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권 7화
357화
“분명 영체(靈體)가 아니라 본체 (本體)였고 공격이 적중당했는데도 죽지 않는다라……
서준은 계속되는 글룬의 조롱 섞 인 말에도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본인의 생각을 정리할 뿐이 다.
글룬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계속 무의미한 생각을 이어가는
군, 어리석고 하찮은 것의 천성은 숨길 수 없는 것인가.”
서준의 시선이 글룬을 노려보았다.
“그만 포기하거라.”
“너희가 먼저 부질없는 파멸의 행위들을 그만둔다면 생각 정도는 해볼게.”
드디어 물었다.
그리 생각한 글룬의 입가에 어린 미소가 짙어졌다.
“마치 은하의 주인이라도 된 것
마냥 떠들고 있군, 애초에 이 은하 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평화와 안정으로 포장 된 수천 년 동안 우주의 상황은 어 떠했는지 알고 지껄이는 것이냐?”
서준은 오랜 과거의 우주를 알지 못한다.
내우주에 진입하기도 전, 이미 수많은 시간이 흐른 뒤였으니 말이 다.
과거의 기억은, 그저 구전(日傳) 으로 들어왔을 뿐이다.
“계속되는 번식으로 인해 자원은 빠른 속도로 줄어들었고 수많은 차
원이 스스로 멸망을 맞이했지, 심 지어 때로는 포장된 평화가 무너지 며 분란이 일어나기도 했지 그렇게 자식과 같은 행성들이 사라지는 은 하의 마음은 어떠했을 것 같으냐?”
글룬이 끌끌거리는 웃음을 토했 다.
“우린 파멸을 부르는 게 아니다, 그저 순리대로 흐를 뿐이지. 정말 우리가 단순한 파멸이라면 우주에 사는 생명체들이 그런 불합리함을 그냥 방치만 해둘 것이라 생각하느 냐?”
이상하다.
맞는 말이다.
“우주는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 으로 넓다, 무수히 많은 강자들이 존재한다는 말일세.”
글룬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흐 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막고 있지 않지, 이유는 간단하네. 파멸 을 우주가 바라고 있기 때문이지.”
“무결의 주신이여, 그대는 진정 으로 이 은하가 바라는 길이자, 우 주의 순리를 거부하려는 거냐?”
이어지는 음성이 끈적거리듯 서준의 뇌리를 파고든다.
붉어진 눈의 서준은, 아무런 답 도 없이 그런 글룬을 바라본다.
“순리를 받아들여라, 어차피 우 리를 막거나 해결할 수는 방법 따 위는 없으니 말이야.”
서준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인 다.
글룬의 입가에 그려진 미소는 더 욱 짙어졌다.
“만약 나와 함께한다면 그대의 목숨 정도는 보장해줄 수 있네, 그 저 순리를 행할 뿐이라 잔인해 보
일 뿐이지 우리는 생각보다도 더 인간에게 호의적이라네.”
글룬이 팔을 앞으로 내민다.
붙잡게 되면 썩어버리게 되는 부 패의 손.
그를 본 서준이 코웃음을 쳤다.
“혹시 혓바닥이 긴 놈치고는 사 기꾼이 아닌 놈이 없다는 거 알 아‘?”
“어리석군, 순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부하려 하는 건가?”
“정말로 행성들이 사라지는 걸 은하가 가슴 아파 할 수도 있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희들이 그
저 순리를 위해서만 파멸을 행한다 고 묻는다면 당연히 아니지.”
“말도 안 되는 억지군, 우리가 무차별적으로 파멸을 행하는 것을 직접 본 적이 있느냐?”
글룬이 느긋한 음성을 흘렸다.
“우리는 때와 시간이 되었을 때 만 움직이지, 은하가 바라는 순간 에만 움직인다는 거지, 이를 반박 할 수 있나?”
서준의 입가에 그려진 미소는 더 욱 짙어졌다.
“부패한 바닷속 신전의 주인, 글 루 ”
그 이름을 읊자, 글룬의 몸이 흠 칫 떨린다.
‘애초에 부패를 뜻하는 것은 무 수히 많아.’
처음에는 눈앞에 보이는 현상에 만 집중을 했기에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대화가 이어질수록 ‘부패’ 를 뜻하는 다른 의미가 떠올랐다.
아니, 애초에서준은 글룬을 믿 을 생각이 없었다.
“스스로마저 속일 수 있을 정도 로, 마음마저 썩어버린 존재.”
