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권 24화
299화
온몸을 휘감는 기운을 자연스레 받아들이고는 회색빛 공간으로 이 동한서준의 고개가 젖혀졌다.
“여긴?”
물론, 익숙한 풍경이었다.
과거, 파편과 대전을 벌였던 그 공간이었으니 말이다.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시야에 들어오는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존재로부터 살의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가이사?”
서준의 물음에 시선을 돌린 정복 왕은 희미한 미소를 그린다.
“나를 왜 이곳으로 부른 거지? 아니, 왜 나에게 계속 친절을 베푸 는지 이유가 궁금해.”
분명, 적에게 호감을 가지고 선 물을 내주는 바보는 없었다.
그렇다면 정복왕은 확실히 서준 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자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전적으로 믿을 수 있냐 묻는다면 그 또한 대답할 수 없었
‘과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호의가 과 하단 말이었다.
그렇기에 풀리지 않는 ‘왜?’라는 의문을 해소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서준의 질문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침묵을 지키고 있는 정복왕은 환 한 미소를 그리고 있던 입가에 씁 쓸함을 비출 뿐이었다.
그러고는 곧 고개를 내저었다.
“대체 넌 누구야. 무슨 목적이
지?”
이해하기 힘든 정복왕의 반응에서준이 의문을 느낄 때였다.
터벅-
적막 속, 가벼운 소리와 함께 정 복왕이 두 팔을 가슴 앞에 올려놓 았고, 비스듬히 상체를 세우고는 두 다리를 어깨너비만큼 벌렸다.
무인인 서준이 저 자세가 의미하 는 바를 모를 리가 없다.
“싸우자……는 말인가?”
분명, 살의는 없다.
목숨을 걸고 벌이는 생사 결단의
싸움은 아니란 말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답은 하나다.
“비무인가?”
서준의 물음에 정복왕이 연신 고 개를 주억인다.
수많은 의문 중 단 한 가지도 해 결되지 않았다.
하지만 계속해서 도움을 줬었던 정복왕이 아무런 의미도 없이 초대 하고는 뜬금없는 비무를 벌일 리는 없었다.
“좋아. 원하는 대로 해줄게.”
서준이 마찬가지로 자세를 다잡
입가에 미소를 그리고 있던 정복 왕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진다.
공기가 변화하는 순간이었다.
눈앞에 있던 정복왕의 모습이 사 라진다.
순간적으로 기척이 흐르는 것을 느낀 서준의 발끝이 우측 허공을 쓸고 지나가는 순간이었다.
팟-!
어느 순간 우측에 나타나 서준의 발목을 잡은 정복왕이 고개를 내젓 는다.
“이제부터가 시작이야.”
서준이 피식- 미소를 홀린다.
잡혀있는 발을 축으로 몸을 회전 시킨 서준의 주먹이 정복왕을 향해 쇄도한다.
그러나 닿지 않았다.
아니, 닿지 못했다.
회색빛 파장이 단숨에서준의 몸 으로 파고들었다.
받아치기 위하여 혼돈의 힘을 일 으켰지만, 포악하게 밀고 들어오는 정복왕의 기운에는 혼돈의 힘조차 도 겁을 먹은 듯 몸을 움츠린다.
‘이게 무슨……
딱딱하게 굳은, 어떤 의미로는 희미한 감정조차 느껴지지 않는 눈 을 마주한 순간에는 전신에 소름이 돋아났다.
단순한 정복왕과의 격의 차이 때 문은 아니었다.
‘아무것도 없어?’
너머로 보이는 정복왕의 내면에 는 그 어떤 것도 존재치 않는다.
마치 공허(空虛)의 세상을 마주 한 것 같았다.
서준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리
고 있는 사이, 정복왕이 회심의 미 소와 함께 쥐고 있던 다리를 놓았다.
묻고 싶은 것이 한 가지 늘어났 지만, 질문을 던지는 것은 무의미 할 것 같았다.
‘우선은 이 싸움에 집중한다.’
혼돈의 힘을 폭발시킨 서준이 발 을 놀린다.
단숨에 정복왕과의 거리를 좁혀 품으로 파고든다.
뻗고 있는 일장(一掌)에는 혼돈 의 힘이 회전, 응축되고 있었다.
정복왕은 여전히 무심한 눈동자
로 손을 부드럽게 휘저었다.
뻗어져 나온 회색빛 기운은 서준 이 쏜 혼돈의 힘을 마치 거짓말인 것처럼 흩어버렸다.
