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권 10화
385화
서준의 날카로운 말에 기다란 촉 수를 꿈틀거리며 이야기를 이어가 던 퓌라의 입가로 다시금 비웃음이 떠오른다.
-시험에 통과하지 못한 자네의 존재는 혼돈에 종속되네. 죽음과는 다른 개념이지. 생명체로서의 잔재 조차 남기지 못하고, 기억하는 이 하나 없게…….
“수행을 혓바닥으로 하는 편이었 나 보네요.”
-……조언을 거부했으니, 이제 모든 업보는 수행자의 것이네.
그 말과 함께 퓌라가 몸을 바르 르 떨자 그의 신체에 놀라운 변화 가 일어났다.
‘팔이랑 다리……?’
촉수들이 한곳에 뭉치기 시작한 다.
물론, 단순히 촉수가 뭉친 것이 라면 서준도 이리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팔과 다리가 만들어지며, 흡사 인간과 같은 모습을 하게 되었다.
그간 괴물과 같은 모습, 촉수들 이 사방으로 뻗어진 혼돈인만 보아 왔던 서준의 입장에서는 충격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제 와서 후회해봤자 늦었네.
퓌라가 생성된 팔을 허공에 내뻗 자 벽면에 붙어있던 칼이 허공을 날아오기 시작한다.
우웅-!
낮은 공명음을 토해낸 검은 검신 의 색깔이 붉게 변하기 시작한다.
처음 보는 모습에서준의 눈매가 가늘어진다.
‘검신의 색깔이..
일반적인 경우라면 그리 놀랄 것 은 없었다.
사용자의 성향, 능력에 따라 기 운의 색상이 정해지는 만큼 기운을 발산할 때 각기 고유의 색을 띠기 마련이었다.
허나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은 틀 림없는 혼돈인이다.
‘혼돈의 기운은 분명 회색빛일 텐데.’
기이하게도 퓌라의 손에 쥐어진 검신의 색은 회색빛이 아닌 붉은색 이었다.
머릿속에 궁금증이 피어났지만 애석하게도 고민을 이어갈 시간이 없었다.
검신의 변화를 확인한 퓌라의 시 선이 서준에게로 옮겨진다.
이어서 허공에 일(一)자로 검을 휘두르자 혼돈의 힘이 타오르는 불 길을 감은 채 서준의 볼을 베고 지 나간다.
콰과광-!
어떠한 폭음도, 심지어 파괴의 징조도 없이 순식간에 벽이 무너진 다.
소름이 돋아날 정도의 파괴력이
었지만 서준은 그 모습을 침착한 눈으로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였 다.
“당신을 쓰러트리면 되는 건가 요?”
싸움이라면 자신 있다.
-그러면 너무 불공평하지, 내가 쥐고 있는 검을 부러뜨리기만 하면 되네.
“너무 쉽네요.”
-혼돈에 종속된 수행자들 중 자 네와 같은 오만을 보인 이들은 수 만에 달하지.
퓌라는 비웃음을 보이며, 다시금
붉은 검신을 휘둘러 서준의 머리를 베고 지나가며 벽면을 또다시 무너 뜨린다.
하지만 이형환위를 통해 상대의 눈을 속인 서준의 신형은 이미 퓌 라의 바로 뒤편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우선 기절시키고 부러뜨리는 게 편하겠지……?’
가볍게 생각하고 한 손에 혼돈기 를 회오리처럼 휘감은 서준이 주먹 을 휘두른다.
이어서 혼돈기가 폭발하며 커다 란 폭음이 터져 나온다.
허나 손끝에 걸리는 감각은 없었다.
분명 눈앞에 퓌라가 서있는데, 공격이 닿지 않았다.
놀란 서준의 눈동자가 휘둥그레 지는 순간, 다시금 퓌라의 검이 휘 둘러진다.
-어리석은 것…… 혼돈이란 태초 부터 존재했던 세계, 한낱 인간에 불과한 자네가 어찌 크라후의 시험 을 통과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힘 을 완전히 이해하지 않고는 내 털 끝 하나 건드리지 못할 걸세.
자신만만하게 외치는 퓌라의 목 소리를 들으며, 또다시 휘둘러지는 검을 피한서준은 침착하게 머리를 회전시킨다.
‘분명히 파괴력은 강하지만, 그리 빠르지는 않아.’
큰 위협은 되지 않는다.
허나 시련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공격을 피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대체 왜 공격이 닿지 않는 거 지?’
고민을 이어가던 찰나, 서준을 향해 붉은 검신이 날아온다.
서걱-!
이번에는 날카로운 검격들과 어 우러져, 혼돈기가 날뛰기 시작한다.