“음……, 어리석군, 너무 어리석
어. 무결이라는 신격을 얻었다고는 믿지 못할 정도……
서준은 눈앞에서 떠드는 글룬을 단숨에 베어낸다.
그리고 계속해서 다시 한번 글룬 의 형상을 취하고 있는 바닷물의 형상을 확인한다.
모든 것을 부패하게 만들 것 같 은 검은 바닷물의 모습은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허나 그 모습을 확인하고 있는 서준의 입가에는 환한 미소가 피어 난다.
“예상이 맞았네……
고개를 주억인 서준은 곧장 무결 의 장막을 둘러낸다.
후웅-!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황금 빛 기운을 두른 서준이 일대에 퍼 져있는 바닷물들을 베어내기 시작 한다.
쿠구구궁-!
뒤이어, 지진이 일어나는 것 같 은 굉음과 함께 바닷물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콰과광-!
폭음과 함께 세상이 뒤흔들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세계가 뒤집 히는 느낌이었다.
휘릭-!
눈을 감은 채로도 정신이 도는 것만 같았다.
서준은 눈을 감은 채, 기운을 퍼 트렸다.
요동치는 해일이 계속해서 서준 의 기운을 막아서고, 부패시켜버린 다.
상관없었다.
눈을 뜨고 있는, 서준의 시선 끝
에는 찢어진 균열, 게이트 너머 신 전이 있다.
‘시작점은 분명해.’
무결의 기운을 두른 서준은 망설 임 없이 요동치고 있는 파도를 가 르며 빛 한 점 들지 않는 심연의 신전으로 향한다.
콰과과광-!
뒤이어, 폭음이 연이어 들려왔고,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중격이 곳곳에서 느껴졌다.
“어리석은 것, 스스로 분을 못 이겨 또다시 아무런 죄 없는 행성 을 파괴하려는 거냐?”
글룬의 노기 어린 음성이 들려왔 다.
하나 서준은 이번에도 아무런 답 을 하지 않았다.
신전을 부숴내며 기운의 시작점 을 좇았다.
아니, 반드시 좇아야 했다.
인식하지 못했지만 글룬의 부패 는 처음 마주할 때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스스로를 속일 정도로 마음을 부 패시킨 것에서 알 수 있다시피, 글 룬이 부패시키는 것은 비단 물리적 인 것뿐만이 아니었다.
마음 혹은 정신마저도 부패시켜 낼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마주하고 있는 세계 는 부패한 정신이 만든 가상의 세 계였다.
애초에 개연성이 역전된 공격에 적중당하고도 아무런 상처 없는 존재가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렇기에서준은 그저 베어내고, 또 베어냈다.
쩡-!
그 끝, 세계가 깨어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서준의 머릿속에 하나의 음성이 짜릿하게 울려 퍼졌다.
띵-!
[고대의 힘, 정신 부패를 파훼해 냅니다.]
[정신력 스탯이 생성됩니다.]
콰광-!
마지막 폭음을 들으며 눈을 뜬 서준의 주변에는 여전히 부패한 세 계가 보인다.
다른 점이 있다면, 거대한 신전
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동시에 신전이 뿜어내는 회색빛 물이 서준의 턱밑까지 차오르고 있 다는 점이었다.
위협을 느낀, 서준은 다급하게 자리를 박차고 허공으로 날아오른 다.
“……생각보다는 뛰어나군.”
음성은 회색빛 물의 중심지에 있 는 거대한 신전 위, 회색빛 눈동자 에서부터 홀러나온다.
다소 놀라고 당황한 듯한 음색.
서준은 코웃음을 쳤다.
“이제부턴 더 놀라게 될 거야.”
“주신의 힘은 은하 내에서 손꼽 힐 정도로 강력하지, 하지만……. 결국 드넓은 우주에서는 흔하디흔 한 존재일 뿐이지, 고대의 힘을 다 루는 나에게 대항할 수 있을 것이 라 생각하느냐?”
글룬은 그를 기다렸다는 듯, 침 착한 음성을 홀린다.
회색빛 물이 허공으로 치솟아 오 르며 반인반수의 형태를 한 글룬을 잔뜩 만들어 낸다.
그들은 하나같이 비슷한 웃음을 지으며 회색빛, 부패의 힘을 발산
한다.
회색빛 눈동자가 미소 짓듯 휘어 졌다.
“아무리 강한 힘도 부패해버린다 면 의미가 없지.”
이어진 음성에서준은 코웃음을 쳤다.
“너 뭔가 잊고 있는 것 아니야?”
무결검, 역전.
이 검술은 분명 매우 강력했다.