“..if
놀라 서준이 이번에는 개벽의 검 을 빚었다.
이후 허리를 비틀어 왼손에 쥔 개벽의 검을 거칠게 휘둘렀다.
포악한 개벽의 검이 단숨에 정복 왕의 머리를 가르는 데 성공한 듯 했다.
파앗-!
순식간에 벌어진 정복왕의 발길 질이 혼돈의 힘으로 이루어진 개벽 의 검을 깨뜨리고 먹이를 노리는 뱀과 같은 움직임으로 서준의 손목 을 빠르게 낚아챈다.
쾅-!
허무할 정도로 쉽게 바닥에 내팽 개쳐진 서준은 멍한 눈동자로 회색 빛 하늘을 바라보았다.
압도적이다.
단순히 혼돈의 힘을 다루는 솜 씨, 격의 문제가 아니다.
‘이런 게 가능했다고?’
마치, 끝이라 불리는 무의 극(極) 을 본 느낌이었다.
물론, 직접 본 적은 없었기에 확 신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무극이 실존한다면 눈앞 의 정복왕의 것이 아닐까 하는 생 각이었다.
가벼운 듯하면서 가볍지 않았고, 무거운 듯하면서 무겁지 않았다.
그리고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 우면서도 강력하다.
동시에 무공의 모든 묘리, 동작 하나하나에 혼돈의 힘이 담겨 있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 가진 힘과 능력으로 펼치는 공격으로는 결코 정복왕에게 닿지 못할 것이라고.
“하하하……!”
저도 모르게 큰 웃음을 터트린 서준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벽에 막혀 있는 나를 수련시켜 주겠다는 거였구나.”
정복왕이 환히 미소를 띤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다하지 않겠어. 고마워, 정복 왕.”
서준의 눈빛에 기운찬 열망이 반 짝인다.
눈앞의 정복왕은 무극에 다다른 존재.
아니, 지금은 정복왕의 경지 따 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혼돈의 힘에 굴복해 저도 모르게 무공을 만들어내는 것은 불가능하 지 않을까 생각하던 것을 완전히 뒤집게 만드는 인물이 나타났다는 게 중요했다.
‘불가능한 것은 없어.’
그 증거가 눈앞에 있다.
그리고 자신도 그렇게 될 수 있 다고 말하고 있었다.
어둠만이 존재했던 길에 작은 빛 이 보이기 시작한다.
확신이 차오른다.
‘할 수 있어.’
이 수련의 끝에 도달한다면 바라 던 대로 힘을 다룰 수 있게 될 것 이라는 확신이 생겨났다.
* *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수련, 서준 은 미친개처럼 정복왕을 향해 맹공 을 퍼부을 뿐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정복왕에게 닿는 공격은 없었다.
단숨에 거리를 넓게 벌려, 서준 의 공격들을 피한 정복왕이 고개를 내젓는다.
이어서 뻗어진 손이 서준의 신형 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아직 안 끝났어-!”
몸을 일으킨 서준이 또다시 달려
정복왕은 그 모습을 보며 볼을 긁적거렸다.
“이제, 이제부터가 시작이야.”
생사의 결투가 아닌 서로의 무를 나누고 견주는 비무였기에, 만에 하나의 상황을 대비하여 스스로 힘 을 억제했다.
하지만 공방을 이어갈수록 확신 이 든다.
전력을 다한다고 할지라도 절대 정복왕은 죽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오히려 전력을 내길 바라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어중간한 공격을 내지르려 하면 정복왕은 곧장 손을 놀려 서준을 제압해내고 있었다.
차랑-
빛의 속도를 가로지른 서준의 개 벽의 검이 정복왕의 머리카락 끝을 스치고 지나간다.
“……?!”
이어지는 연격을 막기 위해 양손 을 이용해 방어에 들어간 정복왕의 표정이 처음으로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서준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계 속해서 공격을 이어 나간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을 만큼의 무한한 공방이 이어졌 다.
그러나 서준의 개벽의 검은 결국 첫 일격에서 정복왕의 머리카락 조 금을 베어간 것이 최선이었다.
“후우, 후우……
땀이 비처럼 쏟아져 온몸을 적신 탓에 깃털처럼 가벼웠던 몸은 천근 만근이었다.
하지만 의식은 그 어느 때보다 뚜렷했다.
‘틈이 어디지?’
