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권 23화
273화
“여긴……
서준은 흔들리는 시선을 억지로 부여잡고는 주변을 둘러봤다.
상단전을 열자, 정복왕의 수투로 부터 흘러나온 기운이 의식을 잡아 당겼다.
이따금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내 의식을 잡아당긴 건가.”
정확하게 말하자면, 의식을 억지
로 끄집어 빼낸 느낌이었다.
영혼 속에서 각인된 기억 덕분인 지 가상 세계 속의 모습도 서준, 본인의 육체와 같은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주변 풍경은 낯설기 그 지 없었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무저갱을 떠 올리게 만드는 어둠 속이다.
“이게 그 가상공간……인가 보 네.”
이 기이한 세계는 분명 ‘수투’의 내부다.
정복왕의 수투가 서준의 혼을 납
치 했다.
당황스럽긴 했지만, 큰 위기는 아니었다.
분명 의식이 억지로 빨린 상태지 만, 되돌아갈 육체와의 연결선은 명확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당장 마음먹고 되돌아가고자 하 면 순식간에 수투 바깥으로 탈출하여 다시금 육체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굳이 위험이 될 점이 있다면, 가 상 세계에 있는 동안 완전히 무방 비가 된다는 점이었다.
‘큰 상관은 없겠네.’
현재 위치는 지하에 마련된 마몬 의 수련장.
별다른 위협이 될 상황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여차하면 언제든 되 돌아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안전에 대한 문제가 해결되고 나 니, 차분해진 머리가 회전하기 시 작해 전의 의문이 해소되었다.
‘이러니까, 효과가 발동이 안 되 었던 거네.’
일반적이라면 강제로 영혼을 집 어 당겼겠지만 지금 서준의 경우 가진 격 자체가 너무나도 높았다.
본인의 동의 없이 함부로 당길 수 없던 것이었다.
“이런 공간이라면 마음 편히 수 련할 수 있겠네.”
혼돈의 힘은 워낙 난폭한 힘이었 기에 주변에 괜한 피해를 끼칠 수 도 있는 만큼 마음 놓고 수련할 만 한 공간이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대부분 버려졌거나, 이성 생명체가 존재하지 않는 차원에서 홀로 수련했었다.
‘그마저도 충족하지는 못했지.’
차원 붕괴를 염려해야 하는 만큼 그 공간 내에서도 가진 힘을 모조
리 다 쏟아 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런 가상의 공간이라면 피해에 염려할 필요도, 힘 조절을 할 필요도 없었다.
자연스레 서준의 입가에 만족스 러운 미소가 흐른다.
하지만 정복왕이 준비한 선물은 고작 이런 ‘공간’이 전부가 아니었다.
서준의 시야 멀리, 어둠 속에서 꿈틀거리며 기포를 분출하는 액체 가 있었다.
처음에는 그 액체를 대수롭지 않 게 생각했지만, 조금씩 크기를 부
풀리며 이루어가는 형상이 사람과 똑 닮아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서준이 너무 나 잘 아는 사람과 같았다.
“ 나‘?”
문득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 각이 하나 있었다.
“혹시 나랑 싸울 수도 있는 거 야?”
무심결에 흘러나온 혼잣말이었지만, 놀랍게도 검은 기포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고 있었다.
아무런 표정도 감정도 없어 보이 는 것치고는 꽤나 적극적인 반응이
“ 오호
턱을 쓰다듬은 서준이 눈을 반짝 였다.
이제야 특수 효과의 이름이 이해 가 되었다.
“가이사의 환상.”
검은색 액체 형태를 한 또 다른 서준이 자세를 다잡는다.
안 그래도 수련의 정체를 제법 느끼고 있었다.
성장의 가장 빠른 방법은, 강한 적과의 싸움뿐이라고 느낄 정도였
한데 이런 상황에 있어 본인과 싸울 수 있게 되었다.
이곳은 꿈에도 이룰 수 없는 말 그대로 환상과 같은 경험이자 최고 의 수련 공간이라는 말이었다.
서준, 아니 세상 모든 무인에게 이 공간올 ‘환상’이라는 단어 말고 는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정말 나한테 딱 어울리는 선물 이네.”
실질적인 육체가 싸우는 것이 아 니라고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이미 심득이 곧 무공으로 이어지
는 경지다.
가이사의 환상이라는 특수 효과 는 사실상 작금의 서준에게 있어 최고의 선물이나 다름이 없었다.
