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권 20화
320화
마몬의 성, 가장 깊숙한 지하의 수련장.
“대략적인 이야기는 듣긴 했는데, 도저히 의문이 안 풀려서 말이야. 그래서 대체 왜 이러고 있는 거야?”
서연과 마몬을 이끌고 그곳까지 당도해 걸음을 멈춘 서준이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시선은 안절부절못하는 서연에게 로 꽂혀 있었다.
“아니, 그야 뭐, 처음엔 단순히 좀 도움을 받고자 찾은 건데……. 악마들이 공격해오잖아……. 그럼 그거 안 받아주고 배기나? 그러다 보니 상황이 이렇게 됐지 뭐……
뒷머리를 긁적인 서연이 미안한 듯한 표정과 함께 대답했다.
정말 서연다운 대답이었다.
하지만, 서연에게서 느껴지는 익 숙한 분위기에서준의 눈이 가늘어 진다.
‘뭐지?’
무언가 강제로 억누르고 있는 듯, 떨리는 목소리.
서준의 고개가 갸웃 젖혀진다.
“일반적으로 이성도 없고, 일면 식도 없는 악마들과는 그렇게 됐을 수 있다고 생각해.”
오해로부터 비롯될 수는 있다.
애초에 악마족은 난폭하면서도 포악한 종족이다.
더군다나 서열이 낮은 악마들은 제대로 된 지성을 가지지 못하고 있는 짐승에 불과할 뿐이었으니 충 분히 불가피한 상황이 왔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마몬은 근래 있었던 대 침공을 막는 데 도움도 줬고 너도
전장에서 마몬의 얼굴을 봤을 거 아니야.”
“죄송합니다. 마신님께서 신경을 쓰시기 전에 제가 잘 타일러서 돌 려보냈어야 했는데……
마몬이 다급히 고개를 숙이며 사 죄를 표할 때였다.
“너무 과하잖아! 아니, 오빠 탓이 아니고……
억눌려 있던 감정 때문일까?
다소 격한 소리를 내뱉은 서연의 아랫입술을 질끈- 깨문다.
어찌나 강하게 깨물었는지, 입가 에서는 붉은 선혈이 흘러내렸다.
“난 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 오 빠가 계속 성장해가고 있는 동안, 나는 고작 이룬 게……
몸을 파르르 떠는 서연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서준도 이제는 알 것 같았다.
방금 느꼈던 익숙한 분위기가 무 엇인지 알 수 있었다.
‘스스로에 대한 조바심인가.’
헛웃음이 흘렀다.
설마 초고속으로 성장해나가고 있는 서연이 이런 고민을 하고 있
을 줄은 몰랐다.
‘이래서 피는 속일 수 없다는 건 가.’
바로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서준, 본인이 가장 크게 느꼈던 감정이었 기 때문이었다.
“내 동생답지 않게 귀여운 면이 조금 있네……
“ 뭐?”
“아니, 방금 말은 취소.”
“분명 방금……
“말실수니까, 신경 쓰지 마.”
“누구는 지금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서준은 본격적인 대화를 나누기 전, 마몬에게 손짓했다.
옆자리에서 지켜보고 있던 마몬 이 양손을 모은 채 고개를 숙이며 뒷걸음질을 친다.
이어서 자연스럽게 어둠에 가려 사라졌고, 마몬의 수련장에는 서준 과 서연이 단둘이 남게 되었다.
“대체 누가 너에게 그런 조바심 을 느끼게 했는데 그래.”
고개를 숙이고 있는 서연의 얼굴 의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서 서연의 감
정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도와주고 싶고 같이 싸우고 싶 은데, 거리가 가까워지기는커녕 계 속 멀어져 가잖아.”
다소 생뚱맞은 말처럼 들릴 수도 있었지만, 오래전부터 계속해서 들 어왔던 이야기인 만큼 충분히 이해 가 가능했다.
동시에서연의 조바심이 어디서부 터 시작되었는지 짐작이 되어간다.
서준의 시선이 서연에게로 고정 된다.
“아주 솔직히 말하면, 충분히 도 움이 되고 있다는 말은 할 수 없는
건 사실이야.”
싸구려 동정이나 연민 따위는 필 요 없다.
