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권 15화
265화
천 년도 더 지난, 아니 완전히 사라져 버린 과거의 기억이 떠오른 다.
발달된 오감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중원 대륙 낯선 땅에 떨어진, 그날의 기억을 너무나도 선명하게 보여주기 시작했다.
때문일까?
서준은 그날의 충격을 도저히 잊 을 수 없었다.
부모님께 투정만 부렸던 철없던 23살,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누군 가를 죽여야 했던 끔찍한 상황.
처음 느꼈던 충격과 공포, 끊임 없이 눈물이 흘렀고 손발의 떨림이 멎지 않았었다.
그럼에도 멈출 수 없었다.
당시 서준의 삶은 투쟁 그 자체 였기 때문이었다.
살기 위해 싸워야 했고 나아가야 했다.
그래야지만 수많은 강자가 호시 탐탐 목숨을 노려오는 중원 대륙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으니까.
잠시의 휴식조차 사치였고 죽음 이었다.
지금 서준은 그 당시와 마찬가지 의 상황에 놓여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여전히 수많은 강자는 남아 있었 고, 그들 모두를 적으로 돌리고 있었다.
멈춰 서게 된다면 죽는다.
어쩌면, 소중한 것들을 잃게 되 는 죽음보다 끔찍한 상황을 맞이할 수 있었다.
상상하기조차 싫은 그런 미래를 맞이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어떠한 고난과 역경이 있다 할지 라도 투쟁할 것이며 종국에는 나아 가고 쟁취할 뿐이었다.
강렬한 집념을 일깨운 서준은 천 천히 치천마역천지공을 운용했다.
그 안에 위대한 존재의 조각의 힘을 더하여 신성력을 가미했다.
공존할 수 없는 두 힘, 빛과 어 둠이 뒤섞여 폭주하려 했지만, 서준은 가벼이 그를 제압하고 조율한 다.
그렇게 빚어진 혼돈의 힘을 가지 고 자신의 내면 속으로 향했다.
느꼈던 대로 거대한 벽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견고하면서도 높게 솟은 벽이 두 려움이란 감정을 일으킨다.
그 벽을 마주한서준은 조심스레 호흡을 가다듬었다.
“ 후우......
두려워할 것 없다.
자고로 무공은 심, 기, 체 삼박자 의 조화였다.
나약한 몸을 가지고 있다면, 아 무리 많은 내공을 가지고 있다 할 지라도 제대로 된 무공을 펼쳐낼 수 없다.
아무리 강인한 육신을 가지고 있 다 할지라도 그를 뒷받침해줄 내공 이 없다면 속 빈 강정이 될 뿐이 다.
육신과 내공, 가지 모두를 갖춘 다고 하더라도 기술이 완성되어 있 지 않다면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일 뿐이다.
물론, 세 경우 모두 서준에겐 해 당 없는 이야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벽은, 정답이 아니라는 듯 견고히 서 있었다.
여태, 그 이유를 짚을 수 없었지만, 이제는 명확했다.
‘부족한 것은 내 마음.’
서준은 의식 세계 속에서 고개를 돌린다.
중원 대륙에 처음 떨어졌을 때가 보인다.
쉴 새 없이 싸워 왔다.
생존을 위한 투쟁 속에서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셀 수도 없었다.
이윽고, 시선은 길의 중간 지점 으로 향한다.
선계에 처음 당도했을 때 마선이 된 자신의 모습이 있었다.
그곳에서도 투쟁은 계속됐다.
정말 싸우고, 싸우고, 끊임없이 싸워 왔다.
살아남기 위해, 삶을 쟁취하기 위해서 천 년에 달하는 세월 동안 싸워 왔다.
죽을 정도로 힘들었지만 동시에 즐겁기도 했다.
지구로 돌아온 뒤에도 마찬가지 였다.
다시 성장을 시작했을 때, 그리고 신격에 처음 올랐을 때까지.
끊임없는 투쟁의 연속이었고 결
국 쟁취해왔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표정을 딱딱하게 굳힌 서준이 둥 을 돌린다.
일방적인 전투, 껍데기뿐인 싸움 뿐이었다.
과거와 같은 뜨거운 투쟁은 없었다.
실제로도 불과 몇 시간 전에도 스스로가 벽을 마주했다는 것을 느 꼈지만, 벽이 견고하다는 이유로 마주하는 것을 뒤로 미뤘었다.
