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권 11화
361 화
왕좌 위에 몸을 기댄 채로 붉은 피를 토해낸 케메트의 주신, 라의 입가에는 씁쓸한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이 상태로라면 내일이 마지막이 겠군……
차원, 오벨리스크의 하늘에는 셀 수 없을 정도의 회색빛 균열이 일 어나 있었다.
하나하나가 모두 혼돈과 연결된
게이트다.
오벨리스크 차원은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정신이 미쳐버릴 것 같은 혼돈이 들끓고 있었는데, 며칠 전 부터 고대의 존재들과 그를 따르는 군세들의 공세가 상당히 거칠어졌 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해 서 전진을 해오고 있었다.
덕분에 적지 않은 피해를 줄 수 있었지만, 케메트 신화체 또한 상 당한 피해를 입은 상황이었다.
“슈, 테프누트, 하토르까지 주요 전력들이 있었다면 조금 더 버텨낼
수 있었을 겁니다.”
“세트, 너는 내 선택에 불만이 많은 것 같군.”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허나 오랜 세월 세트의 성격을 봐온 만큼 그의 심정을 쉽게 짐작 이 갔다.
비단 세트뿐만이 아니었다.
케메트 신화체의 주축을 담당하 는 대다수의 신들과 연합을 구축하 고 있는 타 신화체들 또한 지금 라 의 선택을 납득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한 것이었다.
고대의 존재들의 공세가 날로 거 세져 가고 있었다.
그런데 주요 전력이라 할 수 있 는 신격 셋을 외우주로 보낸 것도 모자라 라, 본인의 불꽃마저 소모 를 했다.
심지어 대의(大義)를 위한 것이 나 고대의 존재들에게 타격을 입히 기 위한 행동도 아니었다.
그저 단 한 존재, 사람인 한서준 에게 투자를 한 것이었다.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 당연하겠 지.’
무결의 주신으로 칭송받고 있긴
하나, 아직 내우주에서 서준의 이 름은 그리 드높다고 볼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부정적이라는 편이 옳은 표현이었다.
실제로도 내우주의 신격들에게 그저 운이 좋아서, 주변의 도움을 받아 주신의 자리에 오른 풋내기라 는 말이 나돌고 있었다.
허나 직접 주신의 자리에 오른 라는 진실을 알고 있었다.
‘주신의 자리는 단순히 운으로써 오를 수 없다.’
준비된 자에게만 기회가 주어지 는 것이다.
서준이 힘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 지 않았었다면 결단코 주신의 자리 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심지어 서준은 주신의 자리에 오 른 이후로도 끊임없이 성장을 하고 있었다.
투자할 가치는 차고 넘쳤다.
아니, 애초에 선택의 여지가 없 었다.
정복왕이 침묵에 잠긴 지금, 고 대의 존재들로부터 케메트 신화를 구할 존재는 한서준뿐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한 것
속내로 코웃음을 친 라는 세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걱정할 거 없다, 한서준은 반드 시 고대의 존재들을 뚫고 우리 케 메트 신화체를 구하러 올 것이다.”
“……라님의 통찰을 부정하는 것 은 아닙니다, 제가 보기에도 한서준은 분명히 뛰어난 주신입니다, 허나 저희에게는 그만한 시간이 없 습니다.”
고대의 존재들이 수많은 방어진 들을 뚫고 차원, 오벨리스크의 멸 망이 눈앞에 있었다.
턱밑까지 죽음이 찾아온 것이다.
아무리 라를 숭배하고 있다 할지 라도 이런 상황에서 절대적인 믿음 을 보이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 당 연한 것이었다.
“내가 아무런 생각 없이 걱정을 하지 말라 할 것 같으냐?”
세트를 바라보고 있던, 라가 자 신감 있는 미소를 지은 채로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다른 방법이 있으신 겁니까?”
“며칠 전, 외우주의 존재들이 내 우주로 들어섰다.”
“외우주에서요……?”
“그 속에는 강대한 기운을 가진 존재도 있었지, 주신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말이야.”
“외우주의 주신......
“고대의 존재들이 오벨리스크 주 변에서 방해를 하고 있어 존재감이 희미했지만 자네도 확실히 느꼈을 텐데?”
“며칠 전에 터져 나왔던 그 광채 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자네도 봤었군, 아마 지금쯤 오 벨리스크를 향해 오고 있을 것이 네.”
