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권 7화
282화
가장 먼저 사용해본 것은 요피엘 에게서 강탈한 대치유신의 힘이었다.
하지만 혼천마공에 당했던 천사 때와는 달리, 죽기 직전이 아닌 완 전한 사망이었기에 살리는 것이 불 가능했다.
그러나 그 사실에 좌절할 필요 없었다.
‘아직 방법은 많아. 그중 하나가
막혔을 뿐이야.’
사실, 확실한 방법은 옥황, 정확 히는 그와 척을 지고 있는 염라대 왕과 담판을 짓는 것이었다.
신화에 내려오기를 염라대왕은 생사부(生死簿)라는 것을 통하여 생과 사에 직접 개입할 수 있는 능 력을 지닌 존재라고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신화는 허구 의 이야기로 취급했을 서준이었다.
하지만, 여태 보고 겪어온 일들 이 있었기에 신화조차도 단순한 허 구의 이야기로 취급할 수 없었다.
‘신화 속 인물인 시구르드도 실
존했었고, 염라대왕의 반대 격인 옥황 또한 실존하고 있어.’
염라대왕과 생사부 또한 실존하 고 있다 할지라도 이상할 것이 없 다는 말이었다.
그렇기에서준은 곧장 선계로 향 했다.
다행히도 치료 중이라 만나는 것 조차 할 수 없었던 과거와 달리 이 번에는 옥황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오랜만이군.”
옥좌에 몸을 기대고 있는 옥황의 안색은 전과 다르게 생기가 만연했
옥황의 상태를 살피던 서준의 눈 이 가늘어진다.
“단순히 치료만 한 게 아니네.”
처음 마몬과 마주했을 때와 같은 느낌이다.
지금 옥황은 거대한 힘을 완벽하게 내면으로 포용하고 갈무리해내 고 있었다.
“그릇을 깼군?”
“……자네 역시 그릇을 깼나 보 군.”
옥황의 눈에 감탄이 어린다.
그릇을 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는 것은 곧 마찬가지로 그릇을 깼 다는 말이었다.
그 성장세가 상상을 아득히 초월 하고 있었다.
“보아하니 사용하던 금룡혹포도 찾았구먼. 혼돈의 파편도 제법 많 은 양을 얻었고.”
“혼돈의 파편에 대해서 아는 게 있어?”
“대신 중에 파편에 대해서 모르 는 존재는 없을 걸세.”
혼돈의 힘을 다뤄낼 수 있게 해 주는 파편은 대신들 사이에서도 보
물 중의 보물로 취급된다.
귀한 보물인 만큼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다른 대신들의 표적이 될 수 있는 물건이었다.
그렇기에서준이 파편올 여러 개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부 정할 수 없는 강자라고 증명하는 꼴이었다.
마음먹는다면 이제 이 우주 내에서 취하지 못할 물건과 지식은 거 의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의문이 들었다.
“치료하는 동안 계속 나를 찾아 왔었다는데, 무슨 연유 때문인가?”
원래는 보구의 위치를 물어보려 고 했지만, 이번에는 그 때문이 아 니었다.
“염라대왕. 그리고 생사부의 실 존 여부에 대해 묻고 싶어서.”
서준의 질문에 옥황의 얼굴에 그 늘이 드리운다.
“그 이유를 알고 싶네만.”
“천사의 침공 때문에 무고한 생 명이 죽음을 맞이했어. 그 생명은 내가 책임지고 살릴 거야.”
돌아온 서준의 말에 옥황의 입에서 탄식과 같은 한숨이 터져 나온 다.
“허어……, 역시 그 때문인가.”
그늘이 드리운 얼굴을 한 옥황이 서준을 응시한 채로 계속해서 말을 이어간다.
“우선, 질문에 대한 답변이네. 그 래, 모두 실존하지. 하지만 생사부 를 수정하고 생과 사에 직접 개입 하려면 죽음을 관장하는 모든 신, 명왕들의 동의를 얻어야만 하네.”
다소 복잡하고 귀찮은 조건이 필 요했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서준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어린 다.
“정확하게 누구의 동의가 필요하
지‘?”
“염라대왕, 하데스, 오시리스.”
“위치들은 모두 알고 있겠지?”
재촉하는 서준의 말에 옥황이 목 소리를 높였다.
