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권 10화
335화
지구에 귀환했다.
높게 솟은 빌딩들이 숲처럼 줄지 어진 낯익은 풍경을 확인한서준은 감상하듯이 천천히 주변을 둘러본 다.
‘이제는 귀환도 익숙하네.’
한때는 지구로 되돌아오기 위해 천 년이 넘는 시간을 헤맨 적도 있었다.
그 시간 동안 얼마나 수많은 고
난과 시련이 있었는지 셀 수도 없 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 쉬운 일이 되어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시간이 의미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쾌감은, 어렵게 돌아올 적보다 더 강렬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익숙한 풍경, 포근한 내 집, 그리고, 성장을 마친 후의 귀환.’
이 외로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 로 많은 감정이 밀려온다.
확실한 것은 불쾌한 것은 단 하 나도 없었다.
모두가 서준에게 흐뭇한 감정을 주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집에 가면 언제든 날 반겨주는 가족을 볼 수 있어.’
그것이 최고였다.
서준은 그렇게 생각하며, 서울 잠실에 있는 가장 높은 건물의 옥 상 위에 발끝을 두고 내려앉았다.
아직도 여러 여운이 남아 있었지만, 특히 이번에는 그 만족감이 더 크게 와 닿았다.
마치 사우나라도 마치고 나온 듯 한 개운함이었다.
‘주신이 되었어.’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죽 음’을 맞이할 뻔했다.
하지만 결국 정복왕의 도움과 끝 없이 발버둥 친 덕에서준은 당당 히 주신이 되어서 돌아왔다.
‘강해졌다고.’
스스로가 체감할 수 있을 정도였 다.
무인에게 이보다 큰 기쁨은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서준의 가슴 을 뛰게 하는 것은 앞으로도 나아 가야 할 길이 있다는 것이다.
‘아직 멀었지.’
자연스레 서준의 입가에 숨길 수 없는 미소가 흐른다.
만약 주신의 경지가 끝이었다면, 서준은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의 고 독감과 허탈감을 마주했을 것이다.
절대자의 고독, 중원 대륙에서도 겪어 본 감정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런 일은 벌어 지지 않았다.
주신이 되었지만, 이제 막 시작 일 뿐이다.
서준은 막 주신이 되었을 무렵, 라와 나누었던 공방을 떠올렸다.
불꽃을 피워낸 라와 그를 막아 낸 서준.
이제 와서 생각해보자면 참 섬뜩 한 상황이었다.
‘자격이 되지 않았다면 죽었겠 지.’
힘을 알아본다는 명목이었지만, 실상은 일종의 시험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자만하고 있다는 생각 이 들었지만, 라는 그런 태도를 보 일 만한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라는 여태껏 싸워왔던 신격들과 격이 다를 정도로 강했다.
아직 주신의 힘이란 것에 완벽히 적응하지 못한 상태였다고 해도 라 의 실력은 폄훼할 수 있을 정도가 아니었다.
그런 라조차도 정복왕의 아래라 고 평가받는 게 실상이었다.
그리고 라에게 인정을 받는 정복 왕조차도 고대의 존재들에 대한 긴 장감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
‘난 정말 애송이였어.’
라와 정복왕 둘 중 지금의 서준 보다 약한 이는 누구도 없었다.
그리고 그런 주신들조차도 두려 워하는 고대의 존재들과 그들이 섬 기는 아우터 갓도 존재했다.
첩첩산중이었지만, 두려움을 느 낄 필요는 없었다.
‘넘을 수 있어. 시간이 문제일 뿐 이야.’
허세 따위가 아니었다.
서준을 지칭하는 신명(神名)은 투쟁, 그리고 그를 꾸미는 말은 용
기와 구원이었다.
그리고 패자(霜者)의 칭호를 얻 은 서준은 닥치는 대로 신격들을 집어삼켜 왔다.
독신, 대무신, 대치신, 대전신까 지, 이외로도 수많은 신명을 흡수 했다.
이렇게 수많은 힘을 품고 있던 서준이 주신이 되어 얻게 된 신명 은 다름 아닌.
‘무결(無缺)의 주신.’
서준의 성향과 힘에 경악한 라와 정복왕이 직접 지어준 이름이었다.
포스 시스템도 이에 대해 반발하
지 않고 수용했다.
