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권 8화
283화
마음 같아서는 당장 명왕 모두를 만나기 위해 출정하고 싶었지만, 그 전에 몇 가지 받은 부탁과 쌓인 업무를 처리하느라 바로 움직일 수 없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며칠을 보 내고, 마침내 서준은 나라연천에게 게이트의 개방을 부탁했다.
“곧 있으면, 하데스가 있는 차원 레테로 향하는 게이트입니다.”
천천히 열리는 게이트 앞에서 몸 을 풀고 있는 서준의 모습을 지켜 보던 나라연천이 조심스레 입을 열 었다.
“……정말 혼자 가셔도 되겠습니 까?”
“큰일은 없을 거야.”
“절대 쉽게 허락해주지 않을 겁 니다.”
나라연천이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알고 있다.
사자(死者)를 살려내지 않는 것 은, 죽음을 관장하는 자들이 오랜 시간 지켜온 규율이다.
말 그대로 이례적인 일이었기에 허락해줄 리가 없다는 것이다.
제법 오랜 시간의 설득 혹은 그 에 합당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 었다.
“하지만 함께 간다고 해서 쉽게 허락해주는 건 아니잖아?”
반박할 수가 없는 서준의 말에 나라연천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운 다.
“너무 의기소침하지 마, 네가 맡 아줬으면 하는 일도 있으니까.”
하데스가 있다는 사실을 제외하 고는 어떤 성향, 어떤 사상을 지니 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차원이다.
인간에게 강한 악의를 가진 생명 체가 존재할 수도 있는 만큼, 만에 하나의 상황에 대비하여 나라연천 이 게이트의 입구를 지키고 있어야 했다.
“이번에도 뒤를 좀 부탁할게.”
“맡겨만 주십시오.”
나라연천은 상격의 투신으로, 절 대 쉽게 지지 않을 강자였다.
대신(大神) 정도의 강자가 움직 이지 않는 이상 모두 가볍게 제압
할 수 있을 것이다.
든든한 대답에 불안했던 마음이 가신다.
“고마워, 그럼 믿고 다녀올게.”
나라연천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했 다.
“그 누구도 지나가지 못하게 하 겠습니다.”
마침내 서준이 믿음직하다는 미 소를 보일 즈음, 나라연천이 입을 열었다.
“레테로 향하는 게이트가 열렸습 니다, 바로 들어가셔도 됩니다.”
고개를 주억인 서준은 발걸음을 내딛는다.
“갔다 올게.”
이윽고, 서준은 하데스가 있는 차원, ‘레테’로 향하는 게이트를 통 과한다.
게이트를 넘어선 서준이 마주한 것은 황성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는 매우 화려하고 거대한 성이었다.
“여기가 레테......
주변을 둘러보고 있던 그 순간, 메시지가 전해진다.
띠링-!
[레테의 중심, 하데스의 영토에 진입했습니다.]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를 읽어가 던, 서준의 입가가 호선을 그린다.
“좋네.”
시스템을 통해 본 메시지 창을 생각한다면 이곳은 명왕, 하데스가 관리하고 있는 땅이 틀림없었다.
별다른 방해 없이 바로 본진에 도착한 것이었다.
“옥황이 신경을 많이 써줬네.”
서준이 미소를 동반한 칭찬과 함께 몸을 공중에 띄웠다.
어디로 가야 할지 길을 헤맬 필 요도 없었다.
여기가 중앙이라면, 하데스가 있 을 만한 곳은 한 곳뿐이다.
‘저 거대한 성.’
고개를 주억인 서준이 곧장 눈앞 의 성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물론, 마음먹는다면 곧장 하늘을 날아 성의 내부로 진입할 수 있을 것이다.
‘가능하면 얌전히 들어가는 게
좋겠지.’
지금 목표는 전쟁이 아닌 하데스 를 만나 생사부 수정의 동의를 얻 어내는 것이다.
굳이 분쟁을 만들어서 좋을 것이 없었다.
그렇기에서준은 차분한 걸음으로 성을 향해 걸어가는 것을 선택 했다.
그러나 이런 서준의 노력이 무색 해지는 상황이 펼쳐지는 데에는 그 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척-!
성의 정문으로 추정되는 곳에 다 다르기 무섭게 수십에 달하는 테온 의 병사들이 활시위를 겨눴다.
“이곳 테온 성은 현재 폐쇄되었 습니다. 망자를 더 받지 않고 있으 니 당장 돌아가십시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생각 했던 것보다 더 푸대접을 받고 있었다.