지금 오른 신격을 대표하는 근원 이자, 서준이 살아왔던 삶 그 자체
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바보 같았네.’
피식- 자조 섞인 미소를 흘린 서준은 몸을 돌린다.
아직도 견고하게 서 있는 거대한 벽이 서준을 반겨준다.
하지만 전처럼 두렵지는 않다.
‘일단 부딪혀 본다.’
고개를 주억인 서준이 눈앞의 벽 을 향하여 천천히 팔을 뻗는다.
쿵
요란한 울림이 퍼져나갔지만, 벽 은 여전히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
심지어 자그마한 균열조차 일어 나지 않았다.
그러나 서준은 개의치 않는다.
애초에 고작 일격에 해결할 수 있을 물건이 아니었다.
여태껏, 걸어온 길 자체가 끝없 는 투쟁(퐤爭)이다.
이 벽 또한 그중 한 가지일 뿐이 었다.
실패가 두려워서 갖가지 변명을 대가며, 뒤로 미루는 최악의 선택 지만을 피하면 그만이었다.
벽이 아무리 두껍다 할지라도 계 속 부딪히면 금이 갈 것이고 결국 에는 무너지게 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서준은 눈앞의 벽을 향하여 다시 주먹을 내뻗는다.
쿵-!
여전히 벽은 무너지지 않는다.
하지만, 한쪽에 금이 가기 시작 했고 그 모습은 서준에게 확신을 줬다.
‘부술 수 있어.’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홀린 서준
은 자세를 다잡았다.
두 다리는 어깨너비만큼 벌린 채 로, 오른손의 주먹을 말아 쥔다.
그 상태로 팔을 등 뒤쪽으로 당 긴다.
가능성을 보긴 했지만, 눈앞의 벽을 만만히 볼 수는 없었다.
애초에 이 앞의 벽은 그 높은 대 신(大神)의 경지에서 마주한 한계 였다.
쉽게 부서질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 벽을 부수 지 못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서준이 눈앞의 벽을 향하여 전력 을 다하여 주먹을 내뻗는다.
쾅!
견고한 벽이 휘청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무너져 내리지는 않았다.
위축될 것도 없었다.
언급했듯, 서준도 이 싸움이 쉽 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부서질 때까지!’
계속해서 주먹을 내뻗는다.
쾅! 쾅!
영혼체로 이루어진 그릇의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다.
팔에서 아찔할 정도의 고통이 이 어진다.
그러나 서준의 눈동자는 한 번도 흔들림을 보이지 않는다.
‘절대 물러나지 않아.’
끊임없이 부딪힐 것이고, 종국에 는 승리를 쟁취해낼 것이다.
그것이 여태껏 걸어왔던 투쟁이 자, 앞으로 나아갈 삶이었다.
집념에 가까운 의식이 내뻗고 있 는 주먹에 담기는 순간이었다.
쿠궁-!
주먹이 닿은 벽이, 요란한 소리 를 내며 무너진다.
마침내, 무너져버린 벽의 잔재를 지나쳐 앞으로 걸어 나간다.
두려움에 투쟁을 피해왔던 겁쟁 이는 더 이상 존재치 않는다.
서준은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 나 갔다.
띠링-!
[내면세계 속에서 스스로의 한계 를 마주하고 넘어섰습니다! 일취월
장의 성장입니다!]
[제한된 그릇을 깨고 육신으로써 수용할 수 있는 힘의 한계점이 사 라집니다.]
[??의 존재들이 당신을 의식하기 시작합니다.]
다음 한계는 보이지 않는다.
아니, 지금의 서준에게 한계란 존재치 않는다.
다음의 한계를 마주하기 위해서 는, 또 다시 충분한 준비가 필요했 다.
‘그래도 지루할 틈은 없겠네.’
의식 세계로 여행 보낸 영혼을 불러들인 서준의 눈꺼풀이 떠졌다.
이윽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서준의 입가에는 진한 호선이 그려 져 있었다.
암굴을 빠져나온 서준이 기지개 를 켜며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암굴 속으로 들어가기 전과 달리 근방에서 악마의 존재감이 일절 느 껴지지 않았다.
의문을 가질 것은 없었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하늘 위에 는 마몬이 날개를 펼친 채로 서 있 었고 그의 손에는 붉은 선혈이 흘 러내리고 있었다.
