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권 6화
331화
“미안하군, 슈를 따돌리고 오느 라.”
“그래도 너무 늦었어.”
“조금은 이해해 달라고, 네가 가 져오라는 물건을 챙기느라 상당히 고생했으니 말이야.”
피식- 미소를 보인 라가 자신의 품 안에 숨겨 놓은 무언가를 가볍 게 툭툭 두드렸다.
“……고마워.”
“사실 나도 마신을 아주 눈여겨 보고 있었거든.”
“그건 의외네.”
“우리와 마찬가지로 고대의 존재 와 맞서 싸울 수 있는 몇 없는 존재 아닌가? 싫어할 이유가 없지.”
정복왕은 는을 가늘게 뜨고 라를 바라보았다.
그의 진실된 의중을 파악하기 위 함이다.
“굳이 진실과 거짓을 꿰뚫을 필 요가 있나? 어차피 내 도움이 없으 면 마신은 살아날 수 없는 상황 아 닌가?”
정복왕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침묵이 무언의 긍정이 란 것을 모를 라가 아니었다.
“보아하니 혼돈의 힘을 무리해서 계속 키워내다가 잡아먹힌 거 군……. 그러나 기이하게도 존재감 은 강렬해, 대체 무슨 수를 쓴 거 지?”
“보이는 그대로……
가늘어진 눈매의 라가 정복왕의 얼굴을 훑는다.
“마신이 네게 꽤 소중한 존재인 가 보군.”
“ 엄청나게.”
“큭큭, 재밌는 일이야. 대체 뭐라 고……. 그 잘난 정복왕의 호감을 산 걸까.”
라는 가볍게 웃으며 다시금 서준 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무리하게 혼 돈의 힘을 증폭시키려다가 역으로 잡아먹힌 상황에, 운이 좋게도 정 복왕인 자네가 옆에 있었다는 거군. 무언가를 계속해서 먹어치우는 혼 돈의 힘에 끝없이 영양분을 공급해
줄 수 있는 존재가 말이야, 덕분에 체내의 힘은 계속 더욱 강렬해지고 있지만 이미 무너진 육신이 그 힘 을 모두 담아낼 수 없는 상태인 건 가?”
“ 맞아.”
“그래서 힘을 담아낼 수 있는 그 릇 자체를 만들어야 하는데……. 문제는 혼돈의 힘이 너무나 강력해 졌다는 거지. 웬만한 육신으로는 시도해봤자 다시 지금과 같은 꼴이 날 것이란 말이야. 그래서 내게 이 것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겠지. 이 물건이라면 마신의 그릇이 증폭 된 혼돈의 힘을 감당해낼 수 있게
줄 테니까. 맞지?”
정복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 다.
‘과연 라.’
외부 활동을 크게 하지 않고 중 립의 자세를 지키며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지만 만만하지 않은 상 대였다.
생각을 읽는 것도 빠르고, 정보 를 정리해서 답을 찾아가는 것 역 시 능숙하다.
어째서 오래도록 무수히 많은 신 이 모인 케메트 신화를 이끌어 온
신으로 군림해왔는지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아무 생각 없이 방관하 고 있는 것만도 아니었네.’
라에게서 은은하게 흐르는 격이 과거에 비하여 한 등급은 더 올랐 다.
욕심을 낸다면 주신(主神)의 자 리에도 오를 수 있을 정도다.
아니, 힘을 숨기고 있을 뿐이지 이미 주신에 올랐을 수도 있었다.
침묵을 지키며 우주의 패권에 아 무런 흥미를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계속 성장을 거듭했다는 뜻이다.
자신에 취해 나태해졌던 다른 신 격들과는 분명 다르다.
사실상 중립 세력의 3할의 전력 은 대부분 라의 힘과 격에서 나올 것이라는 소문들이 완전히 헛된 것 은 아니었다.
‘적으로 돌리지 않기를 잘했어.’
만약 이 혼란의 시기에 라를 적 대시했다면.
저도 모르게 정복왕이 미간을 찌 푸린다.
‘다행이야.’
달리 말하자면, 이렇게 도움을
주러 온 아군이었기에 한층 더 안 심할 수 있었다.
“헌데, 육체를 새로이 빚어내는 일이 결코 쉽지는 않을 텐데, 그렇 지 않아도 적이 많은 자네에겐 위 험 부담이 너무 큰 거 아닌가?”
“그래서 너를 이곳으로 불러들인 거야.”
