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권 10화
260화
싱긋 웃은 서준의 발끝이 페텔의 가슴을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크어아악-!”
의념기로 막아서는 것은 효용이 없었다.
애초에 격(格)이 달랐다.
대신(大神)과 반신(半神)의 차이, 구태여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아무리 발버둥 치려 해봤자 결과 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페텔은 이런 곳에서 허무 한 죽음을 맞이할 생각은 없었다.
페텔은 다급히 목소리를 뱉었다.
“죄, 죄송합니다, 고귀한 분을 알 아 뵙지 못하고……! 명령하신 대 로 최대한 입을 다물도록 할 테니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그건 당연한 거고, 내가 널 살 려줄 만한 가치가 있어야 하잖아?”
“뭐든 시키는 건 다 하겠습니 다!”
간절하면서도 흔들림 없는 페텔 의 목소리에서준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흐른다.
“아주 훌륭한 자세야, 처음부터 이랬으면 이런 상황도 오지 않았을 텐데, 아쉬워.”
“제, 제발……
“걱정하지 마, 당장 죽일 생각은 없으니까.”
“감사합니다!”
활로(活路)를 찾았다는 생각에 페텔의 눈동자에 희망이 차오른다.
당연하지만, 혼자만의 착각에 불 과했다.
목숨을 살려준다 했을 뿐이지, 자비를 베풀어 줄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죗값은 받아야겠지?”
이족보행을 하는 악마의 경우 일 반 사람과 혈도의 위치가 비슷했다.
적절한 형벌을 내릴 방법이 존재 한다는 것이었다.
“분근착골이라고 조금 아프긴 할 거야.”
서준의 손이 현란하게 움직여 페 텔의 혈도를 찔렀다.
고통스러움에 비명을 내지르고 싶었지만, 쉴 새 없이 고통이 밀려 온다.
당장 의식을 잃어도 이상하지 않
을 정도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정신은 또렷 해져간다.
시간이 지날수록 느껴지는 고통 이 배가 되어간다.
“큭, 끄아아악-!”
제법 오랜 시간, 판데모니움의 입구에 페텔의 비명이 높게 울려 퍼졌다.
판데모니움, 악마의 영토는 흔히 들 상상하는 것처럼 그리 황폐하기 만 한 곳은 아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판데모니움 의 패권을 쥐고 있는 마왕들에게만 은 상당히 풍족한 땅.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사방이 붉은빛 황무지고, 조금 어두컴컴하다는 점만 빼면 마왕에 게도 최고의 땅이라 할 수 있었다.
실제로도 마왕이라 불리는 자들 은 모두 거대한 성과 금은보화, 그리고 비옥한 땅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거대한 성 내부에 수십에 달하는 마왕들이 모 여들고 있었다.
“언제까지 우리를 기다리게 할 셈이지?”
판데모니움에서 가장 비대한 몸 뚱이를 가졌다 해도 과언이 아닌 육중한 악마, 벨리알이 곳곳에 악 취를 뿌려가며 말한다.
거대한 몸집만큼이나 상당한 악 취를 뿌리고 있는 악마를 찌푸린 채로 노려본 여인이 신경질 나는 표정으로 주먹을 말아 쥔다.
“숨 좀 적당히 쉬지? 콧구멍에서
나오는 냄새가 너무 역겨워서 당장 멱을 따버릴 것 같으니까.”
“보티스 네 몸에서 풍겨 나오는 독 냄새 역겨운 것은 마찬가지다.”
“독 냄새가 역겹다고? 제파르 너 도 저 덩어리랑 같이 죽여줄까?”
“허세 부리지 마라, 어차피 우리 끼리 싸울 수도 없다는 것을 알지 않느냐.”
“죽이지만 않으면 되는 거잖아? 그렇지, 바싸고?”
보티스의 서슬 퍼런 말에 하얀 해골과 같은 머리를 가진 악마, 바 싸고가 지그시 눈을 감는다.
침묵을 지키는 바싸고의 모습을 묘한 시선으로 바라본 보티스의 눈 앞으로, 거대한 손이 내리친다.
쿵-!
“깜짝이야. x발!”
욕을 내뱉은 보티스의 외침에 벨 리알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한다.
“바싸고, 놈의 목숨은 내 거다.”
“X까. 우리 판데모니움에서는 먼 저 취하는 놈이 임자인 거 몰라? 아니면 너부터 죽여줄까?”
벨리알과 눈동자를 마주한 보티 스의 두 눈에서 불꽃이 일렁거린다.
“이딴 유치한 싸움이나 구경하자 고, 이 악취 나는 영토로 모이라 한 건 아닐 거고. 대체 무슨 일인 데‘?”
보티스의 말에, 바싸고가 감고 있던 두 눈을 뜨며 입을 열었다.
“바알을 죽인 인간이 판데모니움 의 입구에 발을 들인 것은 모두 알 고 있겠지?”
