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권 20화
345화
거두어지지 않는 어둠의 결계 속.
고대의 존재가 가늘어진 눈동자 로 주변을 홀긴다.
‘역시 눈치는 빠르군……
사실 고대의 존재가 바란 것은 그 순간 나라연천이 기회라 생각하 고 결계 밖을 뛰쳐나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안쪽에서 몸을 숨긴 채로 나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둠의 세상이 품고 있는 차가운 냉기에 갇힌 채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며 바싹 엎드린 상태로 추적을 포기하고 떠나기만을 바라고 있을 터다.
“아쉽지만…… 난 그럴 마음이 없지.”
고대의 존재가 우두커니 자리를 지킨 채로,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다.
그동안 어떠한 흔적도, 혼들림조 차 보이지 않는다.
기나긴 침묵만이 이어질 뿐이었다.
혹여 나라연천이 결계를 빠져나 갔나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긴 시 간이 홀렀을 때.
고대의 존재는 그저 유유히 우주 를 부유하며 여유롭게 팔짱을 낀 채 지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순간 하늘 위에서 갑작스럽게 붉은 불꽃이 타오른다.
고대의 존재는 신경조차 쓰지 않 았다.
갑작스러운 기후 변화는 파멸을 맞이하는 차원에서는 흔한 일이었 으니 말이다.
다만 뒤를 이어 갑작스러운 폭발
소리가 울려 퍼졌을 때, 기이한 불 쾌함을 느꼈다.
콰과광-!
세계를 얼려가던 어둠의 결계 일 부분이 녹아내리며 구멍이 뚫린 것 은 정말 찰나의 순간이었다.
바닥에 내리꽂힌 불꽃의 형태를 확인한 고대의 존재는 눈이 휘둥그 렇게 변했다.
“태양의 불꽃!”
케메트의 주신, 라의 불꽃이 하 늘에서부터 떨어져 내렸다.
‘라가 이곳에 왔다고?!’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지금 라는 분명 다른 형제들이 발을 묶어 놓은 상태일 터였다.
이런 외우주에 당도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어둠의 결계를 뚫은 불꽃 은 틀림없는 태양의 불꽃이었다.
고대의 존재는 다급히 시선을 돌 려 허공을 바라본다.
역시나 주신의 격은 어디에서도 느껴지지 않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는 그 때, 지면에서부터 푸른빛 기운이
일어난다.
“거기 숨어 있었구나!”
고개를 돌린 고대의 존재가 모래 해일을 일으킨 순간이었다.
사아악...
거센 바람이 푸른빛 기운에 먼저 당도했다.
그 순간, 모습을 드러낸 나라연 천이 아포피스를 품에 안고는 몰아 치는 바람을 향해 손을 뻗었다.
쌔액-!
몰아치는 바람의 끝자락을 모래 해일이 뒤덮었으나, 뚫린 결계의
벽을 향해 나라연천이 뛰쳐나가는 것은 막지 못했다.
“감히-!”
분노한 고대의 존재가 어둠의 결 계를 거두고는 도망친 바람올 쫓는 다.
주변의 바람을 다룬 채, 나라연 천과 아포피스를 양쪽 팔에 하나씩 두른 채 비행하고 있는 공기와 바 람, 하늘을 상징하는 신, 슈의 얼굴 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무래도……. 멀리는 도망치기 힘들 것 같은데.”
나라연천과 손을 마주 잡고 날아
오르는 순간, 고대의 존재가 일으 킨 모래 해일에 적중당한 슈의 다 리에 무거운 모래가 달라붙었다.
“ 너는……?”
극한의 냉기를 머금고 있는 어둠 의 결계에 숨어 있느라, 손과 발이 검게 괴사한 나라연천이 는을 굴리 며 물었다.
온몸은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리 고 있는 채였다.
“슈, 하나하나 설명해주고 싶지 만, 시간이 없…… 크읍-!”
매서운 굉음과 함께 쏟아진 모래 폭풍에 직격당한 슈의 신형이 크게
회전한다.
갑작스레 허공에 버려진 그 순간 에도 나라연천은 재빨리 마력을 펼 쳐 아포피스를 받아들었다.
“더 이상은 도망가지 못할 거 다.”
고대의 존재가 어둠을 휘감은 채 로 극광속의 속도로 뒤를 추격해오 고 있었다.
‘차원 이동 반지를……!’
아공간에 다급히 손을 뻗어 반지 를 잡았지만 이미 한발 늦은 뒤였 다.
촤악-!
짧은 시간 쏟아지는 모래 해일이 시야 전체를 뒤덮었다.
