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권 20화
270화
“뭐, 강압적이지만 마냥 부정적 으로 생각하지는 말게. 자네 덕에 실험의 속도가 훨씬 빨라져 내리는 상이기도 하니……
“내 말 못 들었어? 개소리 말고 꺼지라고.”
“일단 진정하고 이야기를 들어 보지. 모든 우주의 진리를 알 수 있는 거네. 우리가 수만 년간 쌓은 데이터는 자네가 무엇을 상상하건 그 이상일 것이라고 단언하지. 이
런 실험장이 아닌 진정한 우주, 위 대한 존재라고 일컬어지는 무수히 많은 이계 신격의 이야기에서부터, 진짜 지구에 대한 이야기까지. 우 주협의회에 들어오는 것만으로 자 네는 이 모든 지식을 엿볼 수 있 고, 더불어 우리가 쌓아놓은 지식 으로 인해 강대한 힘 또한 얻을 수 있을 걸세. 이렇게 본다면 굉장히 좋은 기회가 아닌가?”
“그딴 거 필요 없으니까 꺼지라 고.”
계속되는 거절에 뻗어진 손길이 서준의 목을 부여잡았다.
서준이 그를 떨쳐내려 했지만,
몸이 생각처럼 움직여 주지 않는다.
“더 이상 강요는 하지 않으마, 마지막으로 묻지. 이 자리에서 허 무한 죽음을 맞이하겠느냐, 아니면 우주 협회의 일원이 되어 오랜 세 월 영광을 누리겠느냐?”
“……까는 소리 하지 마.”
“음……?”
“X 까는 소리하지 말라고.”
서준의 가운뎃손가락이 감사관을 향해 높게 솟았다.
거절하는 순간, 죽음이 확정되는 상황에서 이렇게까지 당당히 자신 의 의사를 밝힌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훤하게, 중지를 까딱까딱하며 농락하고 있는 서준 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헛것이 아 니었다.
벙 찐 듯, 움직임을 멈추고 있던 감사관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 온다.
“……크하하, 하하핫!”
가면 너머의 눈동자에는 강한 살 의가 흐르고 있었다.
이윽고 감사관의 손이 움직이려 던 순간이었다.
지잉-
서준의 손등에서부터 강렬한 회 색의 기운이 송곳처럼 쏘아져 감사 관의 가슴을 때렸다.
쾅-!
“크흐흐흐...
허공을 날아, 먼지구름 사이에 휩싸인 감사관이 큰 웃음을 터뜨리 고 있었다.
“정복왕이여! 위대한 존재 중 한 명인 당신이 어째서 이런 인간의 일에 개입하려는 겁니까?!”
갑작스럽게 솟아오른 힘과, 익숙 한 존재의 명칭이 감사관의 입에서 홀러나오고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야?’
영문 모를 힘과 더불어, 감사관 의 입에서 익숙한 명칭이 흘러나오 고 있었다.
서준의 궁금증이 극에 달해가던 순간이었다.
쿠르릉-!
벼락과 같은 빛줄기가, 하늘과 땅을 이으며 굉음을 토해낸다.
이어, 지상에는 난생처음 느껴보 는 거대한 기운의 웅집체가 떨어져 내렸다.
‘ 누구?’
답답해하던 서준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빛줄기가 단순히 응집된 기 운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응집된 기운 은 분명 어떠한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 인간?’
정확하게 말해서는 소녀로 보였 다.
양 갈래로 땋은 머리, 수수하지 만 아름다운 백색의 원피스, 마치 인형같이 생긴 소녀는 손바닥을 내 뻗는 것으로 감사관과 서준의 사이 를 갈라놓고 있다.
서준에게 있어 소녀는 분명 초면 이었다.
하지만 정체가 무엇인지는 무의 식적으로나마 알 수 있었다.
“ 정복왕?”
서준의 부름에, 다소 딱딱하게 고개를 돌린 소녀의 회색빛의 눈이 서준을 직시한다.
그리고 초승달 형태의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웃는다고?’
심지어 작고 하얀 손으로 가볍게 인사를 건네기까지 했다.
[정복왕, 가이사가 당신을 향해 반가움을 표시합니다.]
이어진 메시지는, 확신에 뿌리를 박는 일이었다.
허공에 뜬 채로 갑작스러운 변화 를 지켜보던 감사관이 헛웃음을 흘 렸다.
“허허허…… 아무리 한서준의 가 능성이 높다고 한들, 당신이 이렇 게 나설 일은 아닌 듯한데? 위대한 존재들은 버려진 우주의 일에 관심 이 없던 것 아니셨습니까?”