애초에 그런 감정들은 지금 서연 을 더 비참하게 만들뿐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한다고 날 쫓아올 수 있는 것도 아니야. 오히 려 내 발목을 잡게 되겠지.”
“그럼 난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데? 아무것도 모르겠어. 앞길이 보 이지 않는다구……!”
간신히 틀어막고 있던 감정의 댐 이 무너졌는지, 서연의 눈동자에서 눈물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다.
누구보다도 절실히 느껴왔던 만 큼 서준은 이 마음을 충분히 이해 했다.
거세게 떨리고 있는 서연의 어깨 위에 조심스레 손을 들어 올린다.
“혹시 우리 어릴 때 이야기 기억 해?”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고정된 시선은 서연이 이 야기를 경청하고 있는 것이라 확신 하게 했다.
“학교 성적도 좋지 못했고, 그렇 다고 내세울 특별한 취미도 없는데 성격까지 까칠해서 항상 너랑 비교
당했었지.”
사실 엄청 옛날이야기도 아니었다.
지구의 시간으로만 보자면 당장 몇 년 전, 대학교를 졸업하고도 별 반 다르지 않았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서준은 철이 들지 못해서 부모님이랑 잦은 다툼을 벌여왔다.
그리고 서연은 스스로의 화조차 다스리지 못하고 씩씩거리는 철없 는 서준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주었 었다.
“그때마다 나한테 해줬던 말 혹 시 기억나?”
서연 또한 명확하게 기억을 하고 있는지 곧장 입술을 달싹인다.
“사람은 꽃과 같다.”
“모두가 꽃봉오리를 피우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하지. 하지만 서로가 조금씩은 다른 만큼 그 세월이 다 를 수밖에 없다, 고.”
자연스럽게 서준이 중간에서 말 을 이었고, 서연이 항시 단호한 어 투로 해주던 마지막 말이 다시 상 기됐다.
“조금 늦게 피우는 꽃은, 대신에 더 크고 아름다울 것이다……
“내가 보장할게. 서연이 네가 피
울 꽃은 지금의 나보다 더 웅장하 고, 화려할 거라고.”
단호한서준의 말에도 서연은 고 개를 내젓는다.
“지금은 그때랑 세계가 많이 달 라졌어. 만약에라도 내가 성장을 하 기 전에 오빠가 죽게 된다면……
“난 절대 죽지 않아.”
“세상에 절대는 없는걸?”
“알아, 하지만 난 여태껏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어.”
일말의 흔들림도 존재하지 않는 서준의 모습에서연의 눈동자가 흔 들리기 시작한다.
“심마(心魔)에 잡아먹히지 마. 나 를 믿고 너 스스로를 믿어……. 그리고 처음 각성자가 되었을 때도 절대로 다치지 않을 거라고 약속하 지 않았던가? 아직까지도 유효하니 까 그건 걱정할 거 없다고.”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무언가 결 심을 내렸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성장을 향한 마음이 사라졌을 리 는 없었다.
‘애초에 나라도 포기하지 않았겠 지.’
하지만 지금처럼 과격하면서도 무식한 방법을 고수하지는 않을 것 이다.
적어도 심마에 빠져 주화입마가 올 일은 없어졌다는 것이다.
사실 가장 쉽게 서연의 마음을 다잡을 수 있는 방법이 존재했다.
‘내가 수련을 도우면 되겠지.’
이미 걸어온 길인 만큼 서연의 능력을 이끌어내는 것이 불가능은 아닐 터였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스스로가 나아갈 길에 대해서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서연에게 가르침까지 내주는 것은 자만이 었다.
더군다나 누군가를 가르쳐 본 적 도 없으니 시간이 얼마나 더 걸릴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서준은 냉혹한 현실에 조금 신경 질이 난다는 듯 옆머리를 긁었다.
‘가장 좋은 거는 시간과 실력이 있으면서도 가르침을 내려 본 경험 이 있는 자에게 배우는 건데……. 스승으로 적합한 인재가 없을까?’
마땅히 떠오르는 이가 없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조
건을 충족할지라도 서연의 재능, 성장 속도를 감당할 수가 없기 때 문이었다.
조금이나마 가능성을 가진 이들 은 애초에 개인의 성장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바쁜 이들이 대다수였다.
“굳이 뽑자면……. 정복왕뿐인데.”
그럴 순 없었다.
