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권 12화
312화
삼십 분쯤 흐른 뒤, 휘노소프가 어찌나 분주히 움직였는지 예상 소 요 시간보다 2배 빠르게 게이트가 연결되었다.
“본부에 소식을 알려 연합군의 증원을 보낼까요?”
“아니, 내가 돌아오기 전까지 아 무도 게이트를 넘지 못하게 해줘.”
“알겠습니다.”
고개를 주억인 서준이 나라연천
과 함께 게이트를 넘어선다.
그리고 곧이어 마주한 풍경에 눈 살이 크게 찌푸려졌다.
자욱한 안개가 드리운 세상.
안력을 돋아 너머를 꿰뚫어 보니 하늘과 땅이 기이한 형태로 뒤섞이 고, 재조립되어 있었다.
무언가 뒤틀리고 괴기스러운 광 경, 일반적인 세계라고 볼 수 없는 모습이다.
“여기가 정말 남도 차원이라고?”
“좌표는 여기가 확실합니다.”
저도 모르게 흘러나온 말에, 뒤
를 따라 게이트를 넘어온 나라연천 이 씁쓸한 미소를 홀리며 답했다.
“세계를 해체하고 새롭게 구축하 는 능력... 침공해온 적이 가진
능력 중 한 가지로 추측됩니다.”
“대체 누가……
서준은 우주에 자리 잡은 신이라 는 자들이 지구의 신화, 역사와 관 련되어 있단 사실을 깨닫고는 적지 않은 지식을 습득해왔다.
덕분에 능력만으로도 적이 누구 인지 대강 추측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정도로 특이한 능력이라 면……
서준이 미간을 찌푸린 채로 턱에 손을 괸다.
허나, 고민은 오래 이어지지 않 았다.
짙은 안개 너머로 서준의 신경을 거스르는 것들이 있었다.
분명 한 명, 한 명 보자면 평범 한 사람과 같은 모습.
하지만 육신이 이어져서 뭉쳐져 있거나, 아니면 완전히 다른 형태 의 종족으로 변환되어 있었다.
“저기 보이는 사람들은……?”
“……맞습니다. 남도 차원의 백
성들입니다.”
“빌어먹을……
서준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이유도 없이 갑자기 침공해서는 이런 만행을 저지르는 이유가 뭐 지?”
“……죄송합니다, 자세한 내막을 밝히기에는 저의 힘이 부족했습니 다.”
“그런 표정 짓지 마, 너한테 책 임을 묻는 게 아니니까.”
나라연천의 입장에서도 엄연한 피해자였다.
오히려 누구보다도 침공의 사유 를 알고 싶을 것이다.
“어찌 됐든…… 여기서 그 침공 자를 찾아야 한단 건데……
“예상되는 위치가 있습니다.”
나라연천의 검지가 두터운 회색 안개 너머, 검은 먹구름이 유달리 자욱한 지역을 가리켰다.
“확실히 의심스럽긴 하네.”
압도적으로 두텁다.
눈에 내력을 집중해 검은 구름을 꿰뚫어 보려 했지만 서준의 힘으로 도 이 거리에서 그 너머를 보지 못
했다.
“제가 맞붙었던 놈이 직접 다루 던 힘의 기운과 비슷합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강한 놈인 가 보네.”
서준이 턱을 쓰다듬었다.
그는 무언가를 꿰뚫어 보는 능력 은 없었다.
하지만 가진 힘은 내우주의 신격 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
굳이 따지자면 주신(主神)의 영 역에 가장 가까이 있는 존재라 볼 수 있었다.
한데 그런 서준이 아무리 거리가 멀다지만 보고자 해도 볼 수 없는 상태였다.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다.
‘하긴…… 대신에 오른 나라연천 이 당할 정도의 상당한 강자니까.’
최소한 맞붙었던 내우주의 신격 들과 비슷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는 뜻일 것이다.
애초에 적은 세계 하나를 완전히 분해하고 재조립하는 능력을 지닌 존재였다.
“알고 있겠지만, 어느 정도 각오 는 해야 할 거야……. 어쩌면 지금
이 세계는 모두가……
“마음의 준비는 해두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나라연천이 아랫 입술을 질끈- 깨문다.
서준은 고개를 주억이고는 검은 구름을 다시 바라보았다.
“지금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저 검은 구름 안의 침입자를 죽여 복 수해주는 것뿐.”
꽤나 거리가 있다지만, 초광속의 속도로 움직이는 서준에게 있어 그 렇게 큰 걸음을 필요로 하지는 않 았다.
“직접 볼 거지?”
“가능하다면 그러고 싶습니다.”
“조금 어지러울 거야.”
