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권 25화
325화
정신을 잃은 서준은 몸이 붕- 뜨 는 것 같은 감각과 함께 육신과 영 혼이 분리되는 것을 느꼈다.
육체는 그 자리에 남아 있었고 떠나는 것은 오직 의식뿐이었다.
혼(魂)과 백(晩)이 분리되고 있는 것이었지만, 두려움을 느낄 필요는 없었다.
이미 몇 번이나 가보았던 곳이기 에, 깊은 곳으로 빨려 들어간다고
할지라도 되돌아올 길을 찾을 자신 이 있었다.
정확히는, 서준이 바랐기에 향하 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서준은 보다 과감하게 의식을 내면 깊은 곳으로 잠기게 했다.
마침내 의식이 향한 곳은 내면 심상(心想)의 세계였다.
그 안에서 마주한 것은 모든 것 을 빨아들이고 있는 ‘혼돈’의 힘이 었다.
회색빛 구체에서 느껴지는 압도 적인 위용에서준의 목울대로 마른
침이 꿀꺽- 삼켜진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상상 이상으로 혼돈의 크기가 커 져 있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렇지 않아도 방대하여 억지로 실타래처럼 뭉쳐두었던 힘에 티탄 의 힘과 야훼의 광명을 더했다.
그 위용이 감당하지 못할 만큼 커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정복왕이 걱정할 만하네.’
혼돈의 힘을 마침내 이해하고 자 신 앞에 굴복시켰다고 자부할 수
있었지만, 그것을 완벽한 정복이라 고는 칭할 수 없었다.
당장 눈앞에 마주하고 있는 혼돈 의 힘은 굴복시켰을 당시 이해했던 것보다 몇 배나 더 복잡하면서도 혼란스러워져 있었다.
만약, 혼돈에 대한 깨달음이 없 었다면 세계에 진입하자마자 온전 한 정신을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 다.
‘지금 당장도 시간을 오래 끌 수 는 없어.’
계속해서 증폭되어 가는 혼돈은 서준의 육신은 물론, 분리된 의식
마저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최대한 빠르게 내 것으로 만들 어 내야 해.’
이미 몇 번이고 굴복시켰고, 파 악한 힘이다.
마음먹고 복종시키려 한다면 충 분히 가능할 터다.
때문일까?
위용을 보이고 있는 혼돈의 힘을 향하여 걸음을 옮기고 있는 서준의 발걸음에는 다소 자신감이 어려 있었다.
마침내 지척에서 마주한 혼돈의 힘.
그 구체를 탐스러운 과일 보듯이 바라본 서준이 혀끝으로 입술을 핥 으며 손을 내뻗으려던 순간이었다.
[꺼……져.]
세계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서준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 것은 너무나도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 나‘?’
스스로가 말하는 것과 듣는 것에 는 차이가 있다지만 이건 분명 ‘자 신’의 목소리였다.
서준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던 순간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거야…….]
정체를 숨길 생각은 없었는지, 곧장 회색빛 기운, 혼돈의 힘이 한 자리에 모이며 사람의 형상을 취해 간다.
“뭐 하자는 거지?”
지금 당장만 보자면 혼돈의 힘이 빗어낸 형태는 마네킹과 같은 모습 이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저 마네킹의 크기와 실루 엣을 보자면 혼돈이 하고자 하는 모습은 틀림없이 거울 너머로 보았
던 ‘한서준’ 자신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잖아?]
물음을 던지는 서준의 모습에, 혼돈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흐른 다.
동시에 사방에 퍼져있던 혼돈의 힘으로부터 거대한 쇠사슬들이 형 성되고는 서준의 전신을 단숨에 구 속했다.
[잠시 빌려줬을 뿐, 본래 전부 내 것이야.]
혼돈 그 자체가 다루는 힘에서준의 몸에 자리 잡고 있던 혼돈의 힘이 자연스럽게 빠져나온다.
어떻게 막을 틈도 없었다.
혼돈의 말처럼, 본래 혼돈의 힘 은 그의 것이다.
힘이 본래의 주인에게 향하는 과 정에 있어, 서준은 어떠한 반응조 차 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거대했던 혼돈의 힘이 더욱 크게 부풀어 올랐다.
폭주하는 혼돈의 힘에 머리가 쪼 개질 듯이 진동하고는 정신이 무너 지려 한다.
‘처음부터 이걸 노린고 있던 거 였나……
애초에 혼돈의 힘은 스스로가 복 종을 보인 적은 없었다.
그저 힘이 없어서 굴복했고 침묵 했을 뿐이다.
계속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는 것이다.
