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권 19화
269화
“그래서?”
“당장 네놈의 힘으로는 날 어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는 인정할게. 상당히 곤란하긴 했거든.”
싱긋 웃어 보인 사탄이 대검을 겨누었다.
“마황의 힘을 조금 이해한 듯하 군. 판데모니움에서 내가 내뱉는 말은 곧 언령이 되어 인과와 법칙
마저 뒤틀 수 있는 강력한 힘이 된 다.”
전 우주적으로 언령이라고 부를 수 있는 힘은 의외로 적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드래곤의 용언 또한 언령에 속했다.
하지만, 진정으로 그 명칭에 걸 맞은 힘을 구사하는 자는 손에 꼽 을 수준이었다.
그리고 사탄이 마황에 오를 때 얻은 이 언령의 힘은 적어도 판데 모니움 내에서는 그 안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었다.
“마황으로 존재하는 한, 나의 입
과 혀는 판데모니움이라는 차원에 있는 모든 것을 지배한다.”
“거짓말.”
자신만만한 사탄의 말에서준이 날카로운 눈올 빛내며 말한다.
정말로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 었다면, 그가 내뱉는 언어는 폭발 을 일으키는 것 정도로 끝나지 않 았을 터다.
사탄은 아무런 화답을 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하지 못 했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말이 괜 히 있는 게 아니지.”
“과장되었다고 하는가? 이 힘을? 후후,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그 러나 중요한 것은 너는 결코 이 언 령의 힘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것 이다. 언령은 인과와 법칙마저 뛰 어넘고 발현된다. 이미 경험하지 않았느냐?”
“허세 부리지 마. 지금 긴장한 거 다 티 나거든?”
날카로운 눈을 한서준의 말에 사탄의 차가운 표정에는 조금도 변 함이 없다.
“정말로 판데모니움의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다면 어디 한번 말해 봐, 죽으라고. 간단하잖아? 인과와 법칙마저 뒤틀어내는 힘이라면 네 말에 내 목이 떨어져 나가겠지.”
“해 보라니까? 가만히 기다려주 고 있잖아, 어서 빨리 해 보라고.”
서준이 조소 섞인 비웃음을 보였 다.
“역시, 못하는 거지?”
사탄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그리고 그 언령의 힘, 아무런
대가 없이 사용할 수도 없을 거야. 위력도 한정적이고. 그러니까 직접 나를 제압할 만한 폭발을 만들지는 못했겠지.”
“……쓸데없는 말이 너무 많았 군.”
다시 한번 몸을 날린 사탄의 대 검이 서준의 목을 노리고 날아든다.
그에 맞춰 품으로 뛰어드는 서준 을 보며 사탄의 눈이 차가운 빛을 발했다.
[터져라.]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기운의 폭발이 일어난다.
두르고 있던 금룡혹포가 황급히 튀어 올라 방패의 형태로 변화하며, 폭발을 막아섰다.
허나 뒤이어, 기다렸다는 듯 사 탄의 대검이 움직인다.
콰앙-!
폭음과 함께 서준의 주먹과 사탄 의 대검이 맞부딪힌다.
힘과 힘의 싸움이 벌어졌지만, 승자는 이미 정해져 있다 해도 과 언이 아니었다.
사탄이 처음에 입은 내상으로 인 해 점점 더 지쳐가고 있었기 때문 이었다.
팔에 가벼운 자상을 입은 서준과 달리 사탄의 신형은 허공에서 낙하 해 땅에 곤두박질쳤다.
“이제 슬슬 한계가 오나 봐?”
그 뒤를 바짝 쫓아온 서준의 손 이 사탄의 턱 아래를 가격한다.
“크윽......
입에서 터져 나오는 붉은 피, 그 를 바라보는 사탄의 입가로 헛웃음 이 흘렀다.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괴물이 군.’
단순히 힘 싸움에서 패배한 것이
아니다.
한서준은 언령이 발동되기 전부 터 그 위치를 예상하고 움직였다.
모든 수가 훤히 읽히고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따라잡힌 건가.’
사탄의 눈빛에는 이제 감출 수 없는 혼들림이 가득 찼다.
“언령이 네 전부야? 이게 마황이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이라면 상 당히 실망인데.”
조금씩 거리가 좁혀진다.
죽음이 다가온다.
[터져라.]
언령을 내뱉은 사탄은 생각한다.
지금이야말로 마지막까지 숨겨 두었던 마지막 한 수를 펼칠 때다.
마황이 사용할 수 있는 최후의 힘을 폭발시킨다.
