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권 16화
266화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요란한 울림이 일었다.
이어, 사탄의 본신이 검은 탑의 꼭대기로 치솟아 오른다.
“감히 판데모니움의 지배자, 마 황인 이 몸을 도발하다니!”
우락부락한 근육이 드러난 붉은 육신과 그보다 더 붉은 안광에서 새어 나오는 진한 살기가 전율케 했다.
그의 분노와 함께 높게 치솟은 네 개의 뿔에서 흘러나오는 거대한 양의 마기가 검은 탑 주변에 커다 란 공명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쿠구구궁…….
거대한 지진, 판데모니움이라는 차원 전체가 뒤혼들리기 시작하더 니 땅이 갈라지고,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사탄에게 있어 힘을 다루는 데 망설임이란 없었다.
“네놈은 이 드높은 황제의 분노 를 감당해야 할 것이다.”
어느덧 검은 탑의 정상 위, 붉은
안광을 번뜩이고 있는 사탄의 등 뒤로는 여섯 쌍이나 되는 거대한 악마의 날개가 펼쳐져 있었다.
그에 맞춰 허공에 몸을 띄운 서준의 눈이 가늘어진다.
상단전을 통해 무한히 흘러들어 오던 자연지기, 기운 자체가 거짓 말처럼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전과 같이 봉인되었다고 말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대기도, 기운도 존재치 않는다.
마치 아무것도 없는 공허(空虛)
속에 떨어진 듯한 느낌이다.
‘ 이건......
단순한 붕괴가 아니다.
판데모니움이란 차원의 실재(實 在) 자체를 붕괴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힘을 막 써도 괜찮겠어? 판데모니움이 무너질 것 같은데.”
“어차피 판데모니움은 이 몸, 황 제의 땅. 고작 그런 이유로 내 분 노를 멈출 순 없다.”
거대한 분노가 판데모니움이라는 차원을 집어삼킨다.
세계 그 자체를 붕괴시키는 힘,
분노의 사탄이 가진 능력 중 하나 가 틀림없었다.
‘아마 내 차원 파괴와 비슷한 스 킬인 것 같은데.’
초반 탐색전부터 이런 카드를 벌 써 뽑아 들었다는 것은 이것보다 더한 힘과 능력을 지녔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쉽지는 않겠네.’
신성력을 일으켜 혼돈의 힘을 빚 은 서준이 고개를 돌리어 사탄의 움직임을 응시한다.
이 상황에 있어 사용할 수 있는 힘은 오롯이 신성력이 기반이 되어
야 했다.
신성력만이 이런 공허 속에서도 제 빛을 잃지 않기 때문이다.
당연하지만, 아무런 대책도 없이 사탄이 이런 힘올 사용했을 리는 없었다.
신성력으로 추정되는 검붉은 마 기를 전신에 두른 악마들의 황제, 사탄이 거대한 대검을 움켜쥔 채 서준을 바라본다.
“마지막 선택권을 주겠다, 더러 운 탐욕의 손에 놀아나 헛된 싸움 을 벌이지 말고 당장 돌아가라.”
“말 참 많네, 겁나냐?”
....
사탄은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하여 미간을 찌푸린 채로 거 대한 분노를 쏟아낼 뿐이다.
“죽여주마!”
짧게 답한 사탄의 몸이 빛의 속 도로 쏘아졌다.
어느덧 사탄의 손에는 육중한 덩 치만큼이나 거대한 대검이 쥐어져 있었다.
후웅-!
거칠게 휘둘러진 대검은 하늘을
가르고, 세상을 쪼개 서준을 향해 쇄도한다.
카카카칵-!
굉음과 함께, 거대한 충격파가 판데모니움에 퍼져나갔다.
전 우주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방대하면서도 단단한 세계를 구축 중인 판데모니움 전체가 거세게 흔
들린다.
‘드디어 시작했나 보군.’
널브러진 50구에 달하는 마왕들 의 시체 위에서 홀로 여유를 부리 고 있던 마몬의 입가에 비릿한 미 소가 흐른다.
‘생각 이상이군.’
인간, 한서준이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생각했던 것 이상 으로 사탄의 힘을 이끌어내고 있었다.
저런 전투가 지속된다면 제아무 리 사탄이라 할지라도 한동안은 마 신전에 개입할 수 없을 것이다.
“슬슬 움직여도 되는가.”
당연하지만 마몬이 노린 것은 판 데모니움의 단순 붕괴가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계약을 어기는 바보 같은 짓을 할 생각은 없었다.
‘내가 탐욕의 마신(魔神) 자리에 오른다.’
