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권 23화
373화
“몸은 괜찮은 거야……?”
“그럭저럭?”
“……온전하지는 않나 보네.”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상황을 지 켜보던 라와 서연이 고개를 끄덕인 다.
“둘이서 대화하고 싶어.”
“그러자.”
정복왕의 요청에서준은 천천히
고개를 주억이더니 일대에 무결의 장막을 펼쳐낸다.
단둘뿐인 세상 속.
서준의 시선이 정복왕에게 고정 되어 있던 때였다.
“서준, 왜 그런 눈빛으로 바라보 는 거야?”
눈빛에 담긴 감정을 읽은 정복왕 의 질문에, 서준이 황급히 고개를 내젓는다.
“아니, 아니야.”
“거짓말하지 마, 방금 눈빛이 완 전히 수상했어.”
사실 정복왕은 이미 서준의 눈빛 에 담긴 감정을 알고 있었다.
굳이 치자면 동정(同情)에 가까 운 시선이다.
정복왕이 자신의 눈빛에 담긴 감 정을 완전히 읽어냈다는 사실을 깨 달은 서준의 입가에 쓴웃음이 흐른 다.
“미안해.”
“사과를 받자고 한 말이 아니야, 알고 있었어, 원래 감정이란 게 그 런 거잖아, 숨기고 묻어두려고 해 도 은연중에 흘러나오게 되는……
무겁게 내리깔리는 말에서준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한다.
특별한 권능이나 압박감을 내뿜 는 것도 아닌데 마치 심장이 내려 앉는 듯한 느낌이다.
그녀의 입으로 직접 이야기를 듣 고 나면 정말 모든 것이 사라져버 릴 것 같아서 무서웠다.
계속되는 침묵 속에서도 정복왕 은 별다른 말이 없었다.
서준은 정복왕을 재촉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야기를 하기로 결심한 이상, 시간의 문제일 뿐이었다.
괜한 재촉은 오히려 상대의 고민
을 깊게 할 뿐이었다.
그렇게 30분 이상.
고요한 침묵이 끊임없이 지속되 어갈 것 같을 무렵, 정복왕이 천천 히 입술을 달싹였다.
“지금 상황에 대해서 알고 있 지‘?”
“어느 정도는……. 억지로 의식 을 깨워냈다는 말은 들었어.”
“맞아, 아마 빠르면 일주일, 길어 봤자 한 달 정도밖에 견디지 못할 거야.”
“일찍 일어나기 위해서 얼마나 무리를 한 거야?”
“회복을 위한 시간이 한 10년 정 도? 늦춰졌지.”
“길어야 한 달……. 어째서 이렇 게까지 무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1달의 행복을 위해 10년을 희생 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입술을 질끈- 깨문 채로 질문을 던지는 서준의 모습에 정복왕은 피 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내린 선택이었어, 존중해 줄 수 있지?”
주신이란 존재는 본래 누구든 고 독하다.
높은 격과, 누구도 함부로 다가 갈 수 없는 지고한 위치.
사실 정복왕은 지독한 고독을 느 꼈을 것이다.
누구도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
모든 것을 다 바친 충신이라 할 지라도, 같은 주신의 자리에 오르 지 않는 한 평생 정복왕을 이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물론, 지금과 같은 정복왕의 무 모한 행동은 다소 당황스러웠다.
다만,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허나 각자가 가진 이념과 관점들 이 다른 만큼 선택을 강요할 수는 없다.
그녀가 무리를 해서라도 의식을 깨워낼 만큼 지금의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무어라 따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제일 중요한 건 본인의 생각이 지.’
정복왕은 오랜 세월 고독함 속에서 살아왔다.
존재하기로만 최소 수천 년.
외로움이란 감정 속에 파묻혀 평 생을 살아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난 정말 운이 좋은 편이었네.’
균형이 깨짐으로 인하여 주신들 이 탄생하고 있었다.
고독함에 깊이 빠져들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정복왕은 달랐을 터였다.
때문에 평화로운 세계에서 주신 들이 한곳에 뭉쳐 이렇게 잡담을 나누고, 서로 어울리는 모습을 꽤 나 부러워했을 것이다.
실제로도 길어야 한 달이라는 시 간을 위해서 이렇게 강제로 의식을 깨워내지 않았는가?
정복왕의 감정을 떠올리자, 그녀 의 행동들이 어느 정도 납득이 되 기 시작한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마음 한편에서 괜스레 불안감들이 피어나고 있었다.
“돌아올 수 있는 거지?”
다소 말도 안 되는 질문이었다.
