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권 16화
366화
“그건 아닌 것 같네요.”
애초에서준은 단순히 서연과 정 복왕의 상태를 확인하고, 라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내우주로 넘어온 것이 아니었다.
바라던 궁극적인 목표는 고대의 존재들을 모두 영멸시키는 것이었다.
심지어 전쟁에서 완벽한 승리를 거둔 것이 아니었다.
“일시적 퇴각일 뿐이에요, 언제 든지 다시 침공을 해올 거예요.”
훗날을 위해서 적의 전력을 최대 한 줄여둬야 한다.
“기회를 틈타서 최대한 제거해둬 야 합니다.”
단호한서준의 말에 라의 얼굴에 그늘이 진다.
“나도 마음 같아서는 놈들을 추 격하고 싶네만 지금 내우주는 전쟁 으로 큰 피해를 입었고 누군가는 그를 수습해야 하네……
당장 오벨리스크 차원은 크게 문 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허나 고대의 존재와 전쟁을 벌인 것은 오벨리스크뿐만이 아니었다.
많은 내우주의 차원들이 고대의 존재들과 전쟁을 벌였다.
그중에는 라, 케메트 신화와 손 을 잡은 연합도 존재했다.
“한배를 타기로 한 이상 그들의 곤경을 방치할 수는 없네.”
계속되는 라의 말들에서준이 천 천히 고개를 주억인다.
“현명한 판단이시네요.”
라가 아무런 생각, 이유 없이 무 작정 호의를 베푸는 것이 아니었다.
앞서 말했다시피 고대의 존재들 은 언제든지 다시 침공해올 수 있었다.
그 순간을 위해서라도 내우주의 힘을 규합해놓을 필요가 있었다.
당연하지만, 평온한 일상보다는 극적인 상황에서 도움을 주는 것이 더욱더 고마움이 와닿는 법이다.
지금처럼 전쟁의 여파로 인하여 모두가 힘겨워하고 있을 때가, 세 력을 규합하기에 가장 적합한 때라 는 것이다.
머지않아서 세 개의 세력으로 나 뉘어져 있던 내우주의 힘이 하나로
결속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대신이라고 하기는 그렇지 만……. 고대의 존재들의 퇴각 경 로에 대한 자료들을 모두 넘겨주겠 네.”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해요.”
라와의 대화를 끝낸 서준은 자연 스럽게 고개를 돌리어 앉아있는 서 연을 응시한다.
“너는 어떻게 할 거야?”
“나도 추격은 힘들 것 같아.”
“ 너도?”
예상외의 대답에 눈이 휘둥그레
진 서준의 입에서 반문이 흘러나온 다.
“아까부터 정복왕 님의 기운이 느껴지고 있어, 마치 나를 부르는 것 같은 느낌이야.”
단순한 감은 아니었다.
정복왕의 사도가 된 만큼 누구보 다도 그녀의 감정을 정확하게 이해 하고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혼자가도 괜찮겠어?”
미소 짓고 있는 서연의 얼굴에는 강한 자신감이 비친다.
“걱정할 필요 없는 거 알잖아.”
당연한 반응이었다.
정복왕의 사도로서 공허의 힘을 다루게 된 만큼 지금 서연을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손에 꼽힐 정도로 적었다.
완전히 걱정이 되지 않는다면 거 짓말이었지만, 그렇다고 괜한 걱정 을 사서 할 필요는 없었다.
“어쩌다 보니 각자 목적지가 갈 라지게 됐군.”
“그래도 전부 내우주, 이 은하를 지키기 위한 일들을 하려는 거잖아 요.”
퇴각하는 고대의 존재들 추격 및
섬멸, 내우주의 규합, 정복왕의 안 위 확인.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일 이 없었다.
“다들 바삐 움직이는 것은 좋지 만 안전이 최우선인 것은 잊지 말 죠.”
“우리보다는 오빠가 제일 걱정되 는 거 알고 있지?”
서준의 힘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 었다.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도 강하다 고 말할 수 있었다.
허나 고대의 존재들을 추격하는
것은 그들 모두와 싸움을 벌이겠다 는 것이다.
동료 혹은 가족으로서 걱정이 되 지 않을 수가 없었다.
“퇴각하는 이들을 섬멸하지 못한 다고 자네를 탓할 일은 없으니 무 리하지 말게.”
“걱정 감사합니다.”
라의 말에 고개를 주억인 서준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모두 할 일을 끝내고 지금처럼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요.”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오빠 몸이 나간수잘 해.”
“무운을 빌겠네.”