속도가 빠르지 않은 만큼 어렵지 않게 공격을 회피했으나 서준의 입 가에서는 헛웃음이 흘러나올 수밖 에 없었다.
‘본인은 물리력을 행사하면서 내 공격은 닿지 않는다고?’
정말 말도 안 되는 생명체다.
동시에서준의 마음속에 투쟁심 이 타오른다.
‘완벽하게 꺾어주고 싶네.’
투쟁은 위기의 상황에만 일어나 는 것이 아니다.
적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향한 갈 망에서도 일어날 수 있었다.
지금처럼 말이다.
뇌가 타오르는 듯 가속하기 시작 한, 서준의 입가에 미소가 번뜩였 다.
‘이건 수행이야.’
그리고 첫 번째, 크라후의 수행 은 서준이 스스로 혼돈기를 받아들 이고 활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뒤를 이은 1층, 혼돈의 네 번째 수호기사라는 퓌라와의 싸움.
‘왜 네 번째 기사일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고 민 속 한 가지 가설이 머릿속에 떠 오른다.
‘ 설마......?’
혼돈의 세계는 태초부터 존재했 던 공간.
때문에 모든 것의 시초가 탄생된 곳이라 할 수 있었다.
비록 주를 이루는 힘은 혼돈이라 지만, 꼭 거기에만 집중할 필요는
없다.
‘퓌라, 놈의 속성은 분명 불.’
그리고 불을 제압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물이다.
이번 수행 과제를 통과하기 위해 서는 혼돈에 고유의 속성을 더해내 야만 했다.
이제 막 혼돈기를 다룰 수 있게 된 것이라면 속성의 힘을 더해내는 것은 엄청나게 어려운 과제다.
실제로 지금껏 서준이 만났었던 혼돈왕조차도 속성을 더해낸 힘을 보이는 녀석이 없었다.
‘하지만 난 달라.’
자그마치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미 수련을 끝마친 상황이었다.
-지금이라도 포기하고 목숨을 구 걸한다면 혼돈에 종속되지는 않게 해주마.
조롱 섞인 말을 던지는 퓌라를 보며 다시 한번 쇄도해오는 검격을 본 서준이 피식- 미소를 던진다.
“하나만 묻지, 만약 내가 이 시 련을 통과한다면 너처럼 물리력을 피해낼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줄 수 있나?”
강해지기 위해 시련을 받으러 왔 다.
새로운 힘을 갈망하는 것은 당연 했다.
-뭐? 혼돈화(混范化)에 대한 방 법을 알려 달라고?
“왜, 질 것 같아?”
-오만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도발에 웅하듯 격하게 외친 퓌라 의 눈매가 찌푸려진다.
“그렇게 자신 있다면 약속해 봐, 설마 겁먹은 건 아니지?”
-네놈이 오늘 내에 시련을 통과 한다면 가르쳐주지!
“약속한 거다, 나중에 가서 말
바꾸지 마.”
-내뱉은 말조차 지키지 못하는 머저리였다면, 이 고귀한 탑에 남 아 있을 자격조차 없었을 거다.
혹시나 싶어서 도발을 한 것인데 꽤나 잘 먹혔다.
분노한 눈을 한 퓌라가 고개를 끄떡이며 외친다.
-위대한 혼돈의 탑과 시험관의 자격을 걸고 맹세하지, 만약 자네 가 오늘 내로 이 시련을 통과한다 면 혼돈화에 대한 방법을 알려 주 도록 하지.
퓌라는 다루고 있는 기운, 불과
같이 뜨거운 성격을 가진 자존심이 강한 존재였다.
만족스러운 대답에 홉족한 미소 를 지은 서준은 다시 한번 눈앞에서 휘둘러지는 붉은 검신을 피해내 며 퓌라와의 거리를 좁힌다.
“굳이 하루 종일 하고 있을 필요 가 없지.”
각기 다른 능력과 힘을 가진 기 운들에는 상생과 상극이 존재한다.
그리고 중원 대륙에서는 이를 오 행이라고 일컫는다.
“네가 다루는 불은 물과 상극이 지.”
이어서 나지막이 말하며, 심장에 혼돈의 고리를 형성하며 외부에서 자연기의 힘을 끌어들인다.
어떠한 약점, 상극이 존재하지 않는 무결의 힘이 서준의 부름에 응답하여 혼돈기에 빨려 들 듯 휘 감아지며 황금빛 물결이 출렁인다.
-말, 말도 안 돼! 어떻게 바깥 은하의 인간이 혼돈의 속성 변환 을...