고작 의식을 일찍 깨워낸 것으로 영면에 들 리는 없지 않은가?
허나 정복왕의 태도는 마음속에 피어난 불안이 현실임을 대변해주 고 있었다.
그늘져 있는 얼굴을 한 정복왕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린다.
“힘들 거야.”
“ 뭐?”
분명 똑똑히 들었다.
애초에 주신에 오른 존재가 이런 느릿한 말을 놓칠 리가 만무했다.
허나 믿을 수 없는 현실에서준 은 저도 모르게 반문을 홀린다.
“마지막이기에 함께하고 싶었어,
너, 그리고 모두와 함께……. 서준, 그런 표정 지을 거 없어.”
계속되는 정복왕의 말에도 서준 은 고개를 세차게 내젓는다.
“이유가 뭔데? 어째서 돌아오지 못한다는 건데?”
침묵이 이어진다.
쏟아지는 서준의 질문들에도 정 복왕은 미소를 지을 뿐이다.
“말해 줘, 혹시 내가 도울 수 있 을 수도 있잖아.”
말을 내뱉는 서준의 는동자에는
간절함이 어려 있었다.
당연한 것이다.
서준에게 있어서 정복왕은 여러 모로 고맙기만 한 존재였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계속해 서 서준을 지원하고 도와주고 희생 한 그 마음은 어떤 식으로든 갚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이런 이유도 없는 비 참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모든 일에는 그에 걸맞은 대가 가 따르는 법, 그냥 우주의 흐름이 자 정해진 운명이라고 생각해줘.”
정복왕의 담담한 말에서준은 고 개를 내젓는다.
“이런 게 운명이고 우주의 흐름 이라면 따라 줄 생각 없어.”
애초에서준은 파멸이라 부르는 존재들, 우주 전체와도 싸울 생각 을 마친 상태였다.
‘운명, 우주의 흐름이고 뭐고 다 필요 없어.’
중원 대륙에 갑작스레 떨어졌을 때부터, 천마에 오르고 다시 지구 로 되돌아와 현재에 이르기까지.
정해진 길은 없었다.
모두 스스로가 정해온 것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내가 바꿔내겠어.”
당연하지만 무작정 감정에 호소 하는 말은 아니었다.
힘이 약해진 덕분인지, 계속 정 복왕을 주시하고 있자 약점들이 노 골적으로 눈에 들어온다.
‘공허의 힘.’
강력하기 그지없는 힘.
달리 말하자면 그에 따른 책임 또한 거대하다는 것이다.
실제로도 공허의 힘은 대화를 나
누고 있던 이 시간에도 정복왕의 육신을 끊임없이 갉아먹고 있었다.
‘공허의 힘이 갉아먹은 부분을 내가 채워낸다.’
무엇이든 품고 있는 힘이자, 홈 이 존재하지 않는 무결의 힘이라면 저 빈틈을 충분히 메꿔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치료할 수 있어.”
“불가능해.”
정복왕은 단호히 고개를 내젓는 다.
허나 서준의 눈동자에는 혼들림 이 존재하지 않는다.
“믿어 줘.”
서준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무공 들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중에는 신(神)이 만들 었다는 신공 또한 존재했다.
물론, 대다수가 이름만 한 능력 을 가지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기대 이하의 수준 을 보여주는 것이 더 많았다.
과거에는 이러한 현실에 크게 실 망한 적이 많으나 주신에 오르고 완성에 오르는 무공을 다루며 무극 의 끝을 본 순간 느꼈다.
분명 중원 대륙에 있던 신공들은 정말로 신이 만들어 낸 것이었다.
‘그저 나아가는 길, 다루는 방식 이 잘못되었을 뿐.’
애초에 인간의 육신으로 신이 만 들어낸 무공을 다룰 수 있을 리 없 지 않은가?
하지만 지금의 서준에게는 신의 육신이 존재했다.
‘허무맹랑하다 생각했는데……
천마신교, 그중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은 동굴이자 당대의 천마만이 들어설 수 있는 비급소.
그 안에는 초대 천마가 창안해냈 다는 신공, 육도소생신공(A道蘇生 神功)이 존재했다.
어떠한 병, 상처든 치료할 수 있 을뿐더러 죽은 자라 할지라도 살려 낼 수 있는 신공.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터무니없 는 무공인 것 같았지만, 무작정적 으로 무공을 습득하던 때였던 만큼 끊임없이 연구해왔다.
물론, 그 당시에는 실마리조차 잡지 못했다.
하지만 신의 육신을 가진 지금이 라면?
‘실존하는 무공이였어.’