마지막 희망인 슈는 다리는 물론 전신에 모래가 달라붙어 도움을 줄 여유가 없어 보인다.
‘위험......!’
침음을 삼킨 나라연천이 품에 아 포피스를 끌어안은 채 고민하고 있 을 때였다.
쿠구궁……!
지면에서부터 솟아오른 거센 파 도와 모래 해일이 부딪힌다.
거센 파도가 모래 해일에 집어삼
켜지는 것은 순식간이었으나, 그 짧은 틈새 동안 나라연천에게 도망 을 칠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 이동.’
차원 이동 반지를 통해 모래 해 일로부터 멀리 벗어난 나라연천이 거친 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허공에서부터 모습을 드러내 다 시 거센 파도를 일으키는 여인의 모습이 보인다.
나라연천의 수많은 지식 덕에 사 자의 머리와 인간의 몸을 하고 있 는 그녀가 누구인지 짐작하기란 어 렵지 않았다.
‘테프누트!’
슈부터 시작하여 테프누트까지.
케메트 신화의 신들이 나라연천 을 돕기 위해 나서고 있었다.
‘대체 어째서?’
이토록 격이 높은 신들이 자신을 돕기 위해 목숨을 걸었단 말인가?
모두 상당히 강력했으나, 케메트 의 신 중 고대의 존재와 대적할 수 있는 이는 근래 주신의 격에 오른 라뿐이었다.
“설마 라도 이 자리에 온 건가?”
나라연천의 의문에 화답한 것은,
머리에 한 쌍의 뿔이 돋아있는 한 여인이었다.
“아버지께서는 고대의 존재와 접 전을 치르고 계시느라 이 자리에는 오지 못하셨습니다.”
황급히 고개를 돌린 나라연천이 머리 위에 솟아있는 권능의 뿔을 목격한 뒤에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 쉰다.
“하토르군.”
“그렇게 경계하실 거 없습니다, 세크메트로서 당신의 앞에 설 일은 없을 테니까요.”
“다행이긴 한데……. 어째서 나
를 돕는 거지? 고대의 존재를 감당 할 방법이 있는 건가?”
나라연천의 시선이 뒤를 향했다.
계속되는 공방에 슈의 몸은 제대 로 된 비행조차 펼칠 수 없을 정도 로 무거운 모래가 달라붙어 있었다.
테프누트가 일으킨 파도들 역시 모래 해일과 폭풍에 얼마 버티지 못한 채 무너져 내리기만을 반복하 는 채였다.
그들은 나라연천을 구하기 위해 왔다.
아무리 주군의 명령을 완수한다 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도움을 받아놓고 모른 채로 지나칠 수는 없었다.
“그냥 편히 쉬시면 됩니다, 도움 받을 만한 일은 없을 테니까요.”
하토르는 자비로운 미소로 선언 하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애초부터 우리의 목적은 이 짧 은 시간을 벌어주는 것……
허공 너머, 먼 우주에서부터 찬 란한 금빛의 섬광이 하늘을 가로지 르며 이곳을 향해 내달려오고 있었다.
아니, 시야에 닿는 순간 이미 당 도한 후였다.
나라연천의 다른 생각이 이어지 기도 전, 찬란한 금빛이 솟아오르 던 모래 해일을 찢어발기고, 괴성 을 내지르는 고대 존재의 목덜미를 붙잡아 바닥으로 내던진다.
쾅-!
폭음과 함께 세계가 뒤혼들렸다.
쿠구구궁-!
그 순간 나라연천의 입가에는 환 한 미소가 피어난다.
지금 이 우주에서, 이런 곳까지 찾아와 고대의 존재를 내동댕이칠 수 있는 인물은 하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주군-!” 마침내 무결의 신이 전장에 도달
한 것이었다.
서준은 란카의 안내를 받아 내우 주로 향하는 문에 도착했으나, 침 공을 해왔다는 고대의 존재와 나라 연천의 모습을 바로 찾을 수는 없 었다.
나라연천은 고대의 존재로부터 도주하기 위해서 몇 개나 되는 차 원을 옮겨 다녔으니, 뒤늦게 도착 한서준이 추적해나갈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나라연천은 도주를 하 는 와중에 특유의 기운을 이용하여 흔적을 남겨주었다.
‘빠르게 쫓아가면 하루 내에는 도착할 수 있겠어.’
짧다면 짧다고 말할 수 있는 시 간이다.
하지만 지금의 서준에게는 너무 나도 긴 시간이었다.