일전에 수련을 시켜준 것도 정복 왕의 선심이었다.
애초에 지금 정복왕은 균형을 맞 출 수 있는 해답을 찾기 위해 매우 바쁠 터였다.
이미 갚아야 할 것이 많은데 더 많은 빚을 얹어서는 안 된다고 생 각했다.
“지금으로써는 방법이 없나.”
답을 찾을 수 없는 곤란한 상황 에서준이 애꿎은 돌덩이만 발로 툭툭 건드릴 때였다.
[정복왕이 자신의 성역에 사용자 ‘한서준’을 초대합니다. Y/N.]
“뭐야? 내 속마음이라도 읽은 거 야‘?”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읊은 서준이 헛웃음을 홀린다.
다소 당황스럽긴 했지만 지금 서준의 입장에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 었다.
서준은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금세 다시 오실 줄 알았습니다, 주인님께서 기다리십니다. 어서 가 시지요.”
이번 역시 서준을 먼저 맞이한
것은 중후한 신사의 모습을 한 아 벨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첫 방문 때는 상당히 여유로워 보였다는 점.
중후한 외모 때문인지 몰라도 관 용과 같은 여유가 느껴졌을 정도였 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서준을 안내하는 움직임이 재빠 르다.
‘집의 형태가 조금 바뀐 것 같은 데?’
한눈에 담을 수 있을 만큼 자그 마한 나무집뿐이었기에 기억은 명
확했다.
하지만 지금 서준이 도착한 곳은 처음 정복왕과 만났던 나무집의 모 습이 아니었다.
흡사 성과도 같은 거대한 저택의 모습.
확연하게 바뀐 모습에서준의 시 선이 분주히 움직인다.
다행히도 궁금중은 오래가지 않 았다.
“그리 놀라실 것 없습니다, 다른 외부의 사신들을 맞이하거나 업무 를 보실 때 사용하는 건물입니다.”
중세 서양풍의 대저택을 떠올리
게 만들 정도로 거대한 복도를 계 속해서 거닐고 있던 와중, 아벨이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일종의 접대 및 업무실 같은 곳 인가 보네요.”
“맞습니다.”
아벨과 대화를 주고받자 자연스 레 의문이 가셨다.
정복왕은 우주의 패자라 불리는 존재다.
본인 스스로가 욕심을 부리지 않 는 성격이라 할지라도 외부에서 보 이는 모습은 달라야 한다.
왕이 된 자의 위엄과 위용이 있
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서준 또한 천마로 군림하 던 시절 억지로라도 위용을 보일 수 있는 건물을 지어 올린 적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오히려 이런 대저 택 정도는 정복왕의 능력에 비하면 소박하다고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갖가지 생각을 하며 거닐고 있는 사이, 어느새 원목으로 만든 커다 란 갈색 문 앞에 당도해있었다.
고풍스러운 문 앞에서 아벨이 조 심스럽게 노크를 했다.
“주인님, 손님께서 도착하셨습니
다.”
전과 달리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달라진 것은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전과 달리 아벨은 직접 방문을 열지 않았다.
아벨은 뒷걸음질 치는 것으로 방 문과의 거리를 벌리며 물러서며 말 했다.
“들어가셔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들어가기 전 어느 정도 마음의 준 비를 해두시는 게 좋으실 겁니 다……. 그럼 이만 물러나 보겠습
니다.”
고작 문을 여는 것뿐인데 알 수 없는 경고를 남긴 아벨은 곧장 자 취를 감추었다.
다소 의문을 느꼈지만, 어차피 직접 겪어보면 될 일이었다.
서준이 망설임 없이 방문을 열어 젖히는 순간이었다.
화악……!
눈이 멀 것 같은 광명이 방 안에서 터져 나온다.
단순한 빛이 아니었다.
광명이 품고 있는 힘에서준이
위압감과 경계심을 느낀다는 것이 었다.
본능적인 감각에 마른침이 목울 대를 넘어갔고, 등 뒤에서는 식은 땀이 차오른다.
반쯤이라고는 하나, 찬란한 광명 에서준의 넋이 나가버렸다.
“멍하지 서 있지 말고, 어서 들 어와서 문을 닫아!”
다행히도 정신을 일깨워내는 정 복왕의 목소리에서준의 몸이 반사 적으로 움직였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