서준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병사 들의 중심에서 있는 지휘관으로 추정되는 사내를 바라본다.
“하데스와 잠깐 대화를 하러 왔 을 뿐인데, 조용히 지나갈 수는 없 을까?”
귀찮은 상황을 피하기 위해 은연 중에 기운을 흘리며 물음을 던졌지 만, 놀랍게도 돌아온 것은 냉대였 다.
시위를 당기고 있던 병사들이 일 제히 위협사격을 가하고는 마치 도 깨비불을 두른 것같이 빛나는 광휘 의 지휘관이 큰 목소리로 외친다.
“다시 한번 경고하겠다, 테온 성 은 폐쇄되었다, 당장 돌아가도록 하라!”
풀 플레이트 메일을 덮어쓰고 있 는 테온의 병사들을 바라보는 서준 의 눈동자에 흥미가 동한다.
‘제법이네.’
혹여나 정신을 잃게 될까 봐 극 히 미미한 양을 흘려낸 것이라지만, 지휘관으로 추정되는 사내는 오히 려 기운을 되받아치며 위협을 가해 오고 있었다.
‘상격의 신 정도인가?’
뿐만 아니라, 활시위를 겨누고
있는 병사들도 모두 신격을 갖춘 수준급의 강자였다.
‘어느 정도 강할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생각 이상이네.’
서준이 흥미 어린 눈으로 성벽 위 테온의 병사들을 관찰하고 있던 찰나, 지휘관이 다시 한번 소리를 지른다.
“마지막으로 말하겠다, 테온 성 은 폐쇄되었다, 물러나지 않는다면 지휘관이자 문지기의 권한으로 영 멸을 집행할 것이다.”
“망자가 아니라, 리벨리온 연합 의 의장으로서 하데스와 대화를 하
러 왔다만.”
“리벨리온 연합의 의장?”
지휘관은 가늘어진 눈으로 서준 을 훑으며 입을 열었다.
“거짓말하지 마라, 리벨리온 연 합의 의장은 인간이다! 네놈과 같 은 거대한 마기를 품은 존재가 아 니란 말이다!”
지휘관의 목소리에는 매우 큰 분 노가 담겨있었다.
서준이 혼돈의 힘을 다루고 있긴 하나, 근간은 치천마역천지공이다.
그리고 강해져 갈수록 치천마역 천지공의 힘 또한 강해지고 있었다.
상격의 신 정도 되는 강자가 서준의 몸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치천마역천지공을 놓칠 리가 없다는 것 이다.
어떻게 설명을 해줘야 할지 난처 해 서준이 뒷머리를 긁적인다.
“절대로 입성을 허락할 수 없다, 당장 돌아가라!”
올곧은 지휘관의 눈동자에는 사 명감과 더불어 사사로운 분노까지 담겨있었다.
애초에 괜히 사내가 지휘관에까 지 오를 수 있던 것이 아니다.
충직하면서도 우직한 성품을 가
졌기에 하데스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서준이 위치한 테온 성 지대는 레테의 중심, 하데스가 거주하고 있는 왕궁이었다.
지휘관이자 문지기라고 불리는 사내와 같은 우직한 충성심을 가진 이가, 지금처럼 의심스러운 존재를 들여놓는 것을 허락해줄 리가 없었다.
‘특히 마신의 근원 때문에 더욱 더 강렬하게 느껴지겠지.’
하나하나 해명하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치천마역천지공부터 마신의 근원 까지 모두 설명하거나 혹은 리벨리 온 연합의 서신을 통해 공식 성명 을 보내는 것뿐이었다.
여러모로 시간이 소모되는 일이 었다.
당연하지만, 서준의 입장에서는 그리 반가운 상황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날이 잔뜩 선 반응을 보아서는 대화의 장을 열어줄 것 같지도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휘관과 그를 따르는 레테의 병사들은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긴 채로 언제든지 화살
을 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완고한 레테의 병사들 에 태도에서준은 난처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평화로운 방 법으로는 힘들겠네.”
예상외의 전력이긴 하나, 서준의 입장에는 너무나도 손쉬운 상대들 이었다.
작정하고 강행 돌파한다면, 못할 것도 없는 수준이었다.
‘생각해보면 하데스를 만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기도 하니 까.’
소란이 일어난다면, 영토의 주인
으로서 가만히 방관하고 있을 수만 은 없을 것이다.