“내가 무조건 자네의 부탁을 들 어줄 것이라 생각하고?”
정복왕을 바라보고 있는 라의 눈 매가 가늘어진다.
“……고대의 존재와 맞서 싸울 수 있는 몇 안 되는 존재잖아, 그
리고 만약 우리가 패배한다면 모두 가 끝장날 거야.”
“크하하-!!”
폭소를 터뜨린 라가 고개를 주억 인다.
“이것 참, 영리하다니까, 절대 거 절할 수 없는 제안을 내밀다니 말 이야.”
“미안해, 하지만 부탁할게.”
정복왕이 양손을 모은 채 정중히 고개를 숙인다.
그 간절함이 아니더라도 이미 나 서려고 어느 정도 결심했던 라의 입가로 웃음이 흘렀다.
“것 참, 살다 살다 천하의 정복 왕이 고개 숙인 모습을 보게 될 줄 이야.”
“그만큼 절박하니까.”
“그렇다면 조건을 하나 걸지, 원 하는 물건도 내주고, 호위마저 해 주는 호구 짓이 싫지는 않지만, 또 썩 내키지만도 않거든. 기왕이면 기분 좋게 일을 하는 게 서로에게 좋잖아?”
“뭘 원하지?”
“나도 마신에게 흥미가 많아. 하 지만 너처럼 아주 절박하지는 않지, 괜찮다면 부탁을 받아들이는 대가
로 자네가 어째서 마신에게 이리도 헌신적인지 그 이유에 대해서 알고 싶군.”
라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간 정복왕을 지켜봐 왔기에 더 욱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다.
냉철하면서 한 줌의 자비조차 보 이지 않던 패왕이 누군가를 위해 헌신을 하고 있었다.
“그건 안 돼.”
대답을 내뱉는 정복왕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만을 보였다.
눈빛에도 흔들림이 없다.
관찰하듯 그녀를 살피던 라가 혀 를 찼다.
“기이하군. 말할 수 없는 것인지 말하지 못하는 건지 정확히 알 수 가 없단 말이야……. 끙.”
앓는 소리를 낸 라가 뒷머리를 긁적인다.
“그렇다면 부탁의 대가를 다른 것으로 바꾸도록 하지.”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걸로 말했 으면 좋겠어.”
“침공할 고대의 존재들을 물리칠 때까지 케메트와 정복왕은 동맹으로서 함께한다는 조건 어떤가? 이
거라면 자네가 충분히 들어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바라던 바야.”
“대화가 빨라서 좋군.”
“계약 체결.”
고개를 주억인 정복왕의 몸에서 흘러나온 회색빛 기운이 라의 불꽃 과 연결된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라가 품 안에서준비해온 상자를 꺼내어 냈 다.
“여기 자네가 찾던 물건이네.”
화르륵-!
라가 감춰두고 있던 상자 안에는 라의 입장에서도 소중한 것이며, 케메트 신화의 한 축을 담당하는 신물(神物)0] 담겨있었다.
하지만, 라는 망설임 없이 그 상 자의 뚜껑을 열었다.
내부에는 라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것이 들어 있었다.
“내가 다루는 태양의 힘을 축적 해놓은 태양 원반이네.”
라의 상징이자 태양의 힘이 담겨 있는 신물, 보물 중에서도 최고의 보물인 것이었다.
정복왕은 그 태양 원반을 손에
쥔 채로 서준의 앞에 섰다.
‘이 안에 담긴 힘이라면……
자고로 불꽃은 생명의 원천인 힘.
죽어가는 서준의 육신을 살리고 새로 빚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어.’
긴장된 호홉이 짧게 흐른다.
“이미 증폭된 혼돈의 힘이 모인 육체에 내가 품고 있던 꺼지지 않 는 태양의 불꽃으로 육체를 재구성 한다……. 성공한다면 마신은 고작 백 년도 살지 않은 채 주신의 자리 에 오른 인간이 되겠군, 여태껏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기적과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게야!”
라의 짧은 감탄을 뒤로하고 정복 왕은 누워있는 서준에게로 다가간 다.
터벅-
마침내 서준의 앞에 당도한 정복 왕은 태양의 원반을 꽈악- 말아 쥔 다.
회색빛의 기운이 뻗어져 나와 단 숨에 원반을 뒤덮었다.
‘이게 유일한 방법이야.’
남아있는 왼손을 서준의 심장 위 에 올린 정복왕이 두 눈을 감은 채
로 천천히 원반의 기운을 서준에게 로 홀려 넣는다.