물론, 단순히 수많은 신격을 먹 어치운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서준의 기본적인 힘은 마(魔)를 근간으로 삼고 있는 마신의 것.
여기까지만 보자면 부정을 상징 하는 주신이 되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서준은 야훼의 광명과 우 라노스가 가진 티탄의 힘마저 품어 냈다.
물론, 단순히 앞선 힘만으로는 주신의 격에는 도달하지 못했을 것 이다.
중요한 것은 서준은 이 힘들을
섞어 혼돈의 힘으로 사용할 수 있 다는 사실이었다.
‘모든 신격의 능력을 담을 수 있 는 능력.’
말 그대로 약점이나 홈이 없는 무결에 가까운 힘이다.
물론, 단점이 존재하지 않는 것 은 아니었다.
무결이라고는 하나 자신보다 강 한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사실 이 부분은 단점이라고 보기 도 오묘했다.
‘이건 어떤 힘이든 똑같은 부분 이니.’
더군다나 서준은 이러한 단점을 메꿀 수 있다고 자부했다.
패자의 칭호를 이용한다면 서준 의 힘은 전투를 거듭할수록 더욱 강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마침 흡수할 적도 많지.’
그들 모두가 상상 이상의 힘을 가진 괴물이었다.
이렇게 눈앞의 적들을 먹어 치워 계속해서 힘을 부풀려간다면 그 누 구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될 것 이다.
‘우주의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 게 될 거야.’
그토록 원하던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계속 바라왔던 목표가 눈앞에 보 이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이렇게 보이는 것만으로 만족할 생각은 없었다.
‘목표에 결국엔 도달하겠어.’
피식- 미소를 흘린 서준이 호흡 을 깊게 들이마신다.
“전력으로 달리기 위해서라도 조 금은 휴식을 취해둬야겠네.”
꿈만 좇다가 현실을 잊어서는 안 되는 법이었다.
그 누구도 손댈 수 없는 존재가 되려는 것은 모두 가족들과의 행복 한 삶을 살아가기 위한 일이었다.
서준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후 곧장 하늘로 치솟으며 가족 들이 있는 집으로 향했다.
‘생각해보니 정말 오랜만이네.’
계속되는 사건들로 인하여 가족 들을 만나지 못해왔었다.
미안함과 아무런 말 없이 지켜봐 주었던 가족에게 새삼 고마웠다.
동시에 미치도록 보고 싶어졌다.
그리움이라는 감정들이 더해짐에
따라, 서준은 집을 향하고 있는 발 걸음을 재촉했다.
태양의 의자로 돌아와 앉은 라의 얼굴에는 여태껏 단 한 번도 보이 지 않았던 환한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난생 처음 보는 밝은 아버지의 모습에 테프누스의 마음속에는 안
도라는 감정이 피어올랐다.
물론, 이러한 평화는 얼마 가지 못했다.
“그러니까, 정복왕이랑 마신과 손을 잡으셨다고요……?”
분명히 똑똑히 들었음에도 너무 나도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반문이 흘러나온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항 시 독자적인 노선을 걸어오던 정복 왕이 손을 맞잡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머리를 분주히 굴려보자 자연스
럽게 떠오르는 존재가 있었다.
‘새로운 주신, 외우주의 지구 출 신 한서준, 그러고 보니……
아마도 이쪽이 아버지, 라의 얼굴에 미소를 피게 했을 확률이 높 았다.
항시 고대의 존재들을 의식하고 있던 라는 신격 중에서 가능성이 높은 루키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신은 이제 루키라고 할 수 없 겠지만……
주신이라는 격에서부터 알 수 있 듯 서준의 격은 이미 테프누스를 뛰어넘은 채였다.
어찌 됐든 그런 서준과도 손을 잡았고 그로 인해 라의 기분이 좋 아진 것이라면 테프누스로서도 꽤 나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케메트 연합의 힘이 날로 강해져 가고 있었는데 이렇게 또 덕을 보는군. 주신, 한서준. 만나면 보답이라도 해줘야겠 네.’
긍정적인 미래에 테프누스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나고 있었지만, 애석하게도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쿠구궁…….
갑작스레 세계가 흔들리기 시작 한다.
연회장에 모여 밝은 얼굴로 음식 과 음악으로 축제를 즐기던 신격들 의 얼굴이 굳어진다.