바싸고의 말에, 서로를 곁눈질하 며 떠보고 있던 벨리알과 보티스, 제파르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동시 에 비릿한 미소를 홀린다.
“모르는 게 이상한 거 아니야?
우주가 주목하고 있는 인간이잖아.”
보티스의 두 눈이 반짝인다.
“그건 더 이상 인간이라고 볼 수 없지 않나?”
제파르는 기묘한 표정으로 질문 을 건넸다.
“수호룡을 죽였다면 혼돈의 파편 까지 가지고 있겠군.”
벨리알은 홍분을 숨기지 못하는 지 거친 숨을 내쉬기 시작한다.
“X발, 진짜 너 숨 적당히 쉬라 했지!”
일대에 가득 퍼지는 악취에 보티
스가 신경질적으로 목소리를 높였 지만, 이런 사소한 분쟁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듯, 바싸고는 계속해 서 말을 이어간다.
“아무래도 바알 녀석이 마지막까 지 더러운 잔꾀를 부린 듯하군.”
“전쟁에서 패배해서 근원도 빼앗 기고, 영혼까지 구속된 놈의 입장 에서는 최후의 수단이었겠지.”
“맞아, 파탈라 대륙이 한서준의 땅이라는 걸 바알이 모를 리가 없 었을 텐데. 스스로 위험을 자처하 는 건 말.이 안 되지.”
벨리알과 보티스의 이야기에 제
파르가 동조를 표한다.
“영혼이 구속된 상태로 자유를 찾을 유일한 방법은 죽음뿐인데 아 무리 쇠약해져 있다지만 대신이었 던 만큼 쉽게 죽을 수 있을 리가 없었고, 그래서 한서준의 심기를 건드리는 거겠지.”
바싸고가 고개를 주억인다.
“바알의 의도가 뭔지는 상관없 다.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가 중대한 일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라는 거지. 그 전에 우리끼 리 괜한 분쟁이 생기지 않도록 새 로이 황제가 되신 사탄님께서 특별 히 명령을 내리셨다……
말끝을 흐리는 바싸고의 모습에, 모두들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입을 다물고, 마른침을 삼킨다.
자연스레 짧은 침묵이 감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악 마, 그중에서도 마왕은 상대의 영 혼과 격을 먹어치우는 것으로 한층 더 강력한 힘을 얻을 수 있었다.
한서준이라는 존재는 강한 힘을 열망하는 마왕들에게는 너무나도 탐스러운 먹잇감이라는 말이었다.
마왕들은 더 이상 차오르는 욕심 들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입술을 달
싹인 것은 벨리알이었고 그는 노골 적인 욕망을 드러내며 바싸고를 향 해 선언했다.
“내가 처치한다.”
단순히 욕심에 눈이 먼 것이 아 니다.
한서준의 강함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다.
수호룡, 타키온과 악마들의 왕이 라 불렸던 바알을 처치할 정도의 강자다.
하지만 이곳은 판데모니움, 악마 의 영토이다.
신격을 이루고 있는 마왕들에게
는 성역이라는 말이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불합리를 선사해 승리를 점할 자신이 있었다.
허나,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머 릿속으로 상상했던 대로 풀리지는 않았다.
“불허하지. 그런 욕심은 괜한 분 쟁을 불러올 뿐이니까.”
“상관없어. 나는 내 뜻을 이행할 뿐이다.”
싸늘한 벨리알의 대답에 바싸고 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는다.
두 마왕이 서로를 향해 발산하는
살기로 궁궐이 가득 찬다.
그 서늘한 분위기에 보티스의 입 가로 묘한 미소가 어렸다.
‘이거 잘하면 재미 좀 볼 수 있 겠는데?’
혀끝으로 입술을 적시고 있을 때 였다.
쿵-!
제파르가 앞에 놓인 테이블을 내 려치며 말한다.
“벨리알, 욕망에 눈이 멀어 허튼 짓하지 마! 우리가 먼저 사탄님과 의 계약을 깨서 좋을 건 없으니까.”
이어진 외침에 보티스와 벨리알 이 고개를 주억인다.
제파르의 말이 옳았다.
어차피, 사탄과의 계약이 이행된 다면 머지않아서 우주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강한 힘을 거머쥘 기 회가 올 것이다.
벨리알은 투기를 죽이며 바싸고 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사탄님은 무슨 명령을 내리셨지?”
“우리 판데모니움의 운명이 걸린 중대한 일을 앞둔 지금, 일단은 모 두 대기하라는 명을 내리셨다.”
바싸고의 말에 마왕들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그냥 가만히 있으라고?”
“아무리 계약으로 묶여 있다지만 과한 속박 같은데, 홋날에 이 분노 를 감당할 수 있을까?”