공격을 내뻗기도 전 결과가 정해 진다.
말도 안 되는 능력을 가진 검술
은 서준의 입장에서도 상당히 훌륭 한 검법이었다.
하나 그렇다고 하여 검술이 완성 (完成)에 이르렀다고는 말할 수 없 었다.
‘특수효과, 무결의 힘 발동.’
쿠구구-!
서준이 바라보는 세계가 변화하 기 시작한다.
동시에, 대기가 떨리며 지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폭발할 듯 솟아나는 기운을 가벼 이 갈무리한서준이 온몸에 힘을 주었다.
5초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조 바심을 낼 필요는 없었다.
선명하게 보인다.
지금의 서준은, 무극의 영역에 발을 들일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통제할 수 있다.
그간, 여유가 될 때마다 옥황의 대권능이 깃든 방 안에서 끊임없이 수련을 해온 효과가 확실히 적용되 고 있었다.
“네놈 그 힘은…… 그렇군, 총애 인가. 하나 통제할 수 없는 힘은 결국 기만당할 뿐이지.”
파지직-!
회색빛 눈동자로부터 .흘러나온 부패의 힘이 서준의 머리 위로 쏟 아져 내렸다.
완전무결에 도달한 힘이 마구잡 이로 어지럽혀지며 폭발할 듯 날뛰 려 한다.
하나 이번에도 서준은 억눌렀다.
그리고, 뛰쳐나갔다.
갑작스런 이동에 눈동자가 놀란 기색을 보인다.
서준은 내지르던 엑스칼리버를 멈추고는 말했다.
“멍청하긴, 또 당해 줄 거라고 생각한 거야?”
회색빛 눈동자 바로 앞, 쇄도해 오는 공격을 피해 멈춰 선 서준의 양손이 거대한 신전을 향했다.
“무결검.”
후웅-!
거대한 기운이 소용돌이치며 뻗 어나간다.
“어차피 닿을 수 없다고 했거 느 ”
여기 보이는 모든 분신체, 회색 빛 물, 거대한 신전까지 모두 고대
의 존재인 글룬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 본체라 부를 만한 글룬은 존재하지 않는다.
애초에 글룬은 하나의 생명체나 상징이 아니었다.
코웃음을 친 글룬이 여유를 보이 고 있을 때였다.
“아니, 닿게 될 거야.”
무극이라 부르는 영역에 도달한 뒤로 문득 들었던 생각이다.
모두 어려워하고, 불가능한 영역 이라 부르고 있었지만 쉽게 풀어서 말하자면 단순한 ‘직관’이라 볼 수
있었다.
서준의 칼날은 글룬의 본체의 심 장을 꿰뚫는다.
아니, 서준의 칼날은 글룬의 머 리통을 관통한다.
이 외로도 무수히 많은 가능성들 이 스쳐 지나간다.
가능성들은 저마다 다르다.
그저 크고작은 것들이 존재한 다.
이 중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서준은 이 가능성들을 현실로 바 꿔낼 능력이 있었다.
‘ 역전.’
개연성이 역전된다.
단순히 가능성으로만 존재했던 것이 현실으로 변한다.
서준은 찬란한 황금빛 기운이 보 여주는 검로(劍路)를 향해, 망설임 없이 엑스칼리버를 내뻗는다.
마침내 금빛의 검날이 글룬의 가 슴을 베며 지나갔다.
비록 깊은 상처는 아니었지만, 확실하게 닿았다.
껍데기뿐인 분신들이 아니었다.
너머에 몸을 숨기고 있는 글룬의 영체를 베어냈다.
실제로도 글룬의 모습을 한 분신 체들의 두 눈동자에는 숨길 수 없 는 동요가 퍼져나간다.
“ 네놈......!”
계속되는 부패의 힘이 서준을 방 해하려 한다.
하지만 서준은 내뻗는 검격에 대 한 부패의 가능성을 닫아버린다.
‘지금의 나는… 분명히 강하다.
비록 제한된 시간이지만 압도적 으로, 분명하다고 확신할 만큼 글 룬을 뛰어넘고 있다.
글룬의 부패는 서준에게 결코 닿 을 수 없었다.
그에 비해서 서준의 칼날은 갈수 록 정교해진다.
한번 성공해봤기에 확신이 생겼 다.
더 이상 눈앞의 글룬들을 하나하 나 베어낼 필요가 없었다.
서걱-!
무극에 달한 검격은 시공간을 갈
라내며 속에 숨어서 분신체들을 조 종하고 있는 글룬의 영혼을 베어냈 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