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권 24화
374화
파지지직-!
갑작스레 귓전에 울려 퍼지는 스 파크 소리에서준의 미간이 찌푸려 진다.
외부에서 들려온 소리가 아니다.
방금 전 치료를 끝냈다고 생각한 정복왕의 내부, 공허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무슨......?”
서준이 의문을 느끼고 있던 찰
나, 수복해놓은 상처가 빠른 속도 로 벌어진다.
실제로도 급속도로 몸의 상태가 나빠진 정복왕의 입에서 붉은 선혈 이 쏟아져 나온다.
“정복왕!”
바닥으로 쓰러지려 하는 그녀의 신형을 잡아내는 순간, 다시 한번 스파크 소리가 울려 퍼진다.
파지직-!
이번에는 정복왕의 내부가 아니 었다.
일대의 공간이 일(一)자로 그어 지며 거대한 회색빛 균열이 일어난
다.
‘공간이 찢어진다고?’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이곳이 어디란 말인가?
정복왕의 성역이었다.
지금 당장에야 힘이 많이 소진된 상태이긴 하나 정복왕은 한때 내우 주의 패자로서 군림한 존재이자 홀 로 고대의 존재들과 맞서 싸웠던 존재였다.
그런 정복왕이 온전한 상태에서 만들어 둔 결계가 펼쳐진 공간이다.
심지어 외부에는 주신에 오른 라 와 정복왕의 사도인 서연이까지 존재했을 뿐더러, 일대에는 서준이 자랑스러워하는 무결의 장막마저 펼쳐져 있었다.
이런 모든 방벽들을 아무런 소란 없이 꿰뚫고 균열을 일으킨 것이다.
자연스레 서준의 시선이 거대한 회색빛 균열에 고정된다.
“이건..
균열을 바라보고 있던 서준의 눈 매가 날카로워진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회 색빛 균열에서 익숙한 기운이 느껴
지고 있었다.
“혼돈의 생명체.”
입술을 달싹이는 순간, 부름에 응답하기라도 하듯이 회색빛 형체 의 존재가 모습을 드러낸다.
서준이 회색빛 형체를 인지하는 순간, 그 또한서준을 인지한다.
[호오, 네놈은?]
기이한 형태를 한 회색빛 존재의 눈매가 흥미롭다는 듯 휘어졌다.
[과거의 계약자를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군.]
“ 계약자?”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에서준의 고개가 갸웃- 젖혀지려던 순간이었다.
“쓸데......없......는 말 하지...... 마.”
입가에서 붉은 선혈을 쏟아내며 내뱉는 정복왕의 다급한 모습에 회 색빛 형체가 천천히 고개를 주억인 다.
[새로운 계약자가 바라는 것이라 면……. 애초에 이곳에 방문한 것 은 과거의 회포를 풀기 위함은 아 니라 그저 확인을 하러 온 것이니.]
어느새 날카로워진 눈매를 한 회
색빛 형체가 정복왕의 신형을 응시 한다.
[설마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멋 대로 떠나갈 줄은 몰랐네.]
“계약 위반은 아닐 텐데?”
[맞아, 그래서 그저 확인을 하러 온 것이지.]
이어지는 대화 속, 서준의 머릿 속에 피어나는 의문은 빠른 속도로 부풀어간다.
“무슨 대화를 하고 있는 거지?”
“아니야! 못 들은 걸로 해줘.”
다급하면서도 절실한 정복왕의
목소리가 귓전을 강타한다.
허나 서준은 멈출 수가 없었다.
본능이 강하게 소리치고 있기 때 문이었다.
정복왕을 갉아먹고 있는 공허의 힘은 눈앞의 회색빛 형체와 연관이 되어 있다.
아니, 단순한 직감이라고 볼 수 도 없었다.
실제로도 회복을 끝마쳤음에도 삽시간에 상처가 벌어졌고, 이후에 저 회색빛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었다.
분명 어떠한 형태로든 연관이 되
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서준의 시선이 허공에 떠있는 회 색빛 형체를 향한다.
시선의 끝, 회색빛 형체는 서준 과 정복왕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눈 가를 반달의 형태로 휘어내고 있었다.
[그토록 궁금해한다면 가르쳐 줘 야겠지.]
“그만! 이번 계약은 나와 맺은 것이지 않느냐!”
정복왕의 외침이 커지면 커질수 록 회색빛 형체의 눈가는 더욱더 휘어져 간다.
[정복왕 가이사, 그녀는 매우 큰 희생을 치렀지.]
“듣지 마!”
다급히 달려온 정복왕이 양손으로 서준의 귀를 막아내려 했지만, 회색빛 형체가 가진 힘 앞에 그녀 는 너무나 무력했다.