“기대에 부응을 해줘야지.”
정복왕이 아무런 이유 없이 이런 선물을 남겼을 리 없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확실한 것은 그녀는 서준이 강해지 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인인 서준이 이런 호의 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웃음을 보인 서준이 검은 기포와 도 같은 또 다른 자신을 향해 기수
식을 취한 후, 까딱거리는 손짓을 했다.
“덤벼 봐.”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눈앞에서 거대한 기운이 웅집된다.
첫 시작부터 개벽의 검.
문제는 한 자루가 아니었다는 것 이다.
이기어검, 열에 달하는 회색빛 검들이 허공에서 자유자재로 움직 이고, 쏘아진다.
심지어 어떠한 반동도 없는 고요 한 상태에서 이루어졌다.
쉴 새 없이 쏘아지는 개벽의 검 들에서준은 잠시 정신이 아득해지 는 것을 느끼며 신형이 쓰러져 내 렸다.
‘이거…… 분명 난데…… 내가 쓰던 개벽의 검인데……
수가 많고, 더욱더 파괴적이다.
갑작스러운 기습이라는 변명을 붙여도, 패배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현실이었으면 죽음을 면치 못했 을 것이다.
자신만만하게 승부를 걸었는데, 이런 꼴이 되어버렸다.
“허...... 허허......
어이없게 웃음을 흘린 서준이 천 천히 몸을 일으켰다.
개벽의 검들을 쏜 이후, 쓰러진 서준을 바라보고 있는 환영의 입가 가 한쪽만 치솟아 오른다.
‘ 비웃어?’
아주 노골적이었다.
이런 상황을 가만히 두고만 보는 것을, 자존심이 허락할 리가 없었다.
“언제까지 웃을 수 있을지 궁금 하네.”
몸을 벌떡 일으킨 서준이 이번에 는 몸을 날렸다.
콰광-!
가상의 공간이 뒤흔들리며 폭발 이 일어났다.
우주협회의 감사관.
압도적인 강자였던 그 존재를 떠
올리자 마몬의 머리가 강하게 울려 왔다.
‘치욕적인 패배였다.’
판데모니움의 지배자라 할 수 있 는 마왕의 모습이라고 하기에는 너 무나도 초라했다.
물론, 상대는 이계의 존재 중 하 나인 우주협회 소속의 강자.
사실상 현 우주를 거느리고 있는 절대자라고 볼 수 있는 존재였다.
‘머리로는 이해가 된다만……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다.
최강의 전투 종족이라 일컬어지
는 드래코니안의 강력한 육체와, 뛰어난 기의 운용 능력까지 갖추고 있었다.
“내 몸에 흐르는 피는, 고작 그 런 감사관 따위에게 무릎 꿇을 그 릇이 아니다.”
제한을 깨고, 그릇을 초월해 한 계점이 존재하지 않는 강인한 육신 을 손에 넣었다.
덕분에 무저갱의 마왕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강자가 되었다.
하지만 우주라는 넓은 무대에서 도 강자라 불릴 정도의 존재가 될 수는 없었다.
그 이유 또한 명확했다.
“그릇에는 한계가 존재치 않지 만, 지금의 나에게는 한계가 존재 한다.”
과거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애석하게도 나아갈 방향성 자 체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전 감사관과의 싸움 을 통해서 나아가야 할 길을 명확 히 보았다.
“놈을 밀어냈던 그 영역에 확실 히 도달한다면……
이번과 같은 초라한 패배를 겪지 않게 될 것이다.
아니, 그 오만한 놈을 발아래 무 릎 꿇릴 수 있게 될 거다.
상상만으로도 전투 종족, 드래코 니안의 피가 들끓기 시작한다.
물론, 그런 상황을 우주협회가 가만히 두고 볼 리는 없었다.
“어떤 식으로든 개입을 할 놈들 이지.”
그러나 판데모니움, 현재의 우주 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나약하 지 않았다.
“한서준, 아니 우리 마신님도 폐 관 수련을 끝내고 나오면 훨씬 더 강해져 있겠지.”
당장은 마신에 오르는 것을 거부 하고 있지만, 근원이 이끄는 운명 을 거스를 수는 없는 법이다.
어떠한 형태로든 마신은 탄생할 것이다.
그리고 현 우주를 제패한 마신은 뿌리에 닿기 위하여, 너머의 우주 협회와 전쟁을 벌이게 것이다.