“일단 내 말을 끝까지 들어줄 수 있겠나? 선계의 은인인 자네에게 조언을 하나 내주고 싶네.”
옥황의 내뱉는 따뜻한 말에는 진 심이 어려 있었다.
아니, 애초에 옥황이 위치를 가 르쳐주지 않겠다고 하면 곧장 죽음 의 신들을 찾아갈 방도가 없었다.
결국, 서준은 고개를 주억이며 조급한 마음을 다잡았다.
“거두절미하여 말하자면, 나는 자네가 생사부에 손을 대지 않았으 면 하네.”
갑작스런 제지에 미간을 찌푸리 는 서준의 모습에 옥황이 다급히 뒷말을 이었다.
“생과 삶에 개입한다는 것은 우 주의 균형과 섭리가 무너지는 것일 세, 당연하지만 큰 혼란이 찾아오 겠지, 그런 상황을 수호자를 자처 하는 수초룡들과 이 우주를 관리하 는 우주 협회가 두고 볼 리 없단
말일세.”
“그거뿐이라면 문제없어.”
“최악의 경우, 본래의 운명으로 되돌려 놓는다는 명분을 앞세워 이 계의 신격들을 불러들이려 할 걸 세.”
계속해서 옥황이 설득하지만, 서준은 끄떡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의지를 굳힐 뿐이었다.
“문제없어. 애초에 우주 협회와 이계 신격과의 싸움은 이미 각오하 고 있던 거니까.”
“자네가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
으나, 우주 협회와 이계의 신격들 은 그리 쉽게 생각할 만한 존재들 이 아니네.”
무의미한 말은 주고받아봤자 입 만 아플 뿐이다.
“우주 협회와 이계의 신격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런 작은 우주 가 아닌 방대한 외우주의……
옥황이 말을 끝맺기도 전, 서준 이 발을 앞으로 강하게 내디뎠다.
쿵-!
땅을 짧게 울리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기파가 퍼져 나간다.
‘혼천마공, 몽환포영, 심(深).’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행동으로 설득하는 것뿐이다.
그렇기에 가장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는, 기세를 표출하여 상대의 움직임을 억압하고, 존재감을 키워 주변을 압도하는 것으로 천마군림 보의 몽환포영을 혼천마공으로 변 환시켜냈다.
더불어 미약하다지만, 마신의 힘 을 담아냈다.
‘이 정도라면 충분했겠지.’
눈앞의 존재가 대신에 올라있는 옥황이라 할지라도 설득할 정도는 충분히 될 것이다.
“이, 이 힘은, 마신의 근원을 품 어낸 건가?!”
신화 속으로만 전해져 내려온 마 신의 힘에 옥황의 두 눈이 지진이 라도 난 것처럼 뒤혼들린다.
“내 욕심으로 모두를 위험에 빠 뜨릴 생각은 없어. 내가 벌인 행동 에 대한 책임을 질 뿐이야.”
같은 실수를 반복할 생각은 없었다.
“가르쳐 줘, 죽음의 신들이 있는 차원의 위치를.”
“외우주에 있는 우주협회와 이계 의 신격은 내우주에 있는 우리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단 말이네.”
“싸움, 아니 죽음이 두려운 거 야?”
침묵으로 대답을 회피한다.
허나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대답 이 되었다.
옥황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던 서준이 차가운 시선을 빛내며 물었다.
“천사들의 손에 죽음을 맞이한 그들도 같은 심정을 가지고 있어, 모두 무섭고, 두려웠겠지만 자유를 위해 맞서 싸웠어.”
서준은 단호한 시선으로 옥황의 눈동자를 응시한다.
흔들림 없는 서준의 눈동자에 옥 황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온다.
“ 으음......
이미 몽환포영으로 서준의 힘을 체감하였기에 옥황은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지금의 서준은 우주 협회와의 싸 움에서도 쉽게 밀리지 않을 것을.
하지만 그렇게 되면 잠시라도 지 금 서준의 행동을 저지하고 있는 자신은?
‘평범한 인간만도 못한 겁쟁이에 멍청이로 신화에 이름을 남기게 되 겠지.’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입을 다물 고 서준이 죽음의 신들을 찾아가는 것을 방해해야만 했다.
섭리와 균형을 지킨다는 스스로 의 정의를 주장하면 그만이었다.
괜한 싸움, 우주의 혼란을 막는 다는 명분이면 무능한 신이 될 필 요가 없었다.