“내가 이곳에 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나 보네.”
[고마워, 나를 대신해 흩어졌던 내 혼돈의 힘들을 되찾아줘서…….]
마네킹과 같이 윤곽만 존재했던 혼돈의 얼굴에 두 눈동자와 입술이 생겨나며, 머리카락이 자라기 시작 했다.
비록 아직까지는 완전한 ‘한서준’ 의 모습이라고 할 수 없었지만, 어 느 정도 윤곽을 잡은 혼돈의 주변 으로 회색빛 기운이 넘실거린다.
[이제부터는…… 내가 네가 되어 줄게.]
혼돈은 오연한 시선을 한 채로 서준을 응시한다.
거대한 혼돈의 사슬에 잡힌 채 꿈쩍도 못 하고 있는 서준의 모습 을 보자 입가로는 자연스레 미소가 흐른다.
어느덧 상반신까지 서준의 모습 을 구현해낸 혼돈이 팔을 뻗자 회
색빛 검이 쥐어진다.
[보답이라고 하기는 뭐하지 만…… 네가 이루지 못한 복수들을 모두 대신 이뤄줄게, 당장으로서는 힘들겠지만 흩어진 나머지 힘들을 찾아낸다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 거든.]
혼돈의 모습을 차분히 지켜보고 있던 서준의 입가에 헛웃음이 흐른 다.
“나를 흉내 낸다고 생각했는 데…… 그냥 내가 되고 싶은 거였 나.”
[네가 되는 게 아니야, 처음부터
너와 나는 하나였어.]
“굳이 네가 주인이 될 필요는 없 잖아?”
[내가 다루는 혼돈은 본래 나의 것, 주인의 자격으로서 충분하잖 아?]
서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혼돈이 네 것이 아니게 되면?”
[뭐?]
이어서 내뱉은 말에 천천히 다가 오던 혼돈이 의문을 토했다.
“어떻게 완벽히 흡수하고 널 복 종시키나 고민을 했거든, 그런데 방법이 생각했던 것보다 쉽겠어.”
[헛소리……
혼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서준의 전신에서 피어오른 마신 의 힘이 몸을 구속하고 있던 쇠사 슬을 단숨에 찢어버렸다.
촤악-!
어느덧, 붉은 눈을 가진 악마가 된 서준의 주먹이 혼돈의 가슴에 맞닿는다.
쾅
폭음과 함께 뒤로 밀려난 혼돈의 주변으로도 회색 기운이 넘실거리 기 시작했다.
[마신의 힘……! 그쯤이야, 포식 자인 혼돈에 비한다면 결국 나약한 힘에 불과한 것.]
웃음을 터트리는 혼돈을 보며 서준 역시 미소를 지어주었다.
“혼돈의 힘은 뺏어갈 수 있지만, 내 육체를 지배할 수 있는 건 아니 잖아.”
가장 포악하고 파괴적인 혼돈의 힘도 결국 기운의 일종이다.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육체와 빚 을 내력이 없다면 제대로 된 파괴 를 행할 수가 없었다.
[굳이 지배할 필요가 없을 뿐인 거지.]
혼돈으로부터 회색빛 기운이 사 방으로 뻗쳐 나왔다.
제대로 형태를 빚을 수 없다고는 하나 혼돈의 힘이 가진 파괴력은 역시나 강력했다.
혼돈이 가진 파괴력을 잘 알고 있는 서준이었기에, 그 힘에 위축 되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 괜찮아.’
하지만 서준은 금세 마음을 다잡 았다.
빼앗긴 혼돈의 힘이 당장은 허전 했지만, 서준이 가지고 있던 힘은 혼돈이 전부가 아니었다.
‘내가 쌓아온 것들을 믿는다.’
주신의 격이 일어나며 발산하는 마신의 힘에 위엄이 어린다.
오직 혼돈뿐인 세계에서준의 존재감이 퍼져나간다.
혼돈에 삼켜져 가며 스스로의 존재를 잃고 있던 서준이 본인의 존재를 세계에 확실하게 각인시키는 것이다.
계속해서 부풀어가던 혼돈의 힘 이 밀려나고, 위축되기 시작한다.
호흡을 가볍게 가다듬고 혼돈을 차갑게 직시한다.
서준은 위엄으로 존재를 증명해 내는 바로 이 능력이 주신의 격이 가진 힘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확신이었고, 그 마음은 격 이 되어 서준의 주변을 휘감았다.
깨질 듯이 밀려오던 두통과 당장 이라도 무너질 것 같던 정신이 맑 아져간다.