무공 비급이라기보다는 워낙 전 설처럼 전해지는 이야기책에 가까 웠던 만큼 정확하게 습득하지는 못 했지만, 이미 길은 알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추혈과도술과 육도혈환술.’
천마신교, 무명신의가 다뤄왔고 전수해준 이 두 가지 치료술들은 모두 육도소생술에서 파생되었던 것이다.
보다 위력을 낮추고 변화를 주었 던 것은 인간의 육신으로 펼쳐내기 위함이었을 뿐이다.
천마신교의 창시자이자, 가장 완 벽하고 무서운 교주로서 회자되는 인물.
그의 무공이 서준의 손에서 다시 한번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 했다.
‘육도소생신공.’
처음 펼쳐보는 신공이었지만 실 패하지 않을 것이라 장담할 수 있었다.
내공 안에 무결의 힘이 담기며 부족한 부분을 메꿔 내줄 것이다.
실제로도 푸른빛 물결이 회전하 며 서준의 전신에 퍼져나간 순간이
었다.
온몸을 휘감던 푸른빛 기운이 투 명화될 듯 흐릿하게 흩어진 이후, 찬란한 황금빛 색으로 변모했다.
‘완전히 되살려낸다.’
본래 목적은 단순히 메꿔내는 것 이었다.
허나 육도소생신공을 펼치게 되 자 확신이 든다.
단순히 체내의 육신을 회복하고, 변질되고 썩고 죽은 세포 자체를 원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이 신공을 이용한다면 모든 것들
을 되살려낼 수 있었다.
지금 정복왕의 육신을 갉아먹고 있는 공허의 힘, 우주의 법칙 자체 를 뒤틀어낼 수 있다는 말이었다.
물론, 육도소생신공을 펼친다고 해도 고대의 힘 중 하나인 공허의 힘을 완전히 밀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평범한 신격이었다면 도리어 공 허에 집어삼켜지지 않는다면 다행 일 것이다.
그러나 혼돈과 파괴의 힘을 다루 며, 무결의 주신의 자리에 오른 서준에게는 문제가 될 수 없었다.
황금빛 눈동자를 한서준의 시선 이 정복왕을 응시한다.
“네가 그랬듯 나도 무슨 일이 있 어도 너를 살려낼 거야, 그러니까 믿어 줘.”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정복왕이 황급히 손을 내저으려 했지만, 서준도 물러나지 않았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기회를 줘.”
두 눈동자에 담긴 의지가 확고했 다.
여기서 괜한 말싸움을 하며 저항
해봤자 무의미했다.
정복왕은 결국 고개를 주억일 수 밖에 없었다.
“무리는 하지 마.”
“약속할게, 대신 너도 내가 됐다 고 할 때까지 절대 움직이지 마.”
고개를 주억이는 정복왕의 모습 을 확인한서준은 팔을 내뻗어 등 위에 얹는다.
등과 맞닿아 있는 팔에 주변을 떠다니고 있던 황금빛 기운을 조심 스레 불어넣었다.
손바닥에서부터 시작된 금빛 물 결은 삽시간에 정복왕의 체내로 퍼
져나간다.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금빛 파 도.
어느덧, 정복왕의 두 눈에는 크 나큰 당황이 어려 있었다.
허나 모든 신경을 내력의 운용에 쏟고 있는 서준은 그 변화를 눈치 채지 못했다.
‘한시도 마음을 놓아서는 안 돼.’
드디어 정복왕에게 받았던 은혜 를 갚을 기회가 왔다.
‘실패 따위는 없어.’
굳은 마음가짐으로 육도소생신공
을 펼쳐내자, 황금빛 물결들도 그 의지를 받들어 체내를 빠르게 타고 이동한다.
얼마 가지 않아서, 황금빛 기운 은 무사히 체내를 갉아먹고 있는 공허의 힘과 마주한다.
두렵고 강대한 힘이었지만 움츠 러들 필요 없었다.
‘결국 모두 혼돈에서 파생된 힘.’
혼돈을 마주했었고 다뤄봤다면 두려워할 것이 없었다.
서준은 세심하게 황금빛 기운을 움직여 공허의 힘이 퍼져있는 부위 를 조심스럽게 휘감아낸다.
작은 세포들 하나하나 놓치지 않 고 완벽하게 감싸 안아 낸다.
공허의 힘에 갉아먹히던 육신들 이 빠른 속도로 메꿔지며, 안정을 찾아간다.
‘좋았어.’
성공적인 치료에 자연스레 서준 에 입가에 환한 미소가 흐르고 있 던 순간이었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