그렇게 되면 계약대로, 판데모니 움은 붕괴한다.
애초에 마신이라는 존재는 판데 모니움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는 핵을 흡수해 내야만 탄생할 수 있었다.
마신이 탄생하면 판데모니움이 붕괴된다는 것이다.
물론, 제 영토, 성역을 가진 마왕 이 판데모니움이 무너지는 것을 보 고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때문에, 여태껏 그 어떤 마왕도 마신(魔神)에 오를 수 없었던 것이 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 누구도 날 막지 못하리.”
무저갱의 몇몇 마왕들이 존재하 긴 하였지만, 그들은 이미 사전에 판데모니움의 악마로서 종속 영혼 의 자유를 내어준다는 전제로 계약
을 마쳐 놓은 상태였다.
나머지 마왕들은 이미 시체가 되 어 땅의 양분이 되고 있었다.
강렬한 탐욕은 결국 마몬이라는 존재의 한계를 넘어서게 했으며, 한낱 마왕의 그릇을 깨뜨리고는 너 머의 경지에 도달하게 했다.
유일한 방해꾼이 될 수 있었던 사탄은 현재 한서준에게 묶여 있는 상태다.
다섯 쌍의 날개를 펼쳐 하늘 위 로 높게 솟아오른 마몬은 마신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판데모니움의 핵이 놓인 검은 탑으로 향한다.
“후후후……. 드디어 탐욕을 채 우게 되는군.”
이 좁은 우주를 집어삼킬 수 있 는 존재가 될 것이다.
마신이라는 존재의 힘이 그를 도 와줄 것이니 말이다.
‘ 어쩌면.
이계(異界)의 지식마저도 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기나긴 우주의 역사에서도 손에 꼽히는 선택받은 존재들만이 도달 했다는 곳에 갈 수 있는 것이다.
샘솟는 탐욕에 마몬의 입가에 뒤
틀린 미소가 흐르기 시작할 때였다.
기묘한 감각이 뇌리를 거슬리게 한다.
고개를 돌린 마몬의 시선이 아무 것도 없는 황무지를 넘어서 아주 먼 곳을 향한다.
‘누구지?’
아주 강력하면서도 거대한 기운 을 가진 존재의 시선이 느껴진다.
‘대체 누구지?’
머릿속에 상대가 누구인지 상정 이 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 판데모니움에 이렇게 강력 한 기운을 가진 존재가 움직일 리 가 없었다.
무저갱의 마왕들과는 이미 계약 을 마쳐놓은 상태였으며, 사탄은 서준과 맞서고 있었다.
계속되는 고민에 미간이 찌푸려 지던 와중, 거대한 기운이 점점 다 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감히 나를 방해하려 들다니 ……
마몬은 등을 돌려, 기척이 느껴 지는 방향을 바라본다.
의문 모를 존재도 싸움을 피할
생각이 없는 것인지, 계속해서 마 몬을 향해 거리를 좁혀온다.
광속으로 움직인 기척은 삽시간 에 판데모니움을 가로질러 허공에 뜬 마몬의 앞에 도달했다.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상대는 여유롭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말 한다.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칠 줄 알았 는데, 상당히 의외군.”
상대의 모습을 본 마몬의 머릿속 은 의문으로 가득 찼다.
‘대체 정체가 뭐지?’
특이한 인상이었다.
새하얀 백색의 도복과 얼굴에 눌 러 쓰고 있는 기이한 문양들이 새 겨진 가면.
가면의 틈새에 보여야 할 눈동자 조차 보이지 않는다.
수많은 강자를 만나고 싸워 왔 던, 마몬조차도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는 존재였다.
당장 육안으로 보이는 것만 훑어 보자면, 인간에 가까운 모습을 하 고 있었다.
언제든 공격에 대비한 자세를 취 한 마몬의 눈이 상대를 연신 훑을 때였다.
“훗.’’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마몬, 그리 긴장할 거 없다. 당 장은 너를 소멸시키러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니 말이다.”
잔잔한 호수와 같은 목소리였지 만 그 음성은 뇌리를 파고 전해진 다.
도저히 정체를 알 수 없는 상대 의 모습에 마몬의 마음 한구석에서 자그마한 불안이 싹텄다.
정체를 알아보고도 겁먹지 않는 다.
그렇다고 단순한 멍청이로도 보 이지 않았다.
‘자신이 있다는 것인데……
상황이 좋지 못하다.
사탄의 이목이 한서준에게 쏠려 있는 틈을 타, 한시라도 빨리 판데 모니움의 핵을 흠치고 홉수해내야 만 했다.