놀란 퓌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서준은 붉은 검신 위로 수 속성 의 혼돈기를 밀어 넣는다.
그러자 작은 떨림을 토한 붉은 검신이 콰직- 하는 소리를 내며 허 망하게 부서진다.
아주 손쉽게, 검을 부숴 낸 서준 의 입가에는 숨길 수 없는 미소가 흐른다.
“약속은 지킬 거지?”
_허허…….
믿을 수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 린 퓌라는 제자리에서 엉덩방아를 찧고 쓰러졌다.
* *
천 년에 달하는 세월 동안 수많 은 무공과 지식들에 뛰어난 재능을 갖춘 서준은 무엇이든 빠른 속도로 흡수해낼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무공과 관련되어 있 어야 하지만……
다행히도 퓌라가 사용하던 혼돈 화라는 기술은 무공을 기반으로 삼 고 있는 능력이었다.
일종의 호신강기와 같은 것이다.
물론, 단순히 혼돈을 몸에 두르 는 것이 아닌 육신 자체가 혼돈과 일체화되어야만 했다.
덕분에 혼돈화를 사용하는 법을 퓌라에게 전수받기까지는 반나절의 시간도 필요하지 않았다.
-제법이구나……. 이 몸조차도 혼돈화를 익히는 데 1년이 넘는 시 간을 필요로 했거늘.
엄청난 서준의 습득 속도에 다시 한번 놀란 퓌라가 혀를 내두른다.
-인정하지, 자네는 탑을 오를 수 행자의 자격이 있네.
처음, 오만했던 모습과는 다르게
자신의 패배를 꽤나 깔끔하게 인정 하고 있었다.
“나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다 들 내가 천재라고 말을 하더라 고……
-성격은 여전히 재수가 없군.
“농담이야, 즐거웠고, 나중에 기 회 되면 또 보자.”
피식 웃은 서준은 가볍게 손을 흔들고는 퓌라를 뒤로한 채 곧장 2 층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 이후 반나절도 되지 않아 서준은 자신의 눈앞에 넋이 나간 듯 한 표정을 짓고 서 있는 4층 혼돈
의 시험관, 카로스를 마주하게 되 었다.
“5층으로 가도 되는 거지?”
-대, 대체 어떻게 바깥 은하의 인간이 혼돈을 다룰 수 있는 거지?
경악하고 있는 카로스의 말을 긍 정으로 받아들인 서준은 그 옆을 스쳐 지나가 다음 층, 5층으로 향 하는 계단으로 걸음을 내딛는다.
‘설마설마했는데……
시련의 탑의 4층은 모두 속성 변 환에 관한 것이었다.
1층부터 불, 물, 대지, 바람으로 이어지는 시련들은 서준에게 문제
될 것이 없는 것들이었다.
‘애초에 무결의 힘을 통해 대부 분의 속성을 다룰 수 있는 나한텐 너무 쉬운 시련이었으니까.’
쉽게 할 수 있는 걸, 확실하게 머릿속으로 이해하고 습득한 것이 다.
이로 인해 서준이 표면적으로 성 장한 건 의외로 혼돈화였다.
‘혼돈화를 사용한 상태로 속성을 부여할 수 있게 될 줄은 몰랐네.’
같은 혼돈화 상태가 아니라면 혼 돈화 상태인 대상에게 물리적인 타 격올 줄 수 없었다.
이것만으로도 뛰어난 방어 능력 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서준은 여기에 속성이라 는 키워드를 더해냈다.
제대로 된 타격을 입히기 위해서 는 한 가지 키워드가 더 필요해진 것이다.
따지자면 특정 조건을 성립시켜 야지만 타격을 가할 수 있는 엄청 난 방어막을 얻게 된 셈이다.
‘심지어 대상이 나한테만 국한되 는 게 아니야.’
혼돈기만 충분하다면 작게는 사 물, 넓게는 행성 하나를 뒤덮을 수
있었다.
만약 이런 방어막을 지구 전체에 덮어 둔다면?
웬만한 신격들도 쉽사리 넘볼 수 없는 결계가 펼쳐지게 되는 것이었다.
‘뭔가 엄청난 걸 얻게 된 것 같 은데……
충격적인 건 이제 고작 4층을 올 랐을 뿐이란 사실이었다.
‘이 시련의 탑을 정복하고 나면 대체 얼마나 강해질 수 있는 거 지?’
내심으로 헛웃음을 지은 서준이
마침내 5층에 도달했다.
그곳에서 서준이 마주한 시험관 은 구부정한 체형, 촉수를 긴 수염 처럼 바닥에 늘어트리고 있는 특이 한 모습을 한 혼돈인이었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