내뻗어지는 혼돈의 개벽의 검을 쳐내고, 타락한 엑스칼리버를 말아
쥔 서준의 손이 거칠게 휘둘러졌다. 콰앙-!
폭음과 함께 사방이 진동했다.
[크읍……
신음을 흘리는 혼돈의 인상이 찌 푸려졌다.
본래 하나였기에 혼돈 역시 서준 의 변화를 느낀 것이었다.
그러나 서준은 아직 모자라다고 생각했다.
‘혼돈을 넘어설 수는 없어.’
많은 힘을 흠수했기에 혼돈 또한
그 크기가 비례해 커져 있었다.
저 혼돈을 모두 홉수하기 위해서 는, 보다 더 강한 힘과 격이 필요 했다.
‘할 수 있어.’
최면에 가까울 정도의 스스로에 대한 확신을 가지는 것으로 서준은 자신의 격을 일부 부풀렸다.
그러나 최면은 진실이 될 수 없 다.
그렇기에 주신의 격으로도 내면 의 혼돈을 모두 집어삼키지 못하는 것이다.
계속해서 허공에서 맞부딪히고 있는 힘에 혼돈이 불쾌한 목소리를
홀린다.
[이 상태로는 우리 모두 헛된 죽 음을 맞이할 뿐이라는 걸 알고 있 을 텐데?!]
“그럴 리가, 죽는 건 너뿐이야.”
침착하게 생각을 갈무리하던 서준의 주변으로 마신의 힘이 폭사되 듯 터져 나온다.
동시에 주변의 회색빛 세상에 단 숨에 짙은 어둠이 내리깔린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의 세상.
그에 맞춰 혼돈 역시 구체에서 혼돈의 힘을 더욱 크게 부풀렸다.
‘내가 모아놓은 혼돈의 힘을 모 두 다룰 수 있다, 이건가.’
놀랄 것도 없었다.
눈앞의 적은 혼돈 그 자체, 체내 에 쌓아놓은 혼돈의 힘을 다루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번 혼돈의 판단은 분명 실수였다.
서준은 혼돈의 힘이 넘실거리는 세계를 스치듯 바라보았다.
‘아직 온전히 흡수하지 못한 혼 돈의 힘.’
본인, 서준조차도 아직 소화시키
지 못한 혼돈의 힘이었다.
따지자면 그 누구의 것도 아닌 혼돈의 힘이라는 것이다.
비릿한 미소를 홀린 서준은 마신 의 힘을 폭발시키고는 더욱 거칠게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이에 지지 않겠다는 듯 혼돈 역 시 다룰 수 있는 힘을 모두 쏟아내 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주변의 회색 풍경 이 출렁이며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
혼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것 또한 그 순간이었다.
“실수한 것 같지?”
서준이 물음에 혼돈의 미간이 찌 푸려진다.
[빌어먹을……!]
혼돈이 황급히 쏟아내던 힘을 거 두어 내기 시작했으나, 이미 때는 뒤늦은 후였다.
“결국, 넌 나야, 여기 있는 혼돈 을 모두 소화하지 못했다는 말이 다.”
서준은 호흡을 크게 들이마시는 것으로, 세계에 흩뿌려진 혼돈의 힘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동시에 주변으로 가득 퍼져나간 채 출렁이던 혼돈의 힘이 소용돌이 치며 서준에게로 빨려 들어오기 시 작한다.
그저 흡수할 뿐이었다.
주인이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은 능력만 된다면 언제든지 거둬들일 수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때마침 지금 서준의 그릇 은 완전히 비워진 상태였다.
세계에 퍼져있는 혼돈의 힘을 수 용할 수 있는 그릇을 가지고 있는 상태란 말이다.
[안 돼—!]
기겁한 혼돈의 얼굴이 일그러져 갔다.
마침내, 혼돈의 손끝부터 붕괴가 시작된다.
간절하게 뻗어진 혼돈의 손에서 서준에게 흡수된 혼돈을 돌려받길 원하나,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건 이제 완전히 내 것이야.”
체내에 자리 잡고 있던 혼돈이 아닌 한서준, 본인의 의지로 흡수 한 온전하고도 완성된 혼돈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품은 혼돈의 힘을 느낀 서준이 웃음을 홀린다.
팽팽하던 힘의 균형이 순식간에 무너져 간다.
[으아아아-!]
절규와 함께 혼돈의 육신이 다시 금 회색빛 기운으로 흩어져 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다소 속도가 느린 듯하 였으나, 서서히 가속되었다.
그리고 종국에는 힘들게 빚은 육 체가 완전히 붕괴되고 있었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