서준은 마몬을 바라보며 미소를 보인다.
“자처해서 호법을 서준 건 좀 의 외네.”
그 말을 들은 마몬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인다.
“전심전력으로 돕기로 계약을 했 으니, 당연한 것이지.”
성에서 멀어지는 서준의 기척을 느낀 마몬은 무저갱 전체를 뒤졌다.
제법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어찌 되었건 서준의 의식이 되돌아 오기 전 위치를 찾아내었다.
그건 서준도 느끼고 있었다.
애초에 의식 세계 속에서 마몬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기에, 변해버린 주변의 상황에 당황하지 않을 수 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만약 마몬이 계약을 어겨 가면서 까지 공격을 해오려 했다면 서준은 미련 없이 의식 세계 속을 빠져나 왔을 것이다.
하지만 마몬은 서준을 위협하지 않았다.
단순히 계약 때문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직접 해를 입히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기에 다른 악마들을 부려서 서준을 공격할 방법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몬은 일대 의 악마들을 모조리 다 제거하는 것으로 위협들을 완전히 배제하고
는 서준을 지켜주었다.
“게다가 임시라곤 하나, 지금은 같은 배를 타고 있지 않은가? 아군 이 강해진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
“후회 안 할 자신 있겠어?”
지금은 동료지만 결국 충돌을 피 할 수 없는 종족이다.
언젠가는 결국 부딪힐 수밖에 없 다는 것이다.
마몬 또한 이 사실을 알고 있는 만큼,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흐르 기 시작한다.
“확답하기 힘든 질문이군.”
눈앞의 존재는 처음 마주했을 때 도 대신 내에서도 손에 꼽히는 강 자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
전력을 다한다고 할지라도 승리 를 점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래도 다행히도 아직은 자네에 게 질 것 같지는 않군.”
“하지만 절호의 기회를 놓친 건 사실이지.”
“으음, 그렇긴 하겠군.”
솔직한 마몬의 대답들이 꽤 마음 에 들었다.
계속 경계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적으로 분류할 만한 존재는 아니었다.
피식- 미소를 홀린 서준이 물음 을 던진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지?”
“4일이 지났네.”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홀렀지만, 다행히도 선을 넘지는 않았다.
“바로 움직일 수 있겠나?”
“얼마든지.”
자신감 있게 고개를 주억인, 서준이 발을 앞으로 내뻗었다.
마몬과의 짧은 대화를 나눈 후, 그가 가르쳐 준 위치를 향해 이동 한서준은 우뚝 솟아있는 검은 탑 을 발견했다.
하늘을 꿰뚫고 있는 높은 탑.
그 안에서부터 아주 강력한 기운
이 발산되고 있음이 느껴진다.
서준은 그 기운이 품고 있는 힘 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
‘저게 판데모니움의 핵.’
판데모니움이라는 차원 자체를 붕괴시킬 수 있는 핵.
허나, 쉽게 다가갈 수는 없었다.
핵이 있는 곳을 지키고 있는, 어 떠한 존재의 시선이 쏟아지고 있음 이 느껴진다.
‘엄청난 분노네.’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 같은, 하 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기에 더 냉담
한 분노.
“기어이 마몬 놈과 손을 잡았나 보구나!”
하늘 위에서부터 내리꽂히듯 음 성이 울려 퍼졌고, 그 안에 담겨있 는 무게감이 전신을 압박한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엄청난 데.’
당장 느껴지는 기운은 마몬 이상 이다.
현 판데모니움의 최강, 마황(魔 皇)이라 불리는 이름이 헛된 것만 은 아니라는 것을 당당하게 증명하 고 있었다.
그러나 서준은 긴장하지 않는다.
‘나 또한 한계를 넘어섰어.’
이 싸움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는 말이었다.
때문에, 당당히 그의 이름을 부 를 수 있었다.
“분노의 사탄.”
콰릉-!
부름에 화답이라도 하는 듯 하늘 에서 큰 울림과 함께 거대한 압박 감이 터져 나온다.
허나, 그릇을 깬 서준에게는 아 무런 해를 끼칠 수 없었다.
쏟아지던 억제력을 가벼이 털어 낸 서준은 입꼬리를 한쪽만 비틀어 올려 노골적인 비웃음을 보인다.
“이런 걸로 허세 떨지 말고, 그 렇게 자신이 있다면 나와서 덤벼.”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