이로 인해 우주 협회가 침묵을 지킨다면, 지금과 같은 명예로운 대신으로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어두운 생각 에 이성이 마비되어 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 문득 자신을 응시하 던 서준의 눈동자가 떠오른다.
고개를 들어 보니, 서준은 여전 히 같은 눈동자로 당당히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우리가 살아온 삶과 쓴 신화가 단순한 실험의 일환으로 남기를 바 라는 건 아니잖아?”
서준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전 을 선명히 파고들며 흐릿해져 가던 이성의 끈이 빠른 속도로 돌아온다.
“나는 우주 협회를 무찌르고, 우
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에 붙여진 실험장이라는 이름을 폐기할 거야.”
“비단 우주 협회와 이계의 신격 이 문제가 아닐세, 사자(死者)가 되 살아나는 것은 분명 큰 혼란을 빚 어낼 걸세.”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쓸 데없이 걱정할 필요는 없지. 그건 그때 가서 해결 방법을 찾으면 그 만이야.”
다소 무모하면서도 이기적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실험용 쥐처럼 스스로 자 신의 운명을 결정짓지 못하는 허무
한 운명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옥황의 입가에 헛웃음이 흐른다.
‘이것이 쓸데없는 걱정이란 말인 가?’
이상할 정도로 그 말이 마음에 깊이 와닿았다.
우주 협회의 지배와 감시에서 벗 어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스스 로의 안위를 위해 자유를 포기한다 니.
옥황의 얼굴이 확 붉게 달아올랐 다.
‘내가 언제 이렇게 비겁한 존재 가 된 것인가?’
옥황의 시선이 문득, 선계의 근 원인 백옥경으로 향한다.
선계를 만들어 내던 당시, 선인 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은 이유가 무엇이었나?
흔히들 말하는 의와 협이라는 정 의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폐안에게 침공을 받고 영 멸을 맞이할 뻔했던 것 때문인지,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고 말았다.
거짓된 평화라 할지라도 지금과 같은 안정을 유지하는 것이 최고라 생각해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비겁 자가 됐다.
‘시간이라는 흐름에 무감각해지 고, 바뀌어 버리고 있었군.’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도 찾아올 혼란과 전쟁을 생각한다면 두렵다.
서준과는 다르다.
대신에 올라 그릇을 깼지만, 우 주 협회 혹은 이계의 신격과 싸움 을 벌이게 된다면 죽음을 면치 못 할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머무를 수 없었다.
서준이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결국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 계가 있을 것이다.
아마 서준 본인도 그렇게 생각할 확률이 높다.
‘진정한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서 는 이 우주의 모든 존재가 모두 힘 을 합쳐야 한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명확하게 인지한 옥황의 눈에 빛이 번뜩인다.
동시에 탁상 위에 놓여 있는 종 이 한 장을 서준에게 건넸다.
“명왕들이 있는 차원의 좌표들을 모두 적어두었으니, 자네의 심복인 나라연천이 문을 열어 줄 수 있을 걸세.”
“고마워.”
고개를 주억인 서준은 곧장 걸음 을 옮기어 자리를 떠난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옆을 지키고 있던 여동빈이 물어 왔다.
“지금 이 기회를 놓치게 된다면 다음은 언제가 될지 기약할 수 없 을 걸세.”
아니, 어쩌면 마지막일 수도 있었다.
지금 한서준은 실험실이라는 명 칭, 거짓된 안정을 타파해 진실된 평화와 자유를 거머쥘 수 있는 유 일한 활로다.
옥황의 확고한 말에 더 이상 말 을 길게 잇지 않은 여동빈은 고개 를 주억이며 입을 연다.
“전쟁을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무리한 고집을 따라줘서 고맙 네.”
“아닙니다.”
당연하지만, 평소의 여동빈이었 다면 재고를 요청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서준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금기된 혼돈의 힘을 다뤄낸 것도 모자라 제한이 가해진 인간의 육신
으로 그릇을 깨고 마신의 힘을 품 었다.
‘그야말로 무한에 도달해 있는 가능성.’
이 우주의 오랜 숙원이라 할 수 있는 진정한 자유를 찾아 줄 둘도 없는 아주 소중한 존재라는 것이었다.
여동빈 또한 어렵게 찾아온 이 기회를 놓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저 또한 한서준이라면 이 우주 의 구속을 해방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