이동하는 하루 사이에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서준은 다급하게 우주로 나아가 몇 개나 되는 행성들을 가로지르며 빠르게 움직였다.
생각보다 추적에 힘이 들지는 않 았다.
옥황의 도움을 받아서 힘을 완전 히 회복해낸 덕인지, 아니면 치솟 는 분노 때문일지는 알 수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앙그라 마 이뉴와의 전투를 치르기 전과 비해 감각이 몇 배는 더 예민해지고 날 카로워진 상태란 것이었다.
실제 서준은 자연스럽게 무결의 힘을 운용하며 이동하는 동안 스스 로의 몸 상태를 확인했고 크게 성 장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처음 주신이 되었을 때와는 차 원이 달라.’
굳이 따지자면 지금도 이제 막 주신의 위에 오른 신참에 불과했다.
하지만 앙그라 마이뉴와의 전투 를 거치고 힘을 흡수한 것은 생각 보다 더 큰 성장을 가져왔다.
그렇게 반나절이 조금 더 흘렀을 무렵.
서준은 나라연천이 방금까지 몸
을 숨기고 있었던 차원의 위치를 정확히 찾아냈다.
‘거의 다 왔으니, 조금만 더 버텨 줘.’
다급히 우주를 가르며 목적지로 향하던 도중이었다.
“저건?”
저 멀리 목적지로 추정되는 차원 의 하늘 위, 우주를 밝힐 정도의 환한 불꽃이 피어나고, 내리친다.
서준은 저 불꽃의 주인이 누군지 잘 알고 있었다.
대련이라고는 하지만 직접 그 불 꽃의 힘을 받아친 적도 있으니 말
이다.
“ 라‘?”
의문에 화답하듯, 귓전에 메시지 하나가 들려온다.
띠링-!
[태양의 신의 메시지가 도착했습 니다.]
[생각보다는 조금 늦었군, 그래도 불꽃을 던질 틈이 생겨서 정말 다 행이었네.]
태양의 신.
신명만으로도 누구인지 쉽게 짐 작할 수 있었다.
‘역시, 라였어.’
갑작스러운 메시지로 당황스러웠 지만, 머릿속은 빠르게 상황을 정 리해나간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갑작스 레 불꽃이 비산하고 폭발했다.
라가 아무런 연유 없이 저런 파 괴를 감행했을 리가 없었다.
아마도 큰 위기에 빠진 나라연천 을 구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내가 진 빚들은 반드시 갚을게.’
은혜는 잊지 않는다.
비단 라뿐만이 아니다.
애초에 정복왕의 도움이 없었다 면 서준은 지금과 같은 자리에까지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신격들 이외에도 서준을 도와준 이들이 너무 많았다.
낳아주고 키워준 부모, 그리고 함께 자라온 동생 서연이야 말할 것도 없는 게 당연했다.
가족이 있었기에, 그 따뜻함을 알기에서준은 지구로 돌아왔다.
그리고 지구로 돌아온 이후로도
서준은 생각보다 많은 이들에게 도 움을 받았다.
‘내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모두 다 받아주었지.’
첫 적응에 큰 도움을 주었던 경 호, 그리고 서준의 가치를 높게 사 고 끝까지 믿어준 강석호가 시작이 었다.
그 뒤로 수많은 이종족과 중원 대륙에서부터 이어진 인연까지 있었다.
마찬가지로 다소 좋지 않은 관계 로 만났지만 끝내는 곁에 남아 그 누구보다도 충직한 신하가 된 나라
연천도 있다.
이 외로도 서준을 응원해주고 도 와주는 이들은 너무나 많았다.
모두가 너무나도 소중하다.
그리고 다행히도, 아직까지 서준 은 소중한 이들 중 누구도 잃지 않 았다.
무수히 많은 고비가 있었던 것치 고는 참으로 운이 좋다고 볼 수 있 을 터였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다짐한서준이 솟구치고 있는 거
센 모래 해일을 단숨에 찢어발기며 거리를 좁혔다.
동시에 빠르게 눈동자를 굴려 상 황을 파악했다.
다소 지치긴 했지만, 아직 해맑 은 미소를 띠고 있는 충직한 신하 의 모습이 보인다.
‘ 나라연천.’
그의 안전을 확인한 이후에야 서준의 입가에는 미소가 감돌았다.
직후, 계속 부풀어가며 슈를 짓 눌러가고 있는 모래를 무결의 힘으로 완전히 걷어낸다.
밝아진 시야 속, 마침내 전장에
당도한서준의 모습을 확인한 슈가 안도의 미소를 피운다.
“무결의 신, 이제부터는 당신의 몫입니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