사탄은 바알과의 전쟁에서 승리 를 거머쥐고, 악마들의 황제가 되 긴 했지만 그건 일시적인 계약일 뿐이다.
머지않아 진정한 황제, 신이 탄 생한다면 사탄은 폐위될 것이다.
지금과 같이 불만이 쌓이기 시작 한다면 사탄의 입장에서는 좋을 것
이 없다는 말이었다.
쏟아지는 마왕들의 언성에 바싸 고는 여유로운 미소를 흘린다.
“단, 각자의 영토를 침공받았을 경우는 직접 맞서도 된다고 말씀하 셨다.”
자리에 앉아 있던 마왕들이 고개 를 주억이며 동조한다.
“한마디로 운에 맡기겠다는 거잖 아? 가장 현명한 선택이긴 하네.”
“우리만 부른 것이 이상하다 싶 었는데,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영 토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 군.”
인간의 신, 한서준은 짧은 시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성장했다.
그는 채 1년이 지나지 않아 대신 에 올랐고 혼돈의 힘을 사용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여러모로 복잡하고 귀찮은 존재 였다.
판데모니움이라는 성역이 없다면 대신에 오른 마왕들의 입장에서도 승리를 논할 수가 없을 정도로 말 이다.
그런데 마왕들끼리 괜한 경쟁을 시작하게 되면 한서준을 먼저 처치 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최고의 이
점인 성역마저 내팽개치고 사냥에 나설 수도 있었다.
입지 않을 피해가 생긴다는 말이 다.
지금 판데모니움, 악마들을 거느 리고 있는 사탄의 입장에서 그런 상황을 원할 리가 만무했다.
“확실히 성역의 힘을 이용한다면 어렵지 않게 사냥할 수 있겠지.”
마왕들의 눈동자가 기묘하게 휘 어진다.
우주가 주시할 정도의 강력한 힘 을 큰 피해 없이 취할 수 있다는 것은 마왕들에게 너무나도 달콤한
일이다.
“가장 공평한 제안이라고 생각하 니 불만은 받지 않겠다. 남은 것은 너희들의 운에 달린 것이겠지.”
그 말과 함께 자리에 앉아있던 바싸고의 신형이 백색의 연기에 휩 싸이며 모습을 감추었다.
뒤를 이어, 보티스가 자리를 박 차고 일어나며 말한다.
“사탄의 명령대로 욕심 부리지 말고 공평하게 하자고, 무슨 말인 지 알지?”
묵묵히 고개를 주억이던 제파르 가 입을 연다.
“그래, 괜한 욕심 부리려 하지 말고 혼자 힘으로 버거울 것 같으 면 바로 도움을 요청하라고, 대가 만 확실하다면 바로 도움을 줄 테 니 말이야.”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군, 성역 의 힘을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이어진 벨리알의 말에 보티스가 고개를 주억이며 동조한다.
“이건 벨리알의 말이 맞지, 영문 모를 이유로 성역이 갑자기 부서지 는 것이 아닌 이상 패배할 리가 없 잖아.”
“말이 그렇다는 거지, 농담도 못
하는군.”
“농담에도 정도가 있는 법이지, 성역 안에서 패배를 염두에 둔다 고? 하핫!”
기가 차다는 듯 고개를 내젓고 있는 보티스의 모습에 제파르가 허 공, 한서준의 기운이 느껴지고 있 는 방향을 바라본다.
“그래, 내 말실수군. 어디로 움직 일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들의 성역 에 들어온 이상 한서준 그놈은 죽 은 모습이나 다름없지.”
*
“정말 여기가 맞아?”
판데모니움의 입구, 지하 1층에 위치한 악마들의 땅을 제멋대로 파 괴하고 다니고 있던, 서준은 고개 를 돌리며 미간을 찌푸린 채로 물 었다.
“제가 설마 한서준 님께 거짓말 을 했겠습니까! 이곳은 틀림없이 마왕의 영토입니다!”
흠칫- 몸을 떤 페텔이 다급히 대
답을 해왔다.
거짓을 고하는 것 같지는 않다.
실제로도 다른 곳과 달리 느껴지 는 마기(魔氣)가 상당히 강렬할뿐 더러 판데모니움에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휘황찬란한 성까지 지어져 있었다.
“어떤 마왕의 영토지?”
“맹독의 보티스의 영토입니다!”
“보티스라……. 원래 이렇게 영 토를 방치하는 놈이야?”
“그, 그렇지 않습니다! 확실하지 는 않지만, 조만간 모습을 드러 낼……
쾅
페텔의 말이 끝나기도 전, 거대 한 폭발이 일어났다.
당연하지만, 단순한 폭발이 아니 다.
엄청난 양의 마기가 공격을 해온 것이다.
자연스레 서준의 입가에 미소가 흐른다.
“보티스.”
서준의 부름에 응답이라도 한 듯 이, 허공에 다섯 쌍의 날개를 펼친 악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