[계약자는 잠시 쉬고 있도록 하 지.]
회색빛 안개가 신형을 휘감아내 자, 마치 정복왕은 처음부터 이 자 리에 없던 것마냥 자취를 감춘다.
당장 무슨 수를 쓴 것인지 정확 히 알 수는 없었지만, 앞선 대화를
통해 한 가지는 확실히 알아낸 것 이 있었다.
‘눈앞의 혼돈의 생명체는 정복왕 을 위협할 수 없다.’
알 수 없는 계약으로 엮여 있는 상태, 적어도 안전은 확실하게 보 장받은 상태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꼭 회색빛 형 체의 이야기를 들어내야 했다.
‘계약의 비밀을 안다면 정복왕을 치료할 수 있어.’
그녀에게 진 빚을 갚아낼 수 있 다는 것이다.
그렇기에서준은 담담한 시선으
로 회색빛 형체를 바라본다.
“말해 줘, 정복왕이 무슨 계약을 했는지.”
서준의 요청에 입꼬리를 비튼 회 색빛 형체는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정복왕 가이사, 그녀는 내우주, 이 은하의 파멸을 막기 위해 아우 터 갓들과 계약하여 스스로의 영혼 을 혼돈에 귀속시켰다.]
“혼돈에 귀속시켰다고?”
[다른 이라면 이해할 수 없겠지 만……. 혼돈을 다루는 너라면 알 아볼 수 있겠지.]
회색빛 형체가 앞으로 뻗어지며 손의 형태를 취해간다.
그 위에는 회색빛 원반이 놓여져 있었다.
“혼돈.”
서준은 어이가 없었다.
직접 겪어봤기에 알고 있었다.
아니, 주변의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혼돈의 세계에 사는 존재들은 이 쪽 우주와는 또 다른 전혀 다른 차 원의 형태에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아주 위험하고,
무시무시한 괴물들이 존재했다.
-끄에에엑-!
원반을 마주하는 것만으로 서준 의 머릿속에서는 끔찍한 혼돈의 소 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혼돈은 저들만의 방식으로 연결 되어 있다.
때문에 일반적인 사람은 물론, 신격들조차 그 소리를 알아듣지 못 하는 것이 당연하다.
오히려 혼돈에서 흘러나온 기운 에 정신이 잠식당하여 미쳐버리는 경우도 허다한 곳이었다.
“이곳에 영혼을 귀속시켰다고?”
서준의 눈매가 날카로워지자, 회 색빛 형체가 진정하라는 듯 두 손 바닥을 앞으로 내민다.
[나를 탓하지 말게, 모두 그녀가 직접 내린 선택이었네.]
회색빛 형체의 말에서준이 아랫 입술을 질끈- 깨문다.
서준은 지금 내우주의 신격들 중 에 누구보다 가장 혼돈에 가까이 접촉해 보았던 존재였다.
때문에 다른 혼돈의 세상에서 들 려오는 소리를 서준은 명확히 인지 할 수 있었다.
-먹어..치...워야 해애...
그렇지 않아도 머리가 아픈데 끈
적끈적하고 불쾌한 목소리가 계속
해서 머릿속에 울려 퍼진다.
‘닥쳐.’
인상을 살짝 찌푸린 서준이 짧게
답했다.
‘조용히 하라고……
서준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이었다.
-너는…… 누구우……?
-우리를 안다..
-알고 있다아아아-……!
-함께..하자.... 하나가 되자
-!
하나였던 목소리가 순식간에 우 르르 불어나기 시작했다.
수십에서 수백, 수천까지 머릿속 에 끊임없이 목소리가 들려온다.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 서준의 모 습에 회색빛 형체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흐른다.
[고작 이 정도로 괴롭나? 정복 왕, 가이사는 너희들을 위해 수 개 월간 계속해서 들어온 목소리인데.]
“계약을 무를 방법은?”
미간을 찌푸린 서준은 회색빛 형 체를 향해 당당히 질문을 던진다.
[비슷하거나 혹은 더 높은 격의 영혼을 혼돈의 세계에 바친다면 특 별히 물러줄 수도 있지.]
분명 숨겨진 속임수가 있을 것이 다.
애초에 아무런 목적 없이 이렇게 많은 정보를 내줄 리가 없었다.
노리는 것이 있기에 이런 대화를 이어가는 것이다.
실제로도 회색빛 형체의 입가가 뒤틀린다.
[어찌하겠나?]
무의미한 질문이었다.
‘정복왕이 나를 수없이 도와주고 구해줬어……
그간의 빚을 갚을 때였다.
‘단순히 몸이 안 좋은 것이 문제 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다.