연신 눈동자를 굴려보았지만, 틈 은 존재치 않는다.
눈앞의 존재는 정말 무의 극에 다다른 존재라고 불려도 될 정도로 완전하다.
‘그렇다면, 틈을 만들 기회는
순간의 가속을 이용한 기습?
어설프다.
정복왕 정도의 강자가 같은 술수 에 당할 리가 없다.
오히려 전보다 못한 결과를 초래 할 뿐이다.
전력을 다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힘을 쓴다면, 작은 부상쯤은 입힐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까지가 한계다.
쉴 새 없이 공격을 퍼붓던 서준 은 침착하게 현재 지친 몸을 추스 른다.
무작정 달려든다고 해서 성장을 할 수 없다면 다른 방식을 찾아봐 야 한다.
‘이런 식의 수련을 하는 이 유……. 내게 바라는 성장이 뭘까?’
분명, 많고 많은 방식 중에서 비 무를 고른 이유가 있을 터다.
‘어설픈 공격들은 사전에 제지하 고 가능성이 보이는 것은 받아준 다.’
하지만 그마저도 닿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길이 아니라는 것이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복왕은 공 격을 제지하지 않는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자연스럽 게 받아칠 뿐이었다.
‘설마......?’
눈을 크게 뜬 서준이 다시 발을 놀린다.
그에 맞춰 정복왕이 자세를 다잡 더니 쏜 공격을 가볍게 받아쳤다.
또 바닥에 내팽개쳐지게 되었지만, 서준의 입가에는 오늘 가장 흡 족한 웃음이 피어나고 있었다.
“찾았다.”
애초에서준은 정복왕과의 비무 를 하기 전부터 제대로 된 길을 보 지 못하고 있었다.
비무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리 가 없었다.
하지만 정복왕은 다르다.
이미 길을 걸어갔고, 알고 있었
눈앞에 바로 답이 있다는 것이 다.
서준의 머리가 계속된 공방 속에서 보았던 정복왕의 모습들을 상기 한다.
기본적으로 정복왕은 혼돈의 힘 을 부드럽게 다루는 경지에 있었다.
‘포악함을 드러내는 것은 오직 눈앞의 적에게뿐이야.’
주인에게는 절대적인 복종을 보 이고 있었다.
기억을 더듬으며 모습을 복기한서준은 정복왕과 같은 형태로 부드
그 느낌은, 마치 자기 집에 누워 있는 것처럼 푸근했다.
‘이게 내가 다루는 힘.’
혼돈의 힘이 포악했으나, 결국 인정받았고 자신의 앞에 복종시켰 다.
다루고자 한다면 언제든지 다뤄 낼 수 있는 게 정상이었다.
그런데도 혼돈의 힘이 서준에게 계속 달려들었던 데는 이유가 있었다.
‘내가 틈을 보였기에 덤벼들었을 뿐이야.’
과거, 혼돈의 힘을 다룰 때 항시 초조하고 급박함 혹은 다급함을 느 꼈었다.
당연하지만 틈이 생길 수밖에 없 었다.
그리고 혼돈의 힘은 그 틈을 파 고들려 했던 것뿐이었다.
결국, 모든 건 마음먹기에 따른 것이다.
냉정한 눈을 한서준이 허공을
향해 손을 내뻗는다.
지지징-
순수한 혼돈의 힘이 모여들고 개
벽의 검을 빚기 시작한다.
더 강대한 혼돈으로 빚어졌음에 도 불구하고 이전처럼 힘이 폭주할 듯이 날뛰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전보다 더 차분하게 가라 앉아 있었다.
지금 손에 쥐어진 것은 단순히 개벽의 검이 아닌, 혼돈의 주인이 굳건한 마음으로 빚어낸 심검(心 劍)이었다.
탁탁탁-!
입가에 호선을 그린 서준이 발을 놀린다.
여전히 닿을 수는 없다.
애초에 정복왕은 무극에 다다른 존재.
당장 얻은 깨달음 하나로 닿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허나,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수련은 이제 시작했을 뿐이야.’
아직 수없이 많은 기회가 남아있 다는 것이다.
지금 당장으로는 하나의 깨달음 이었지만, 하나를 알았으면 열도 알 수 있는 법이었다.
‘닿을 수 있어.’
서준의 눈동자에는 숨길 수 없는
탐욕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런 서준을 마주하고 있는 정복 왕의 입가에는 어째서인지 어느 때 보다도 환한 미소가 피어나고 있었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