고개를 끄덕이는 나라연천을 허 공섭물의 묘리로 들어 올린 후, 혼 돈의 힘을 이용하여 호신강기를 둘 러주었다.
나라연천은 다소 당황한 듯했지 만, 곧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최대한 막아주겠지만 부담 이 상당할걸. 빠르게 움직일 거거 드 ”
스스로 호신강기를 두른 나라연 천이 답했다.
“준비됐습니다.”
고개를 주억인 서준이 검은 구름 을 향해 달려가려던 순간이었다.
“그런데 저거 아까보다 가까워진 것 같지 않아?”
착각이 아니었다.
멀리서 보이던, 검은 구름은 삽 시간에 덩치를 키워가며 거리를 좁 혀오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이리로 오는 것 같 은데?”
서준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 둘 의 머리 위로 검은 구름에서 뿜어
져 나온 가닥이 허공에서 뭉쳐진다.
꾸륵…….
[아아, 잠시 테스트가 있겠습니 다.]
이어서 검은 구름이 한곳에 뭉치 기 시작하더니, 사람의 형태를 취 해가기 시작한다.
허나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사 람의 모습은 아니었다.
“삐 에로?”
갈래갈래로 나뉜 모자, 체크무늬 의 옷을 몸에 딱 달라붙게 입은 모 습, 서커스장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화려한 복장을 한 사내가 모
즙을 드러낸다.
“취향이 상당히 특이하네.”
[다행히 잘 보이고 들리나 보네 요.]
그러나 허공을 유유자적 노닐고 있는 적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새하얀 바탕에 붉은 색깔로 찢어 진 입을 표현해놓은 부분이 인상적 인, 그야말로 삐에로 복장에 어울 리는 가면도 함께 쓰고 있었기 때 문이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런데 생각 했던 것보다 더 늦으셨네요, 나라 연천이었나? 기껏 선심 써서 살려
보내줬더니 이렇게 행동이 굼떠서 야 당신은 정말 쓸모가 없네요.]
“네놈……
나라연천의 두 눈동자에는 감출 수 없는 격렬한 분노가 엇비쳤다.
하지만 눈앞의 삐에로는 전혀 개 의치 않는다.
찢어진 가면의 입술이 익살스러 운 미소를 그린다.
[주제를 아세요, 당신 같은 저급 한 것과 만담을 나누기 위해 이곳 에 온 게 아니니까요.]
펑-!
서준이 내지른 주먹에서 발생한 기파에 검은 구름으로 만들어진 삐 에로의 신체가 커다란 소리와 함께 폭발했다.
물론, 머지않아 또다시 검은 구 름이 뭉쳐지며 본래의 모습을 되찾 아냈다.
[성격도 급하셔라, 제 형제인 토 르를 죽였다는 소문이 자자하던데, 이렇게 직접 볼 수 있게 되어서 영 광이네요.]
서준의 두 눈이 가늘어진다.
‘토르를 형제라고 부를 수 있는 신.’
동시에 이런 우스꽝스러운 분장 과 기괴할 정도로 장난스러움이 묻 어나는 신은 단 한 명뿐이었다.
“로키, 동생으로서 형의 복수를 하러 온 거냐?”
[그럴 리가요, 어차피 사이도 별 로 좋지 않았거든요, 애초에 지금 의 저는 그 못난이 형과 급이 다르 다고요! 그러니까 저는 원한이 아 니라 그냥 개인 비즈니스로 용무가 있어서 찾아온 것뿐입니다!]
“난 너와 나눌 대화가 없는데.”
싸늘한서준의 반응에도 로키는 입을 멈추지 않았다.
[제가 나눌 대화가 있거든요. 당 신도 제 이야기를 들어서 손해 볼 건 없으실 겁니다.]
“이렇게 너랑 무의미한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가 손해야.”
차갑게 말한서준이 혼돈의 힘을 끌어 올렸다.
가는 길에 쓸데없는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 단숨에 길을 돌파할 생 각이었다.
[안 되는데……! 아직 손님을 맞 이할 준비가 덜 되어있거든요.]
“잘됐네, 지금 바로 죽여주러 갈 게.”
당장이라도 앞으로 뛰쳐나갈 것 같은 서준의 모습에 로키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는다.
[자, 잠시만요! 그러면 이건 어때 요? 한 가지 거래를 하죠, 저에게 조금의 시간을 주신다면 특별히 바 라하를 포함하여 아직 건드리지 않 은 남도의 백성들을 살려드리도록 하죠.]
“바라하……!”
나라연천의 당황스러운 외침과 함께 서준이 동작을 멈추자, 허공 을 한 바퀴 크게 회전한 로키가 손 바닥을 펼치며 익숙한 모양의 인형
을 만들어 낸다.