사탄의 붉은 육신이 파르르 떨리 더니, 머리 위에 돋아난 두 쌍의 뿔 위에 검붉은 마기가 모여들기 시작한다.
콰아아아—!
품고 있던 마기뿐만이 아니었다.
판데모니움이라는 차원 전체에
퍼져 있는 마기가 사탄의 뿔 위로 모여들기 시작한다.
피잉-!
판데모니움의 기운이 사탄의 뿔 위에 생성된 검붉은 구체에 흡수되 어 모두 사라졌다.
부풀어가는 기운 속.
사탄은 웃음을 보였다.
‘모두 때려 넣어주마.’
판데모니움의 모든 기운을 홉수 한 육신에, 혼돈의 힘을 혼합했다.
방출되는 압도적인 힘에, 판데모 니움이라는 차원 전체가 뒤흔들리
기 시작했다.
어느덧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서준은 개벽의 검을 손에 쥐고 있었다.
수를 읽고 대비하는 것이 아니 다.
강대한 힘을 마주하게 되자 보인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애초에 저 강대한 힘은 잔기교 따위로 어찌 해볼 정도의 파괴가 아니었다.
‘전력으로 맞서는 것뿐이야.’
키기기직-!!
그렇게 허공에서 맞부딪히게 된 두 개의 혼돈의 힘은 찢어질 것 같 은 괴성을 홀린다.
“죽어라-!!”
사탄은 두 눈을 부릅- 뜬 채로 모아낸 힘을 모두 방출하며 쏟아낸 다.
그에 맞춰 서준 역시 개벽의 검 을 휘두른다.
기술, 기교는 존재치 않는다.
순수한 두 힘이 격돌하며 공진 (共振) 했다.
이후 맞부딪힌 거대한 힘들은 마
치 응집되듯 작은 한 점이 되었으 며, 빛을 내뿜었고, 이내 모든 것을 집어삼키기 시작한다.
콰아아아—!
커다란 폭발이 판데모니움을 뒤 덮던 회색빛 구름을 밀어냈다.
뿐만이 아니었다.
두 다리를 디딜 수 있던 대지까 지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산이 뽑혀 밀린 것도 순식간이었다.
무저갱에 군림하고 있던 마왕들 의 영토 또한 파괴되어 간다.
막대한 두 힘의 충돌은 홉사, 판 데모니움을 멸망시킬 듯한 파괴를 선보였다.
일어난 폭음이 가시며, 무저갱의 칠흑이 되돌아왔다.
곧, 만신창이가 된 신형 하나가 지상으로 떨어져 무너진 지면에 깊 숙이 처박힌다.
송장이라고 해도 믿을 수준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붉은 육신에 붉은 혈흔이 가득 묻은 사탄은 아직 온 전히 정신을 잡고 있는 것인지 후 들거리는 두 발로 지면을 디뎠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하고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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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에 널브러진 채 간신히 숨결 만을 이어가던 사탄은 숨이 턱 아 래까지 벅차오르는 감각에 거친 숨 을 연이어 내뱉었다.
“아직…… 살아 있냐?”
마찬가지로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두 다리로 땅을 딛고 있는 서준은 사탄을 바라보며 물었다.
“크흐…… 푸흐흡! 쿨럭!”
웃음과 함께 핏물을 쏟은 사탄이 서준을 바라본다.
두 눈에는 꽤나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채였다.
“웃는 거 보니 여유가 남았나 보 네?”
서준의 질문에 사탄이 비틀린 미 소를 보인다.
“……아직도 입을 놀릴 수 있는
걸 보아하니 상당한 여유가 있나 보구나.”
“당연하지, 당장 이렇게 서 있는 모습만 봐도 알잖아.”
사탄의 말에 가볍게 답한, 서준 이 신형을 움직인다.
어린아이의 주먹질과 같은 느릿 한 공격, 허나 지금의 사탄은 이런 공격조차 피할 수 없었다.
퍽-!
“카악-!”
천천히 내뻗어진 서준의 주먹이 사탄의 콧잔등 바로 아래를 강하게 가격한다.
“내가 이겼어……
웃음을 홀린 서준이 사탄의 앞에 선 채로, 다시 주먹을 들어 올렸다.
사탄 역시 반격하겠다는 듯 힘을 주려 했지만, 손가락 몇 개를 꿈틀 거리는 것이 전부였다.
“주먹 쥘 힘도 없나 보지?”
“……내가 죽게 된다면 앞으로 많은 것이 뒤바뀔 거다.”
“겁나지 않는다니까.”
