쿠뤠리의 말을 크게 부정 하지 않았다.
단서가 있었다면 모를까 아무런 지식 없이는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 었다.
-너무 실망하지는 말게. 수행자 한서준. 자네는 혼돈의 세계에 와 서 제대로 된 빛과 어둠을 본 적이
있나?
“……관측체가 존재했을 뿐이지 날씨는 변하지 않았지요.”
-모두 억지로 만들어 낸 인공 관 측체이기 때문이지.
“관측체를 만들어 냈다고요? 맙 소사.”
새로운 비밀을 알게 된 서준의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관측체를 만들었다는 것은 행성 을 창조해냈다는 것이다.
비록 생명체는 아니었지만 저런 거대한 행성을 만들어내는 일이 결 단코 쉬울 리가 없었다.
-아주 오랜 시간부터 존재해온 만큼 혼돈인이란 녀석들은 대다수 가 욕심이 상당히 많네, 바깥의 뛰 어난 문물, 기술을 보게 되면 질투 를 품게 되지, 허나 행성 자체를 가져올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다들 간절히 염원하여 힘을 내어 만든 것이네, 그래 봤자 자네가 말 했듯이 제대로 된 빛과 어둠도 머 금지 못한 관측체에 불과하네만.
꽤나 씁쓸한 이야기를 미소 지은 채로 말한 쿠뤠리가 말을 이어갔다.
-어쨌든 관측체를 보았다면 이번 시련에서 자네가 해야 될 일이 무 엇인지 알려주는 것도 쉽겠군.
이어서 쿠뤠리가 촉수를 둥그렇 게 말아내자 그 안에 자그마한 회 색빛 단검이 형성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서준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거…… 혼돈기로 만든 거잖아 요?”
- 정확하네.
혼돈기는 모든 것을 집어삼켜내 려고 하는 난폭하면서도 포악한 힘 이다.
즉, 저 평범해 보이는 외형을 가 진 단검에 베이는 존재는 그 순간
삽시간에 혼돈에 집어삼켜질 것이 다.
-우리는 이걸 혼돈기의 형상화라 고 부르고 있지.
“이해했습니다.”
단순히 혼돈기를 육체나, 물건에 두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과제라 할 수 있었다.
쿠뤠리는 지금 고작 자그마한 단 검을 만들어냈지만, 원한다면 검, 창, 갑옷과 같은 위협적이고 효과 적인 무구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혼돈화하는 것과 완전히 다르 네.’
애초에 혼돈화는 육신을 혼돈의 세계에 숨겨내는 것이다.
‘나도 수호기사들을 통해 알게 된 지식이지만……
우주에 수많은 은하가 있듯이 혼 돈의 세계 또한 하나가 아니다.
그리고 지금 서준이 있는 혼돈의 세계와 달리 의지가 있는 생명체들 이 아직 탄생하지 못한 혼돈의 세 계가 따로 존재하며, 공격받기 전 에 진체(眞體)라 할 수 있는 몸을 일시적으로 그곳에 숨기는 것이었다.
그러니 혼돈기를 형상화하는 것
은 개념 자체가 전혀 다른 것이었다.
“확실히 방식이 완전히 다르네 요.”
-천천히 하게, 이번 시련의 경우 정 힘들면 포기해도 되네, 아니면 이 늙은이의 말 상대나 해주는 것 도 좋고.
여유롭게 말한 쿠뤠리는 제자리 에 앉아 벽에 등을 기댔다.
-절대 쉽진 않을 걸세. 일시적으로 혼돈을 다루는 것과 형상을 만 들어 유지시킨다는 건 완전히 다른 개념의 일이니……. 어떻게 벌써
형상화를 해낸 건가?!
얼마 가지 못하여 곧장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친다.
서준이 자연스럽게 자신의 손에 혼돈기로 만든 회색빛 검을 쥐고 있는 탓이었다.
“아, 이거…… 제가 애용하던 방 식이거든요.”
입을 다물고 있는 쿠뤠리를 향하여 어깨를 으쓱인 서준은 피식- 미 소를 보인 채로 답한다.
애초에 원리 자체를 이해하고 있 으니 어렵지 않은 게 당연한 것이 다.
‘그냥 내공을 다루듯이 자연스럽 게 운용하면 되는 거잖아.’
애초에서준은 개벽의 검이라는 무공을 만들어냄으로써 강기, 극강 기를 넘어 자연에 떠돌고 있는 기 운까지 원하는 형태로 만들어낼 수 있었다.
혼돈기의 형상 변환은 그것과 같 은 원리를 행했을 뿐이다.
‘굳이 치자면 형상을 완전히 유 지하는 과정이 어렵긴 한데……
새로이 환골탈태한 몸이 혼돈기 를 너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활 용해낸다.
덕분에 난이도로만 보자면 속성 을 부여하는 것보다 더 쉬울 수밖 에 없었다.
그저 원래부터 할 수 있던 걸, 활용법을 생각해보지 않아서 사용 하지 않고 있을 뿐이었던 거다.
때문에 혼돈기를 이렇게 사용할 수도 있단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해 낼 수 있던 것이다.
-허, 허허…… 자네가 빠르게 시 련을 극복할 수 있었던 이유가 이 해가 가는군.