소녀의 모습을 한 정복왕은 이제 서준을 보지 않았다.
내뻗고 있던 손바닥을 말아 쥐 며, 감사관을 향하여 무심한 회백 색의 눈을 빛낼 뿐이다.
[정복왕이 경고합니다.]
메시지는 서준에게만 전달되는 것이 아닌 듯했다.
“경고? 한서준이라는 인간을 위 해, 우주의 규율마저 어길 생각이 십니까?”
[정복왕이 강하게 경고합니다.]
[꺼져.]
메시지에 이어, 짧은 음성까지 들려왔다.
그 순간 스파크가 사방으로 튀어 오르며, 판데모니움이 무너질 듯한 굉음을 토해낸다.
콰르르릉-!
아까 전 힘의 충돌 때와도 비교 가 되지 않았다.
상상도 할 수 없는 힘의 파장이
판데모니움 전체에 퍼져나가고 있었다.
“단단히 미쳤군!”
그 광경에 감사관이 목소리를 드 높였다.
거칠게 내뱉는 말과 달리, 정복 왕을 응시하고 있는 두 동공은 거 세게 흔들리고 있었다.
[정복왕이 마지막 경고를 전합니 다.]
[죽고 싶지 않으면 꺼져.]
살기 어린 경고가 실린 음성이 다시 일대에 퍼져나간다.
그 순간, 감사관이 쓰고 있던 가 면의 일부에 균열이 일었다.
쩌저적-!
판데모니움은 또다시 출렁였고, 감사관은 헛웃음을 흘리며 뒷짐 지 었다.
“알겠습니다. 오늘은 이만 물러 가겠습니다. 현실이 그리 행복한 삶은 아니라지만 이런 곳에서 허무 한 죽음을 맞이하고 싶지는 않으 니.”
그 말과 함께 감사관의 시선이
힘겹게 반신을 일으키고 있는 서준 의 얼굴을 향했다.
“……곧 다시 보도록 하지.”
검집에서 터져 나온 기운이 감사 관의 전신을 감싸고, 그는 순식간 에 자취를 감추었다.
“ 후우......
안도의 한숨을 내쉰 서준은 시선 을 옮겨 멍하니 서서 그를 직시하 는 정복왕을 바라본다.
“정복왕, 당신 대체 뭐야?”
서준의 질문에 하얗고 얇은 손가 락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가리킨 정복왕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래, 당신. 대체 왜 수투 안에 이런 힘을 숨겨 두었던 거지? 언제 부터, 무슨 수로? 아니, 대체 무슨 꿍꿍이를 숨기고 있는 거지?”
우주 협회로부터 목숨을 구해준 것은 고맙다.
하지만 여태 들었던 일화들은 그 녀를 완전한 선인(善人)이라고 생 각하기 힘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날이 선 서준의 말에 정복왕의 활짝 펼치고 있던 어깨가 단숨에 아래로 축 처진다.
미소를 짓고 있던 것 같은 입술
에도 힘이 빠진다.
‘ 어째서‘?’
이해하기 힘든 정복왕의 감정 변 화에서준이 의문을 느낄 때였다.
터벅-
긴장감 가득한 적막 속, 가벼운 소리와 함께 정복왕의 발걸음이 서준을 향했다.
순간, 서준의 몸이 저도 모르게 빠르게 반응했다.
조금이나마 회복을 해낸 몸으로 다가오는 그녀를 향해 무형의 장벽 을 만들어 낸다.
극도의 경계심이 그녀를 밀쳐내 려 한 것이다.
사실 위대한 존재라 불리는 그녀 에게 무의미하다고 생각했지만, 놀 랍게도 장벽의 바로 앞 정복왕의 걸음이 멈추었다.
표정은 감사관을 바라볼 때와 마 찬가지로 딱딱하게 굳어 버린 상태 다.
‘ 살기......
긴장감에 마른침이 꿀꺽- 목울대 를 타고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정복왕은 이렇다 할 공격 을 하지 않았다.
그저 깊은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파지직-!
이어서 사방으로 전류가 강렬하게 튀기기 시작했다.
[신들의 아버지가 극렬히 분노해 정복왕을 노려봅니다.]
[공허의 주인이 정복왕을 흥미로 운 눈으로 바라봅니다.]
존재를 알리는 것만으로 견고한 세계를 구축 중인 판데모니움의 곳
곳에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서준은 의식적으로 이 자리에서 처음 듣는 두 가지 신명이 모두 위 대한 존재에 속해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일까?