..크으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혹 속을 바라보고 있는 사탄의 눈이 안타까
움으로 차올랐다.
‘결국, 운명을 피하지 못했군
의식이 사라진다.
품고 있던 혼돈의 파편과 마황의 힘이 새로운 주인을 찾아 이동한다.
사삭…….
먼지가 되어 흩어지는 그 감각 속에서도 사탄은 눈을 감지 않았다.
칠흑과 같은 어둠, 마황으로써 쥐었던 판데모니움이라는 세상이 사탄의 마지막 시선에 담긴 전부였 다.
털썩-!
사탄이 흔적도 없이 흩어진 자리 위.
억지로 두 다리를 부여잡고 있던 서준의 신형이 무너져 내린다.
머릿속에 경쾌한 메시지와 함께, 무수히 많은 초록빛 홀로그램의 메 시지가 떠올랐지만, 지금은 그를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보다 더, 기쁜 전율이 뇌리를 휘감고 있는 탓이었다.
‘ 이겼어.’
전력을 다하여, 정말로 강적이라
말할 수 있었던 마황, 사탄을 꺾었다.
힘든 승부였고 그렇기에 더욱 전 율이 느껴진다.
그만큼이나 사탄은 강했고, 때문 에, 즐거운 상대였다.
“하하......!”
마음 같아서는 이렇게 널브러진 채로 사탄과의 싸움을 복기해 이룬 성장을 되새김질하고 싶었지만, 그 럴 틈이 없었다.
“빠르게 일을 마무리 지어야지.”
이곳은 판데모니움, 적진 한복판 이다.
사탄이 쓰러지긴 했지만 다른 무 저갱의 마왕들과 악마들이 모두 소 멸한 것은 아니었다.
마몬이야 계약으로 묶여 있다지 만 다른 악마와 마왕들은 아니다.
‘지금 상태로 붙으면……
당장 이런 몸 상태라면 마왕이 아닌 대악마급만 나타나도 벅찰 지 경이었다.
억지로 몸을 일으킨 서준이 검은 탑 내부로 향하려던 순간이었다.
“정말로 마황을 뛰어넘을 줄이 야, 실로 훌륭하구나.”
먼 곳에서부터 물 흐르듯 거리를 좁혀와 서준의 바로 앞에 선 가면 의 사내가 짧은 음성을 홀린다.
그 순간 흐릿해져 가던 서준의 의식이 번쩍 돌아왔다.
양팔에 힘이 바짝 들더니 두 눈 은 가면의 사내를 직시했다.
‘ 누구?’
단지 목소리를 들었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편에 커다란 불 길함을 피웠다.
위험하다.
서준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경계심에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궁금한 것이 많아 보이는데, 일 단 내 소개를 하기 전에 우리를 인 식하고 있는지 확인해 봐야 해서 말이야……
가늘어진 눈빛으로 서준의 몸을 훑던 감사관이 고개를 주억인다.
“다행히도 이미 우리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는 것 같으니, 편히 소 개하도록 하지. 나는 우주 협회 소 속의 감사관이라 하네.”
“우주 협회……
과거, 바그너가 필사적으로 말하
려 했던 그 명칭에서준의 눈이 가 늘어진다.
저도 모르게 흘러나온 적의가 유 형화되어 감사관을 위협한다.
허나, 감사관은 눈 하나 꿈쩍하 지 않으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우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한서준, 우리 우주 협회의 소속원 이 돼라.”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우주 협회는 실험이라는 명목하 에 차원들을 관리하고 감시하며 제 멋대로 행동을 하던 이들이다.
서준의 입장에서 좋게 받아들여
줄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개소리 말고 꺼져.”
이를 악문 서준이 기세를 일으킨 다.
사지가 떨리고 당장에라도 쓰러 질 것 같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감사관, 가면의 사내가 건넨 것 은 단순한 제안이 아니다.
거절하는 순간, 싸워야 한다.
“감이 좋군, 거절은 존재치 않는 다, 만에 하나라도 거절을 하는 순 간 너는 이 자리에서 죽는다. 그러 니…… 네가 지금 고를 수 있는 선 택지는 하나뿐이다.”
감사관의 두 눈동자가 서준을 지 긋이 바라본다.
“네놈의 힘과 재능은 너무 위험 하다. 누군가에게 물려받은 것이 아님에도 크게 성장을 이뤄내고 있 지……. 머지않아서 너머에도 도달 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우린 그런 위험을 방치할 생각이 없다.”
무덤덤한 말로 서준의 평가를 늘 어놓은, 감사관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