괜한 소란을 빚어서 좋을 것이 없었다.
‘골치 아파졌군.’
내심으로 옅은 앓는 소리를 홀릴 때였다.
“내 정체가 궁금한가 보군.”
침묵을 지킨 마몬이 머릿속을 빠 르게 회전한다.
지금 이 시점에서, 자신과 마주 하면서도 이토록 담담히 대할 수 있는 존재는 그리 흔치 않다.
마몬은 그중 가장 먼저 떠오르는 존재의 명칭을 던졌다.
“그래, 수호룡 중 한 명인가.”
“어이가 없군, 고작 그런 패밀리 어 따위들과 이 몸을 같은 선상에 두다니.”
돌아온 대답에 마몬의 눈이 휘둥 그레진다.
“......설마.”
수호룡은 드넓은 우주에서도 패 자로 군림한 존재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존재는 누구 도 적으로 두고 싶어 하지 않는 수 호룡의 이름조차도 우습게 여기고 있었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둘 중 하나 다.
우주 바깥에 있는 이계의 존재이 거나, 혹은 대신 중에서도 손에 꼽 히는 강자일 수도 있었다.
‘아니, 대신일 리는 없어.’
대신이라면 아무리 정체를 숨겼 다 할지라도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하나뿐이었다.
‘최악의 상황일 수도 있겠군.’
대개 그렇듯, 불안한 생각은 적 중했다.
“우선은……. 그래, 감사관 정도 라고 해두지.”
“감사관이라면……
“아마 네가 생각하는 것이 맞을
거다.”
마몬의 얼굴에 진한 그늘이 드리 운다.
“어째서 이계의 존재가 개입하려 는 거지!”
“자세한 것은 말해 줄 수 없다 만, 우선은 명령 때문이네.”
“우리의 일에 개입하지 않는 것 아니었나?”
“원래는 그랬었지, 그런데 가이 사의 출현 이후로 매뉴얼이 조금 변했거든.”
마몬은 속으로 욕을 하며 상대의 격을 알기 위해 계속해서 눈을 굴
최대한 빠르게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
‘여기서 정면승부를 벌여 봤자 여러모로 좋을 게 없다.’
최악의 경우 많은 시간을 지체하게 돼 사탄과 한서준 중에 승자가 결정이 날 수 있었다.
혼란을 틈타서 판데모니움의 핵 을 노획한다는 계획이 물거품이 된 다는 것이다.
“가한 제한을 스스로 해제하다 니. 아종이라지만 전투 종족인 드 래코니안의 피를 가지고 있어서인
가?”
“드래코니안, 시초들에 대해 알 고 있는 게 있나?”
이어진 물음에 가면의 사내가 고 개를 주억인다.
“잘 알고 있지, 최강의 전투 종 족이라 일컬어지는 이들을 모를 리 가 없지 않은가……
대답을 다 듣기도 전, 마몬의 몸 이 움직인다.
애초에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니 다.
놈이 방심하고 있는 지금, 치명 타를 먹인 후 재빠르게 자리를 벗
어나고 핵을 취한다.
이후로는 계약한 다른 무저갱의 마왕 중 한 명의 영토나, 다른 차 원으로 숨어서 핵을 차분히 흡수한 다.
달려든 마몬의 거대한 손바닥이 상대 사내의 가면을 향해 거칠게 휘둘러질 때였다.
파직-!
강력한 전류가 흐르며 마몬의 몸 을 밀쳐낸다.
“어떻게?!”
마몬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분명, 사내는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기운을 일으킨 것도 아 니었다.
무형의 벽에 가로막혔을 뿐이었다.
“안됐지만 지금 네 실력으론 이 자리에서 한 걸음조차 움직이게 할 수 없을 것이다.”
가면의 사내가 허리춤에 손에 가 져다 댔다.
손에 쥐고 있는 물건에서 요란한 힘의 파장이 느껴진다.
난생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검집?’
신비한 것은 그 검집 안에는 검 이 들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속이 텅 빈 검집에서 흘러나오는 힘이 사내를 감싸듯 휘감는다.
마몬을 밀어냈던 것은 저 검집이 발산한 힘이었다.
이제야 사내의 여유가 이해가 된 다.
“이계의 보물을 믿고 그런 오만 을 떤 것이냐?”
허나, 탐욕인 자신에게 저런 보
물을 보여준 것은 명백한 실수다.
마몬의 입가로 사나운 웃음이 떠 올랐다.
“그런 것이라면 아쉽게 됐어. 자 네의 그 보물이 아주 탐이 나버렸 거든.”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