이제 와서 보니 진짜 심각한 문 제는 따로 있었다.
원반에서 흘러나오는 혼돈의 힘 이 사방으로 날뛰며 태풍처럼 소용 돌이치고 있었다.
서준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힘......
분명히 두렵고 위험한 힘이었다.
허나 언젠가는 결국 지배할 수 있올 것 같았다.
문제는 그 시기가 언제냐는 것이 었다.
계산을 이어가던 서준을 향하여 회색빛 형체가 말을 건네온다.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 아 부디 빠르게 선택을 해주었으면 하네.]
조바심에 괜한 재촉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원반에서 홀러나오는 혼돈의 힘 이 시간이 갈수록 일대의 기운과 뒤섞여 점점 증폭되며 폭주해가고 있었다.
회색빛 형체의 통제를 잃어가고 있었다.
“그래, 네가 원하는 데로 해줄 게.”
어차피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계약을 받아들이겠다, 혼돈의 생명체여.”
[크하하……! 눈물겨운 희생이 군.]
폭소를 터뜨린 회색빛 형체의 입 가에 비릿한 미소가 흐른다.
[한서준 계약은 이행될 것이다.]
소용돌이치던 회색빛 기운이 서준의 심장으로 흘러들어온다.
정복왕의 몸에 심어져 있던 공허 와 비슷한 형태의 힘.
아마 이 힘은 육신을 갉아먹으려 할 것이다.
서서히 죽음이 다가오고 있는 것 이었지만 두렵지 않았다.
‘고작 이 정도를 무서워해서는 안 되지.’
진짜는 따로 있었다.
회색빛 형체가 들고 있는 원반, 그 안에서 터져나온 혼돈의 힘이 서준의 육신을 옭아맨다.
원반 내부, 혼돈의 세상으로 끌 고 가려는 것이다.
이미 예견했던 만큼 당황스럽지 는 않았지만, 순순히 끌려다녀 줄 생각은 없었다.
서준은 전력으로 무결의 힘을 일 으킨다.
[무의미한 발악을 하는군.]
어떠한 것도 혼돈의 힘을 베어낼
방법은 없었다.
그리 믿었던 회색빛 형체의 얼굴 은 머지않아 딱딱하게 굳어가기 시 작했다.
‘무결의 힘.’
일으킨 무결의 힘을 완성의 경지 로 이끌어낸다.
동시에 쏟아내던 기운을 한 손 끝에 모두 응집시키며 날카로운 검 날에 심상을 심는다.
검에 담겨 있는 힘은 구원이다.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쟁취해 낸다.’
무결의 기운에 구원의 힘을 하나 로 묶어내고 완성(完成)시킨다.
‘으아아-!’
소리 없는 외침과 함께 휘둘러진 서준의 검은 짧은 순간 무극의 경 지에 도달하며 무엇으로도 베어낼 수 없다는 원반, 혼돈의 세상을 갈 라낸다.
손끝에 느껴지는 감촉.
서준은 자신의 공격이 혼돈에 닿 았음을 느꼈다.
동시에 혼돈의 세상에 존재하는 거대한 힘이 방어에 나서는 것 또 한 깨달을 수 있었다.
‘최대한 상처를 낸다……
지금 혼돈의 세상을 갈라내고, 길을 열어둔다면 본래의 세상으로 돌아올 방법이 생긴다는 것이었다.
서준의 의지는 불타올랐고, 본래 허락된 시간보다 더 긴 완성의 영 역에 들어설 듯했다.
신명은 투쟁.
결코 어떤 상황에서도 쉽사리 꺾 이지 않는다.
“크아아아-!”
서준은 괴성을 내질렀고, 온 힘 을 다해 오히려 검을 휘두른다.
거대한 힘의 싸움.
그리고 그 끝에서준은 혼돈의 세상에 검격을 밀어넣는 데 성공했 다.
‘끝이야!’
입가에 미소를 지은 서준은 혼돈 의 세상에 꽂아 넣은 검의 손잡이 에 묠니르를 거세게 휘두른다.
실어내고 있는 힘에는 파괴를 담 아낸다.
쿵-!
굉음과 함께 박힌 검이 아래로 그어지며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한
다.
[그, 그만-!]
회색빛 형체가 거대한 괴성을 내 지르며 서준을 향해 달려오려는 순 간이었다.
원반 속, 거대한 회색빛 기운이 터져 나오며 서준의 육신을 휘감아 낸다.
위협적인 힘이었지만 서준은 순 순히 회색빛 기운을 받아들여낸다.
어차피 계약을 맺은 이상 거스를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서준은 발악 대신, 고 개 돌려서 혼돈의 세상을 바라봤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