평범한 신격뿐만이 아니었다.
미소를 보이고 있던 라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어졌다.
“벌써 때가 되었다고……r
라의 얼굴은 백지장보다 하얗게 변해 있었고, 떨리는 눈빛을 감추 지 못했다.
“분명 아직 시간이 남아 있을 텐
데?”
균형이 깨졌다 할지라도 곧장 움 직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고대의 존재들은 무너진 균형들 이 일그러지고, 우주의 균열이 일 어날 때에나 움직임을 보였었다.
그런데 방금의 충격은 분명, 거 대한 균열이 벌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라는 눈을 가늘게 뜨고 우주를 살핀다.
“저, 저건……?”
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진다.
“……아후라 마즈다가 어떻게?”
아니, 지금 보이는 것은 아후라 마즈다가 아니었다.
얼핏 보기에는 그와 비슷한 기운 을 뿜어내고 있긴 하지만 명확히 달랐다.
빛이 어둠을 삼키고 있는 것이 아닌 어둠이 빛을 삼키고 있는 형 상이다.
“설마 앙그라 마이뉴가?”
라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 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어리석은
놈이 있었군.’
스스로가 가진 악의에 물들어 파 멸을 불러내고 있었다.
고대의 존재들이 균열을 넘어서 고 있었다.
균열의 크기가 작은 만큼 아직은 고대의 찌꺼기라 할 수 있는 것들 이었지만 마냥 방관할 수 없었다.
‘우주에 혼란이 일어나게 된다면 균열이 벌어지는 속도는 더 빨라지 게 될 터.’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기 전 막아 내야 한다.
앙그라 마이뉴의 계획대로 일이
흘러가게 두어서는 안 된다.
“쉴 틈이 없군.”
간신히 한 가지의 일을 무사히 처리하고 왔더니 곧장 새로운 일이 생겨났다.
심지어 상대는 고대의 존재.
주신의 위에 올라 어느 정도 격 을 갈고닦은 지금의 라조차도 고대 의 존재를 상대로 정면 승부를 벌 일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전처럼 걱정되지는 않았다.
‘지금의 나는 혼자가 아니란 말 이지.’
바라던 것, 아니 그 이상의 동맹 을 얻어냈다.
라는 곧장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 다.
“공식적으로 정복왕과 마신에게 도움을 요청해라.”
오랜 세월 억지로 유지시켜왔던 내우주의 평화가 깨진 순간이었다.
부모님과의 식사 자리.
일상 대화와 질문을 이어가고 있 던 서준은 다소 당황스러운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 있었다.
“그래서 서연이는 계속해서 집에 안 들어오고 있다고요?”
뒷머리를 긁적이던 부모님들의 입가에는 씁쓸함 웃음을 보인다.
“그러게 말이다. 얘가 연락을 해 도 도저히 답장이 오지 않으니 걱 정돼서, 원.”
혹여나 자식에게 부담 줄까, 최 대한 덤덤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말에는 어쩔 수 없이 걱정이 묻어
나고 있었다.
“너무 걱정하실 거 없어요. 서연 이도 저 못지않게 강한걸요? 그러 면 오늘 밤에 제가 직접 찾아가 보 도록 할게요.”
“너무 무리하지는 말아라. 너도 계속 돌아다니다가 정말 오랜만에 쉬는 거 아니냐?”
“그래, 네 말대로 강한 아이니까, 큰일은 없을 거다.”
한석훈이 최대한 부담감을 최대 한 덜어주기 위하여 만류하고 있었지만, 서준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 었다.
“마음 편히 쉬기 위해서라도 소 식을 들어놔야죠. 그리고 저한테는 어려운 일도 아닌걸요. 그렇게 걱 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듬직한서준의 말에 한석훈과 양 정화의 얼굴에 졌던 그늘이 조금은 사라져간다.
“아니, 당장 이럴 게 아니라 바 로 연락해보면 되죠.”
서준이 곧장 전화기를 들어 올리 며 어디론가 연락을 취했다.
“ 여보세요?”
발신에 성공한서준은 잠시 짧은 대화를 주고받았다.
처음에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띤 채로 대화를 주고받던 서준의 얼굴 은 얼마 가지 않아서 석고상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