유일한 문제라고는 다소 오해가 생길 수도 있는 것이었지만, 충분 히 대화로 풀어나갈 자신이 있었다.
‘힘 조절을 확실히 해야겠네.’
서준은 단순히 살육과 파괴를 즐 기는 광인이 아니었을뿐더러, 하데 스에게 오해였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라도 병사들을 죽일 수는 없 었다.
생각을 마친 서준은 곧장 땅을 박찬다.
타닥-!
갑작스런 서준의 움직임에 지휘
관이 다급히 목소리를 높인다.
“쏴라-!!”
머리 위로 쏟아지는 화살 비. 그러나 문제 될 것은 없었다. 가벼운 몸놀림으로 쏟아지는 화
살을 피해낸 서준은 순식간에 성벽
위로 당도했다.
“많이 아프지는 않을 거야.”
친절한 설명을 끝낸 서준이 주먹
을 앞으로 내뻗는다.
하지만 손끝에 걸리는 감각이 없 었다.
후웅-
내뻗은 주먹은 애꿎은 허공만을 갈라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재밌네.”
힘 조절에 실패한 것이 아니다.
지휘관의 수준이 생각보다 높았다.
‘평범한 상격의 신인 줄 알았는 데, 이 정도면 나라연천이랑 비슷 한 정도네.’
상격의 끝자락에 도달한 존재라 는 것이었다.
“허락 없이 황성에 발을 들인
죄, 거기에 본인을 위협한 죄로써 영멸을 집행한다!”
허리를 비트는 것으로 주먹을 피 해낸 지휘관이 날카로운 살기를 뿜 어내며, 서슬 퍼런 말을 홀린다.
그러나 아직 서준의 공격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훌륭하긴 한데, 상대가 너무 안 좋았어.”
내뻗어진 서준의 주먹이 뱀처럼 휘어지더니 허리를 비틀고 있는 지 휘관의 멱살을 낚아챈다.
“잠깐만 눈 감고 있으면 될 거 야.”
미소를 흘린 서준이 손을 마저 뻗었다.
퍼억-!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그의 신형 이 쓰러져 내린다.
마지막 남은 병사들을 정리하기 위해 몸을 날리려던 순간이었다.
“그만.”
읊조리듯이 작은 소리였지만, 성 벽 위에 있는 이들 중에서 그 목소 리를 듣지 못한 자는 없었다.
그렇기에 레테의 병사들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이내, 잽싸게 무릎 꿇으며 소리 친다.
“레테의 주인인 하데스 님을 뵙 습니다!!”
“인사는 됐다, 그보다 그를 병실 로 데려가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마침내 하데스와 마주하게 된 서준의 입가가 호선을 그린다.
본래 목적이었던 하데스와의 만 남을 이룬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금 눈동자에 비친 하데스는 상 당히 흥미로운 존재였다.
칠흑과 같이 어두운 기운은 감히 바닥을 볼 수가 없었고, 은연중에 홀러나오는 마기가 일대를 장악하 고 있었다.
직접 맞붙어본 것이 아니었기에 정확한 수준을 알 수는 없지만, 굳 이 비견한다면 무저갱의 마왕, 마 몬과 비슷한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제법이네.’
전력을 다하여 맞붙는다면 패배 하지는 않겠지만 상당히 고전해야 할 것이다.
무인의 본능이 일어나고 마음 한 편에서 투지가 꿈틀댔다.
‘아쉽지만, 지금은 이럴 때가 아 니지.’
서준이 고개를 저어 미련을 털 때였다.
“리벨리온의 의장이여, 무슨 이 유로 레테에 찾아온 것인가?”
“나를 알고 있나 보네?”
“자네를 모르는 대신은 없을 걸 세.”
“그런가.”
“궁금증이 충족되었다면, 내 질 문에 대한 답변을 듣고 싶군.”
“하고 싶은 대화가, 아니 부탁하
고 싶은 게 한 가지 있어서.”
이어진 서준의 말에 하데스의 표 정이 딱딱하게 굳어진다.
“생사부에 관련된 문제인가?”
“정답.”
당당한 대답에, 미간을 찌푸린 채로 고민을 하던 하데스가 고개를 주억이며 입을 열었다.
“우선 이곳에서 나눌 대화는 아 닌 것 같으니 성 안으로 가서 이야 기하도록 하지.”
서준이 고개를 주억이자, 하데스 가 앞장서 걸어 성의 내부로 향하 였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