당연하지만, 그 과정에서 마몬은 단순히 조연이나 짐짝으로 남을 생 각이 없었다.
‘감사관 놈의 목을 치고, 공로를 인정받아 새로운 마황에 오른다.’
이렇게 망상에 젖어있는 틈조차
도 사치다.
지금 이 순간도 세계는 급변하고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감사관의 몸을 움직이게 만들었던 그 영역에 도달 해내야만 했다.
물론, 당장 가진 힘이 부족한 만 큼 노력만으로는 그 영역에 도달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마몬에게는 그 부족한 힘을 메꿀 방법이 있었다.
‘회수한 마왕의 영혼들.’
마신전이 벌어졌을 당시에 취했 던 영혼들, 당시에는 마신에 오를
생각에 그리 쓸모가 있다고 생각하 지 않았지만, 지금 와서 보자니 정 말 행운과도 같은 일이었다.
오십에 달하는 마왕들의 영혼을 흡수해 마기의 힘을 더 끌어낸다면 그때 마주했던 새로운 영역을 완전 히 개척하게 될 것이다.
“기대되는군.”
두 눈을 빛낸 마몬은 품 안에 보 관 중이었던 마왕의 영혼들을 꺼냈 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한입에 삼 켰다.
꿀꺽.
마왕의 영혼들이 마몬의 목울대 를 타고 넘어가는 순간, 거대한 마 기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엘리시움의 가장 높은 곳.
권좌에 앉은 채로 쏟아지는 보고 를 듣고 있는 대군주, 천사들의 얼굴에는 진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아스타로테도 차원이 트리니티 를 탈퇴하겠다는 전언을 보내왔습 니다.”
“테라리아 차원은 탈퇴 후 리벨 리온에 가입하겠다고 합니다.”
이어지는 보고들에, 우리엘의 얼굴이 일그러져간다.
“빌어먹을 것들……
입에서 거친 욕설이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당장으로서는 방도가 없 었다.
수개월째 연락이 끊긴 메타트론 과, 날로 강대해져 가는 리벨리온 의 세력.
미간을 찌푸린 우리엘은 신전의 중앙에 위치한 열 쌍의 날개를 펼 치고 있는 동상을 바라본다.
“위대한 존재시여, 이러한 일 또 한 알고 계셨을 텐데 어찌하여 계 속 침묵을 지키고 계신 겁니까?”
질문을 던졌지만, 돌아오는 대답 은 없다.
천사들에게 숭배를 받는 위대한 존재, 천신은 서준과의 접전 이후 계속해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이렇게 저희를 버리실 생각이신 겁니까?”
우리엘의 입에서 홀러나온 다소
원한 섞인 음성에 요피엘이 노기 어린 목소리를 흘린다.
“방금 발언은 모독, 반역입니다.”
차가운 목소리를 흘리는 요피엘 이었지만, 과거 굳건했던 시선은 존재치 않았다.
전지전능하다고 일컬어지는 위대 한 존재가 천사들을 버리지 않았다 면, 이 사태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 가?
하나 인정할 수 없었다.
인정해선 안 되었다.
천신이 침묵을 지키고 있는 지 금, 여기 모여 있는 이들이 무너진
다면 천사들과 엘리시움은 정말로 끝이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벌 을 주십시오.”
우리엘 역시 비슷한 생각을 했는 지 헛바람을 집어삼키고는 고개를 숙였다.
“발언권을 주기 전까지는 침묵을 지키십시오. 현 문제는 남은 대군 주끼리 토의하도록 하겠습니다.”
한숨을 푹 내쉰 요피엘의 말에, 우리엘이 고개를 주억인다.
말이 근신이라는 이름의 벌이지, 사실상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한 방
법이었다.
그렇게 우리엘을 대신하여 앞으로 나선 요피엘이 입술을 달싹였다.
“모두들 알고 있으시겠지만 한서준이라는 존재가 일으키고 있는 변 화들은 저희 엘리시움, 천사들에게 그리 좋지 못하다고 말할 수 있습 니다, 하지만 최악의 상황이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요피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대 군주들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어 리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악 마……. 마왕 놈들이 완전히 자취
를 감췄죠.”
항시 대치했던 종족.
계속해서 침공을 벌여왔던 숙적 과 같았던 악마와 마왕들이 언제부 터인가,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악마 놈들을 상대하느라 묶여 있어야만 했던 저희 천사, 엘리시 움의 병력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 다는 것입니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