화르륵-!
맹렬한 불꽃의 기운이 정복왕의 육신을 지나 서준에게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보며 라는 눈을 반짝 였다.
“스스로 불꽃의 힘을 정제하는 역할을 자처하다니, 아예 목숨을 걸고 있군.”
라의 힘이 온전히 담겨있다고 해 도 과언이 아닌 물건이었기에 자칫 잘못할 경우 육신 자체가 불태워질 수도 있었다.
그런데 정복왕은 그런 위험도 개 의치 않으며 마신을 도우려 하고 있었다.
감탄을 터트린 라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나만 놀고 있을 수만은 없겠 어.”
스스로 불꽃의 힘을 정제하는 역 할을 자처한 정복왕은 말 그대로 무방비 였다.
그리고 언급했듯, 자칫하면 육신 자체가 불타 없어질 수도 있었다.
누군가가 다가와서 조금만 훼방 을 놓아도 마신과 정복왕 둘 다 죽
음에 이르게 될 것이다.
“든든한 아군을 얻기 위해서라 도, 계약을 충실히 이행해줘야지.”
딱딱하게 표정을 굳힌 라가 등을 돌리어 방문 앞으로 걸음을 옮긴다.
“약속하지, 이 시간 부로 이 문 을 넘어설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을 걸세.”
자기 목숨을 걸면서까지 도움을 주려는 정복왕의 모습에서준은 복 잡한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는 건데?’
정복왕은 서준이 완전히 정신을 잃은 상태라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서준의 정신은 계속해 서 암전될 때가 많은 상태였다.
그러나 이따금씩 의식이 돌아오 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눈앞에서 자신 을 살리기 위해 몰두하고 있는 정 복왕의 모습을 보았다.
‘이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는 없 을 텐데.’
접점이라고 해봤자 그저 정복왕 의 수투를 얻었고, 파편들을 모았 을 뿐이다.
그마저도 강력한 힘을 바라서였 을 뿐이다.
정복왕이 이토록 서준을 향해 집 착하는 모습을 보이는 걸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이 하나도 없다는 것 이었다.
그렇기에서준은 정복왕과의 관 계를 다소 비즈니스적인 부분으로 보고 있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호감이 마음 에 걸리긴 했지만, 그저 이해관계 가 일치하고 마음이 맞으면 기분 좋은 호의를 다수 보이고는 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근래 보았던 정복왕의 간 절한 행동들은 단순한 호의라는 감 정으로 표현하기에는 무리가 많았다.
심지어 지금은 스스로의 목숨마 저 걸었지 않은가?
‘왜 이렇게 절실한 건데……
서준은 의문 속 정복왕의 몸을 거쳐 자신에게 흘러들어오는 태양
의 불꽃을 느꼈다.
붕괴되던 육체가 태양의 불꽃들을 받아들이는 즉시 변모하기 시작 한다.
시작은 뼈에서부터 출발했다.
아무런 방비 없이도 어지간한 신 물로 두드려도 끄떡없어진다.
아니, 최상위의 격을 가진 신이 마음먹고 휘두른 일격마저 대수롭 지 않게 넘길 만큼 단단해졌다.
뼈 자체가 영원을 상징하는 태양 의 불꽃을 근간으로 빚어지고 있었 으니 당연했다.
근육도 마찬가지였다.
태양으로 빚어지는 근육은 더욱 질겨지고 단단해졌다.
이미 인간이라고 보기에는 힘들 정도로 튼튼한 육신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래도 무너지고, 베이고, 파 이기를 반복하던 근육과 거죽이 이 제는 정말 무엇으로도 뚫을 수 없 을 것처럼 견고해졌다.
뼈가 내성이라면 근육과 가죽은 그를 감싸는 견고한 외성이다.
꺼지지 않는 불꽃을 품고 있던 태양의 원반이 가지고 있던 힘이 오롯이 서준의 육체를 빚는 데 사 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정복왕이 한 차례 정제 작 업을 했기에 불순물이나 위험한 요 소가 끼어들 여지마저도 없었다.
태양의 원반이 가진 힘으로 육체 를 새로이 만들어내는 과정들은 마 치 신격으로서 태어나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 대단해.’
하지만 놀라운 것은 변화는 여기 서 끝이 아니었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게 부풀어 있던 혼돈의 힘이 서준의 새로운 육신에 흡수되기 시작했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