고개를 들어 판데모니움, 무저갱 의 천장을 바라보았다.
육안으로 볼 수는 없었지만, 그 누구도 넘어설 수 없을 것 같은 벽 너머에서 시선들이 느껴진다.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것은 이름을 드러낸 둘뿐만이 아니었다.
상당히 많은, 처음 느껴보는 존재들이 모두 이 자리에 모여 있었
다.
서준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 모두 단 한 존재, 정복왕을 지켜보고자 이 자리에 모였다.
너머를 응시하고 있는, 서준의 시선에 몇몇이 불쾌함을 느끼는지 판데모니움이 다시 흔들렸다.
[신들의 아버지가 당신에게 고개 를 내리라 명합니다.]
이어진 메시지가 서준의 전신을 짓누른다.
당장이라도 전신이 터져버릴 것 같은 그 압박감에도, 서준은 고개 를 떨어트리지 않았다.
당당히 바라본다, 그리고 저들 한 명, 한 명을 머릿속에 새긴다.
서준의 당돌한 행동에 몇몇 위대 한 존재들이 또다시 크게 동요하는 것이 느껴졌다.
[신들의 아버지가 당신을 보며 작은 분노를 느낍니다.]
[정복왕이 신들의 아버지를 노려 봅니다.]
이후 무슨 메시지가 더 이어지기 도 전, 서준을 다시 바라본 정복왕 이 씁쓸한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 었다.
파앗-!
회색빛 빛이 사방을 지배하고 단 숨에 정복왕의 신형이 자취를 감춘 다.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이 뒤흔 들리던, 판데모니움이 단숨에 안정 을 되찾았다.
하늘을 가득 메웠던 위대한 존재 들 대다수가 정복왕과 함께 물러났
지만, 여전히 몇몇의 시선이 남아 여전히 지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 중, 서준을 향해 당 당히 자신의 할 말을 남길 수 있는 이는 몇 없었다.
[신들의 아버지가 당신을 지켜보 겠노라고 말합니다.]
“쿡……
서준이 짧은 웃음을 터트렸고, 그때가 되어서야 하늘을 메우던 시 선이 모두 물러난다.
“으읍-!”
긴장이 풀려서일까?
그간 느껴지지 않았던 고통이 밀 려오기 시작한다.
“빌어먹올……. 더럽게 아프네.”
서준은 천천히 가부좌 자세를 취 했다.
체내에서는 치천마역천지공의 흑 색과 위대한 존재의 파편으로 빚어 진 신성력이 맞부딪히며 폭주할 듯 이 날뛰려 하고 있었다.
제 주인마저 집어삼키려 하는 두 힘을 짓누르고 억눌러내자, 폭주하
려던 기운 역시 빠른 속도로 가라 앉는다.
“ 후우......
가까스로 기운을 안정시킨 뒤, 지친 듯 바닥에 쓰러진 서준은 땅 이 꺼질 듯 한숨을 쉬었다.
가장 큰 골칫거리 중 하나였던 판데모니움을 평정했다 해도 과언 이 아니었다.
하지만 새로운 적이 또 가득 등 장했다.
이렇게 난감한 상황도 없을 것이 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절망한 것
은 아니다.
오히려 기분 좋은 웃음이 흘러나 왔다.
정복왕의 갑작스러운 둥장과 하 늘을 가득 메웠던 무수히 많은 존재.
그들을 보았다.
전혀 형상이 보이지 않던 너머의 일부를 이해한 느낌이었다.
‘한 명, 한 명이 괴물이었어.’
그들 중 나약한 존재는 누구도 없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선은 판데
모니움의 넓은 하늘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하늘을 메웠던 모든 존재 가 강렬한 존재감을 내뿜어낸 것은 아니다.
그중 대다수는 서준에게 어떠한 감정을 일으키지 못했다.
이 넓은 우주 전체에 있어서도 자신이 결코 나약하지 않다는 것이 다.
이것만으로도 기쁜 상황이었지만, 무엇보다도 서준을 기쁘게 하 는 것은 아직도 한참이나 더 성장 할 길이 남아있다는 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웃음이 새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신들의 아버지.’
유달리 서준과 정복왕을 향해 강 렬한 적의를 내뿜던 위대한 존재.
‘기다리고 있어.’
그의 명칭을 머릿속에 확실히 각 인시킨 서준은 발걸음을 옮기기 시 작했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