걱정 어린 배웅을 받은 서준은 곧장 하늘에 떠 있는 리벨리온 연 합군의 우주선으로 걸음을 옮겼다.
약 보름 뒤.
퇴각하고 있던 고대의 존재들을 추격하던 리벨리온 연합군은 외우 주로 나가기 위한 문의 근처에 당
도했다.
어둠뿐인 우주 속에 고고히 서있 는 백색의 문을 멀리서 바라본 서준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강제성 없이 외우주로 나가기 위한 유일한 출구.’
라가 넘겨준 정보를 통해 알아낸 것이다.
고대의 존재들이 제아무리 강하 다 할지라도 자그마치 스물에 달하 는 이들이 한 번에 넘어갈 균열을 일으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설치된 문을 넘어서야 한
다.
고대의 존재들은 반드시 이곳에 당도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곧장 문을 점거 하고 싶은데……
서준은 말없이 고개를 돌리어 문 의 주변에 자리 잡은 행성을 확인 했다.
‘카세롯 차원이라 했나.’
수 세기 동안 외우주로 통하는 문을 지켜 온 행성.
다급히 달려온 만큼, 라 혹은 정 복왕의 친위대들을 통해 제대로 된 협조를 구하지 못한 채 당도해버렸 다.
압도적인 무력으로 행성을 점거 혹은 파괴할 수 있다고는 하나 괜 한 적을 만들어서 좋을 것은 없었다.
‘가능하다면 남은 내우주의 세력 을 모두 규합하는 게 좋으니까
여간 귀찮은 일이 되겠지만, 지 금의 선택은 어쩔 수 없다.
최악의 경우 카세롯 행성이 자멸 을 택함으로써 문이 닫혀버릴 수도 있었다.
당연하지만, 문이 사라지게 된다 면 고대의 존재들은 다른 방식으로
내우주를 탈출하려 할 것이다.
움직임을 예상할 수 없게 되는 만큼 추격을 하는 서준의 입장에서 골치가 아파질 수밖에 없었다.
‘협조를 구하고 움직여야 해.’
서준은 다급한 마음을 억누르며, 홀로 카세롯 차원에 접촉하기로 결 정했다.
당연히 나라연천을 비롯한 리벨 리온 연합군들이 난리가 나긴 했었다.
괜한 분쟁을 만들고 싶지 않다는 점과 그 연유에 대해서 말하자 모 두들 한발 물러섰다.
덕분에 홀로 카세롯 차원에 안착 했지만, 막상 서준이 맞닥뜨린 상 황은 다소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무결의 주신?”
카세롯 차원의 중심지를 지키고 있던, 수호자 뇌제는 눈을 가늘게 뜨며 서준을 바라본다.
두 눈빛에 담긴 감정은 두말할 것도 없이 불신과 불쾌였다.
그때가 되어서야 서준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이들의 입장에서는 그리 반갑지 않겠네.’
고대 존재들의 침공이 시작될 당 시, 주신의 자리에 올랐던 서준은 갑작스레 자취를 감추었다.
여러 가지 사정이 있긴 했지만, 계속되는 전쟁으로 피폐해져가던 내우주에 위치한 차원들의 입장에서는 서준을 좋게 봐줄 리가 없었다.
‘과거의 업적들을 생각해서라도 넘어가주면 좋겠지만……
애초에 고대의 존재가 무서워서 도망을 쳤다고 생각하고 있는 의심 을 받을 법한 상황에서 과거의 업 적들을 인정해줄 리가 없었다.
실제로도 차원의 중심지를 지키 고 있던 수호대들의 분위기는 실시 간으로 삼엄해지기만 했다.
그 분위기를 읽은 서준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했다.
‘무력으로 밀어붙었어야 했나?’
서준은 얼마 가지 않아서, 고개 를 내젓는다.
고대의 존재라는 공통의 적을 두 고 내전을 벌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사이 마음속으로 결론을 내린 듯한 뇌제가 다소 고압적인 어조를 통해 말했다.
“자세한 조사가 필요할 것 같습 니다만……. 동행해주실 수 있으시 겠습니까?”
“ 하아.....♦
결국 서준은 양손을 위로 들어 올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본 뇌제가 고개를 끄 덕이자 다소 안도감 섞인 표정의 수호대가 재빠르게 다가와 서준의 주변을 둘러싼다.
‘오벨리스크 차원 쪽에 연락을 취하면 어떻게든 오해야 풀리겠지 만…… 이거 참 귀찮게 됐군.’