“한서준을 믿으시는 겁니까?”
먼저 서준에게 도움을 주었다지 만, 그가 케메트 신화체를 도우러 와줄지도 의문이었다.
고대의 존재들은 주신들에게 위 협적인 존재다.
제 몸 하나를 건사하기 위해서 어디론가 숨어버리거나 그들의 밑 에 들어가 충성을 맹세할 수도 있었다.
수많은 변수들이 존재했다.
“내가 지켜봐왔던 한서준이라는 친구는 절대 동료를 버리지 않아.”
“아니, 애초에 헛된 희망을 품고 계신 겁니다, 본래 주신이 넘어온
다면 훨씬 더 큰 소란이 일어났을 겁니다.”
큰 정도가 아니다.
신격의 기준점으로 보자면 우주 가 뒤흔들릴 정도로 거대한 직감이 일어난다.
“무슨 뜻인지 아네, 이런 거를 말하는 거 아닌가?”
자신감에 가득 찬 라가 미소를 피어내고 있던 순간이었다.
쿠궁-!
갑작스럽게 대기를 울리는 충격 과 함께 오벨리스크 차원 전체의 하늘에 찬란한 섬광이 터져 나온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 모습을 확인한 라가 너털웃음을 흘리며 말 했다.
“다행히 늦지는 않았군.”
상대가 이렇게까지 가까이 다가 올 때까지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 했다.
아무리 고대의 존재들이 훼방을 놓고 있다지만, 저토록 거대한 우 주선이 나타난 것을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라의 눈에는 확연히 보였다.
거대한 우주선이 지금 우주에서 오벨리스크 위를 덮고 있다.
난생처음 보는 우주선이었지만 누구의 것인지 쉽사리 짐작할 수 있었다.
‘리벨리온이라 했나……
한서준이 만든 외우주의 연합.
케메트 신화체를 도울 수 있는 구원군이 오벨리스크에 당도한 것 이었다.
갑작스러운 우주선의 등장에 고 대의 존재들의 공세를 막아낸 이후 휴식을 취하고 있던 신격들이 병장 기를 집어 들며 방어에 나서려 한 다.
오벨리스크 차원 전체를 덮은 듯
한 거대한 우주선이 갑작스럽게 등 장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걱정하지 마, 너희들을 도우러 온 거니까.]
우주선에서 흘러나온 음성에 이 어서 라도 고개를 주억이며 일제히 달려들려던 신격들을 물려냈다.
실제로도 우주선의 내부에서 익 숙한 얼굴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내 고 있었다.
“한서준.”
라의 말을 들은 서준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난다.
“적당한 때에 온 것 같네.”
“하루만 더 넘겼어도 버티지 못 했을 걸세.”
“그래서 일찍 왔잖아요. 이제는 반격을 할 때죠.”
“조금만 더 기다려주게, 아직 도 착하지 못한 연합군이 있어서 말이 야……
“저 말고도 또 도움을 주러올 곳 이 있나요?”
“기억력이 이렇게 좋지 않아서 야, 과거에 연합을 한 것은 둘이 아닌 셋이었네.”
라의 말에서준의 눈이 휘둥그레 진다.
“정복왕?!”
“그녀가 직접 오는 것은 아니 네.”
“그럼 누가 온다는 거죠?”
피식 웃은 라가 허공을 바라보며 입을 열고 있던 순간이었다.
파지직-!
허공에서 회색빛 균열이 일어나 며 익숙한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서연이?”
“ 오빠?”
“마음 같아서는 대화를 통해서 둘에게 현재의 상황을 설명해주고
싶은데……
서로를 보며 당황스러움을 감추 지 못하고 있는 남매를 보며 라가 뒷머리를 긁적인다.
“저기 있는 빌어먹을 것들이 그 럴 만한 여유를 주지 않는군.”
라가 말을 끝맺는 순간이었다.
하늘에 떠 있던 회색빛 균열로부 터 무언가가 우르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를 바라보고 있던 라가 조심스 레 입을 열었다.
“혼돈의 아귀들일세.”
너머, 혼돈의 세상 속에 존재하 는 괴물.
무엇이든 집어삼키고 혼돈으로 만들어버리는 끔찍한 괴물이었다.
허나 혼돈의 힘을 다뤄낼 수 있 는 입장에서 보자면 전혀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날파리 떼 같네.”
“바퀴벌레 떼 같은데?”