“죄송해요. 뭔가 엄청난 시험이 었던 것도 같은데……
-그저 자네의 능력인 뛰어난 것 이지 죄송할 게 뭐가 있나.
헛웃음을 홀렸지만, 고개를 끄덕 인 쿠뤠리는 길을 옆으로 비켜주었다.
-축하하네. 자네는 다섯 번째 혼 돈의 시련을 방금 돌파했네. 이제 6층으로 나아가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뭔가 허망하긴 하지만, 어찌 되 었든 합격했으니 좋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 서준의 머 릿속은 이런 자잘한 상황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편이 옳았다.
‘아직 내가 혼돈기를 다루는 방 식 자체가 낯선 것뿐이라면……
조금 더 유연하게 사고한다면 다 른 형태로 발현할 수 있다는 것이 다.
생각을 이어가던 서준이 눈을 빛 내며 물었다.
“여기서 하나만 시험해 보고 가 도 될까요?”
- 얼마든지.
“우선 혼돈화로 몸을 숨긴 다음 에……”
서준의 혼잣말에 쿠뤠리의 눈이
보름달마냥 동그래졌다.
-……자네 혼돈화도 할 수 있었 나?
백문이 불여일견, 굳이 입 아프 게 말하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직 대화를 주고받을 여유가 없었다.
서준은 침묵을 지킨 채로 의식을 집중했다.
그러자 약 5초의 시간이 흐른 후, 회색빛 기운에 네 가지 속성이 휘감긴 서준의 신형이 보인다.
“아직은 익숙하지 않아서 곧장 사용은 못 하네요……
-허허허!
서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웃 음을 터뜨린 쿠뤠리가 촉수들을 이 용하여 물개박수를 친다.
-수행자 한서준, 자넨 정말 굉장 한 천재였군! 하루도 안 돼서 혼돈 화를 하는 것도 모자라 추가적인 조건으로 속성을 부여해내다니, 정 말 놀랍군, 놀라워!
“……뭐, 혼돈에 관련해서는 제 가 재능이 상당히 뛰어난 것 같거 든요.”
-허허, 맞네. 맞아. 자넨 혼돈에 굉장한 재능을 타고났어. 근데, 그
래서 혼돈화 상태로 뭘 하려고…… 설마?
“예상하시는 게 맞습니다.”
이채가 어린 쿠뤠리의 눈을 보며 서준은 한차례 고개를 주억이더니, 혼돈기를 허공에 응집시키며 형상 화를 시도한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열 자루의 검이 단숨에 허공으로 떠오른다.
우우웅-!
서준이 손을 앞으로 내뻗는 순 간, 기다렸다는 듯 다섯 자루의 검 이 앞으로 쏘아졌다.
파괴력은 구태여 말할 필요도 없
었다.
콰과광-!
시련장의 벽면이 완전히 무너지 고 베어진다.
허나 서준이 바란 것은 고작 이 런 이기어검 따위가 아니었다.
‘육체를 혼돈에 일체화하는 것이 라면.’
완전히 그 세계로 넘어갈 수도 있지 않을까?
가설이 떠올랐고 빚어낸 혼돈의 무구를 통하여 과감히 실험을 해본 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서준의 신형이 흐릿해지는가 싶 더니 허공을 노닐고 있던 검 자루 의 위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사기적 이군.
쿠뤠리의 말이 맞았다.
단순한 공격과 방어가 아니었다.
어디에 있든 닿을 수 있고, 어디 로든 갈 수 있는 변칙성마저 갖추 어냈다.
이제부터 서준의 공격은 전혀 예 상할 수 없는 경로에서 날아오게 될 것이다.
“……저 진짜 천재인가 보네요.”
자연스레 스스로가 생각해 낸 아 이디어에 감탄이 터져 나와 버렸다.
-자네라면 오랜만에 모든 시련을 통과해낼 수행자가 될 수도 있겠군.
“제 앞에 탑의 끝까지 오른 존재 가 더 있었나 보네요?”
-지금까지는 다섯이 있었지, 가 장 최근으로는 아마 자네도 알고 있을 걸세, 현재 스스로를 혼돈제 라 칭하고 있는 놈이지.
“과연......
서준은 쿠뤠리의 말을 어렵지 않
게 납득할 수 있었다.
모든 시련을 극복해낸 존재였기 에 오랜 세월 균형을 지켜 온 수호 자인 카터와 대등한 것도 납득이 되는 일이다.
혼돈제가 생각했던 것만큼 강한 존재였지만 서준의 입가에는 미소 가 피어나고 있었다.
‘오히려 좋아.’
수련을 모두 극복해낸다면 혼돈 제 그리고 수호자인 카터와 비등한 수준의 강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이 었다.
드넓은 우주에서 무력으로만 치
자면 손꼽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 는 것이다.
강한 힘을 얻게 된다는 것, 무인 으로서 설레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힘내서 시련을 극복해야겠네.”
피식 웃으며 혼돈기들을 거둬들 인 서준이 힘차게 다음 층을 향해 올라간다.
-부디 무운을 빌겠네.
쿠뤠리의 응원을 뒤에 업은 채 6 층에 당도해낸 서준은 다소 당황스 러운 표정이 되었다.
“……이건 뭐야?”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