당장 쓸데없는 곳에 시간을 허비
해서는 안 되었다.
곧 당도할 고대의 존재들과 싸움 을 대비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계속해서 무력을 사용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했지만 역시 아무리 생각해봐도 분쟁을 만들어 서는 안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케메트 차 원에서신을 보내는 여유를 부릴 생각은 없었다.
“순순히 따르긴 할 텐데 무결의 주신으로서 당당히 요청할게, 나는 너희들, 카세롯 차원의 신과 대화 를 하고 싶어.”
뻔뻔한 요청이라 볼 수 있었지만 무시할 수 없었다.
상대는 자그마치 주신이었다.
무력 충돌이 일어나면 카세롯도 멸망을 염두에 두어야 했다.
결국 뇌제는 마지못해 고개를 주 억인다.
“……모시겠습니다.”
“포박 안 해도 돼?”
“의미가 없겠지요.”
“똑똑하네.”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주억인 서준은 앞장선 수호대들의 뒤를 순
순히 따라 걸었다.
서준이 수호대를 따라서 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
차원 카세롯의 신이자 뇌신이라 고 불리는 솔릭은 화려한 만찬이 자리 잡은 식탁에 앉아, 환한 미소 를 흘리고 있었다.
“변변치 않은 저희 카세롯 차원
에 이토록 소중한 기회를 내어 주 시다니, 제가 몸 둘 바를 모르겠군 요.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드립니 다.”
그런 솔릭의 건너편에 앉은, 검 은 로브를 뒤집어 쓴 위대한 현신 (賢神)이라 불리는 하비르가 수염 을 쓰다듬으며 비릿한 미소를 흘린 다.
“나도 자네 덕분에 고대의 존재 님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게 되었 으니 감사는 내가 드려야 할 일 아 니겠나.”
무너져가는 내우주를 배신하고 고대의 존재와 한배를 타게 되는
데 성공한 솔릭의 표정에 미소는 만개한 꽃처럼 더욱더 활짝 퍼져갔 다.
‘변방의 문이나 지키다 허무하게 최후를 맞이할 줄 알았는데. 이런 행운이 찾아오다니.’
곳곳에 일어나고 있는 전쟁으로 인하여 정확하게 무슨 일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고대의 존재가 갑작 스레 외우주로 향하는 문을 열어달 라고 부탁을 해왔다.
이렇게 친분을 쌓아놓고, 부탁을 들어주는 것으로 공로를 인정받게 된다면 고대의 존재들이 내리는 파 멸을 피해낼 수도 있게 될 것이다.
그렇게 아무것도 남지 않은 우주 에서 신으로 강림하고 있다 보면 자연스레 주신의 자리에 오를 수 있게 될 것이다.
아니, 운이 좋다면 고대의 존재 들의 사도가 될 수도 있었다.
“설마 이런 식으로 파멸을 피할 수 있게 될 줄이야. 너무나도 기쁜 날이군요, 요청만 해주신다면 10번 아니 100번도 문을 열어 드릴 테니 마음껏 요청 부탁드립니다.”
“이번 한 번뿐일세, 자네도 알고 있다시피 사실 고대의 존재님들은 굳이 문을 드나들 필요가 없지 않
나, 그저 이번이 특별한 상황이라 부탁하는 것뿐이네.”
계속해서 도움을 받을 생각은 없 다.
하비르의 단호한 거절에 솔릭은 아쉬움을 느끼면서도 고개를 슬며 시 끄덕였다.
“압도적인 힘으로 직접 문을 열 어내실 수 있으니 당연한 일이겠지 요, 저도 그저 혹시나 특별한 상황 이 또다시 생길까 싶어서 말씀을 드렸을 뿐입니다.”
“마음은 잘 알겠네만, 지금은 감 사한 마음만 받도록 하지.”
솔릭과 하비르의 협상이 그렇게 무난히 이어져가고 있을 때였다.
조심스럽게 다가온 수호대 소속 의 병사 하나가 고개를 숙이고는 솔릭에게로 다가갔다.
“회담이 있으니 방해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죄송합니다, 중요한 일이라 꼭 말씀드리라는 뇌제 님의 명이 있었 습니다……
오랫동안 충성을 보여 온 수하인 뇌제가 아무런 이유 없이 명령을 어겼을 리가 없었다.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뇌신은 마
지못해 고개를 주억였다.
그때가 되어서야 병사는 고개를 숙인 후 조용히 솔릭의 귓가에 속 삭였다.
“무결의 주신인 한서준이 뇌신 님을 만나 뵙고 싶다고 합니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