실제로도 서준과 서연, 두 남매 의 입에서는 여유로운 말들이 홀러 나오고 있었다.
물론, 다른 신격들의 입장은 달
랐다.
혼돈에서 태어난 괴물들이 끊임 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 숫자가 얼마나 많은지 지구만 한 크기를 가진 차원, 오벨리스크 의 상공을 다 뒤덮다 못해 넘칠 정 도였다.
정확한 숫자는 감히 추측조차 할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적의를 가진 혼돈의 아귀들이 갑작스럽게 오벨리스크의 상공 전체를 뒤덮었다는 것이다.
케메트의 신격들은 그 혼돈의 아 귀들을 보며 아랫입술을 질끈- 깨
문다.
누군가는 결의에 찬 표정으로 손 에 잡고 있던 병장기를 꽈악- 말아 쥔다.
결의를 다지고 있는 신격들이 자 아내는 풍경은, 마치 영멸을 맞이 할 준비가 된 것 같았다.
“내가 처리할게.”
주변의 굳은 결의와 상관없이, 천천히 허공으로 날아오른 서준이 말했다.
사실상 혼돈을 다룰 수 있는 존재의 입장에서는, 같은 혼돈의 힘 에서 파생되었다면 숫자가 얼마나
많든 무의미하다.
오직 압도적인 힘과 제어력으로 모두 제거해낼 수 있었다.
서준의 자신감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번에는 내가 해도 될까?”
그런 서준을 가로막은 것은 서연 이었다.
“네가 한다고?”
구태여 입 아프게 설명하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
직접 보여주는 것이 빨랐다.
검은 두 눈동자에 회색빛이 살짝
어리기 시작하더니 서연이 손바닥 을 넓게 펼친다.
이어서 서연이 손가락을 튕기는 순간, 허공으로 회색빛 기류가 흘 러나오며 오벨리스크 상공 전체를 뒤덮을 듯 펼쳐진다.
서연은 그 회색빛 기류를 무심히 바라보며 반대쪽 손을 내뻗었다.
“소멸해라.”
뒤이어, 정복왕에게 하사받은 공 허의 힘을 담아내며 주먹을 움켜쥐 는 순간이었다.
거대한 회색빛 기류로부터 쏟아 져 나온 힘이 차원, 오벨리스크의
상공을 뒤덮고는 집어삼켜 버린다.
순식간이었다.
차원, 오벨리스크의 하늘을 뒤덮 고 덮쳐오던, 무수히 많은 혼돈의 아귀들이 한순간에 접히는 공간을 빠져 나가지 못하고, 흔적조차 남 기지 못한 채 사라져 버렸다.
“혼돈의 힘에……. 공허의 힘이 더해졌다니 설마 너 정복왕의 사도 가 된 거야?”
놀란 서준이 감탄을 토하며 서연 을 바라보았다.
사실 같은 피가 흐르고 있다는 점올 생각해보면 단순히 혼돈의 힘
을 다루는 것만으로는 그리 놀랍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서연이 그런 혼돈의 힘에 정복왕이 다루던 공허를 더해 냈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 힘을 다루는 능력이 제법 능숙하다.
“어쩌다 보니까.”
물어볼 것이 더 늘어났다.
허나 앞서 라가 말했다시피 아직 은 때가 아니었다.
결과가 생각했던 것만큼 좋지는 못했다.
“실패한 거야?”
수억에 달하는 혼돈의 아귀들이 소멸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본래 서연의 공격 목표라 할 수 있는 회색빛 균열, 게이트는 아무런 미동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단단해.”
서준의 질문에, 불쾌한 표정의 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라와 서준의 시선이 자 연스레 회색빛 균열을 향한다.
“어떠한 반발이나 기운의 움직임 은 느껴지지 않았는데 말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연의 힘을 아무렇지 않게 흡수해 버렸다.
“아마 고대의 존재가 가진 힘이 겠지.”
두려움을 느낄 필요는 없었다.
주신이 자그마치 둘, 거기에 더 불어 정복왕의 사도가 되어 돌아온 서연까지.
전력은 차고 넘치는 상황이다.
“ 흐음......
가까이 다가가서 확인해보면 그 만이었다.
이미 허공으로 떠올라 있던 서준
을 필두로 자연스럽게 하늘로 날아 오른 라와 서연이 속도를 높여 대 기권을 빠르게 벗어나고 있던 순간 이었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