서준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너……
[로키는 장난을 좋아한답니다! 그 유명하다는 한서준 님과 아주 재미있는 놀이를 함께 즐기고 싶거 든요, 곧장 올 생각은 말아주세요! 안 그러면……』
허공에 나열된 인형들의 목을 그 어 보인 로키의 모습이 다시금 검 은 구름의 모습으로 바뀌어 사라져 간다.
[아끼는 신하가 거느린 충직한 전사와 선량한 백성들에게 괴로운
일이 생길 테니까요.]
흩어져가는 로키의 모습에서준 이 헛웃음을 흘렸다.
“ 인질극이 라……
“남도의 백성들이여……. 바라 하……
나라연천이 서준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차원, 남도는 망가져버렸다.
땅덩어리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백성들만 무사하다면 얼마든지 다른 차원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갈 수 있었다.
‘문제는 로키의 손에 잡혀 있다 는 건데.’
만약 로키가 남아있는 바라하와 백성들마저 사라지게 한다면.
차원 남도는 완전히 역사의 뒤안 길로 사라지게 될 터였다.
나라연천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 가 갔다.
“짜증나게 나오네.”
삐에로 복장에 다소 장난스러움
이 묻어나는 말투 탓에 더 마음에 들지 않는 로키를 떠올린 서준의 입가가 비틀린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여러모로 마 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감사관, 아서의 동료라 고?’
생각 외의 키워드를 들었다.
‘감사관의 동료라……
마지막 감사관이 죽기 전 남겼던 진(Gene)이라는 집단이 문득 머릿 속을 스쳐 지나간다.
여태껏 우라노스와 야훼가 소속 의 전부라고 생각한서준이었다.
‘어쩌면 생각했던 것보다 많을지 도 모르겠네.’
동시에 궁금증이 한 가지 더 피 어났다.
‘놈들의 정확한 목적이 뭐지?’
자연스레 입가로 미소가 피어난 다.
“재미있네.”
“주군?”
나라연천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어왔다.
고민에 빠진 것 같던 서준이 갑 작스러운 미소를 보였으니 의아한
것도 당연해 보였다.
“미안하지만, 난 쉬운 길을 놔두 고 어렵게 돌아가는 걸 좋아하지 않아.”
이어진 말에 나라연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부탁드립니다, 염치없는 것 알 지만……
“그렇게 부탁할 거 없어, 말했잖 아. 신하를 돕는 것은 왕의 도리라 고.”
짧게 웃으며 나라연천의 어깨를 두드린 서준은 먼 곳에 보이는 검 은 구름올 바라본다.
“감히 내 앞에서 인질극을 벌이 겠다고?”
사실, 나쁘지 않은 수다.
서준은 동료와 신하를 상당히 아 낀다.
그리고 나라연천은 가장 아끼는 신하 중 한 명이었으니 말이다.
당연하지만, 그가 절망에 빠지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미안하다고 말한 건, 아무 래도 복수의 현장을 직접 두 눈으로 보여주기는 힘들 것 같아서 한 말이거든.”
평범한 적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내우주의 신격 중 한 명 일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심지어 감사관, 아서가 동료로 둘 정도였다면 그 힘과 실력 또한 상당할 것이다.
이번 싸움은 주변에 끼치는 여파 가 상당히 클 수밖에 없었다.
“바라하와 백성들을 바로 이리로 보내도록 할 테니, 곧장 데리고 도 망치도록 해.”
서준의 의중을 간파한 나라연천 이 묵묵히 고개를 주억인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서준의 전신에 혼돈의 힘이 둘러 진다.
혼돈의 장막.
그 어떤 때보다 견고했다.
“그럼 이따 보자.”
서준의 몸에서 회색빛 혼돈의 힘 이 폭발하는 화산과 같은 기세로 솟구쳐 나온다.
이후 서준의 신형은 삽시간에 나 라연천의 눈앞에서 사라진다.
대신하여 먼 곳에서 검은 구름에 갈라지고, 찢어지는 것이 나라연천 의 두 눈에 훤히 보였다.
머릿속에 해답이 내려지기도 전 이었다.
콰콰앙-!
정말로 화산이 폭발하는 것 같 은, 굉음이 귓전을 강타한다.
쾅! 쾅!
그 뒤를 따라 아주 먼 곳에서 또 한 번의 굉음이 터져나왔다.
뒤늦게야 나라연천은 검은 구름 의 중앙에 무언가가 지나간 거칠고 커다란 흔적이 남았음을 인지할 수 있었다.
“대체 언제……?”
의문이 시작될 무렵에는, 서준은 이미 로키에게 인질로 잡혀 있던 바라하와 남도의 백성을 구해낸 뒤 였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