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권 8화
258화
바알의 소멸을 누구보다도 빠르 게 알아챈 자는 그를 따르고 있던 마왕과 군단들이었다.
말하자면 장군인 바알의 소멸은 사실상 전장의 승패를 가름했다 해 도 과언이 아니었다.
실제로도 바알이 이끌던 악마 군 단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렸다.
파탈라 대륙에는 무수히 많은 악 마의 피가 흘렀다.
누가 보더라도 압도적인 승리, 자연스레 리벨레는 빠른 속도로 안 정을 되찾아갔다.
대륙 곳곳에서 제멋대로 학살을 벌이는 악마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징글징글하게도 많네, 그래도 말끔히 청소한 것 같으니 내일쯤이 면 돌아가도 되겠지?”
몸 곳곳에 묻은 악마들의 피를 털어내던 서연이 질문을 던져온다.
다소 볼멘소리가 섞여 있었지만, 그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되는 것 이었다.
자그마치 3주에 달하는 기간 동
안 끊임없이 바알의 잔당을 처치해 왔다.
육체는 몰라도, 정신적으로 피곤 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바그너는 몰라도, 일단 우리는 돌아갈 생각이야.”
물론, 아직 전쟁의 흔적과 상처 들이 곳곳에 남아있었다.
허나 이건 파탈라 대륙 스스로만 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 이상 서준의 일행이 해줄 것 은 없었다.
“정말로?”
“내가 이런 걸로 거짓말하는 거 봤어?”
“그런 적은 없지.”
“그러니까, 빨리 가서 돌아갈 짐 부터 싸라고.”
“오빠 최고야! 그러면 지금 바로 돌아가서준비하고 있을게.”
함박웃음을 지어 보인 서연은 곧 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서연과 달리 서준은 꾸려온 짐이 나 따로 구매한 물건이 없는 탓에
딱히 준비할 것은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일까지 할 일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바그너.”
바알과 격전을 치르기 전, 나누 었던 대화를 잊지 않았다.
정확하게 어떤 이야기인지 알 수 는 없었다.
허나, 당시 바그너의 눈동자에 어려 있던 감정을 생각하면 허튼 이야기 따위가 아니었다.
그렇기에서준은 곧장 발걸음을 옮겨 바그너가 머물고 있는 황성으로 향했다.
잠시 후.
서준은 순식간에 제국의 황성, 거기에서도 가장 깊숙하고 휘황찬 란한 곳에 앉아있던 바그너의 앞에서 있었다.
“일은 잘돼가고 있어?”
돌연 질문을 던진 것이었지만, 이미 서준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는
지, 당황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이어진 물음에서류 더미에 묻혀 있던 바그너의 입에서 거친 숨이 새어나온다.
“ 후우......
이후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다.
“도와준 덕분에 술술 풀리고 있 긴 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더 고 달프군.”
“그래서 괴롭냐?”
“아니, 행복하지.”
바그너의 진심 어린 미소에서준 의 입꼬리도 호선을 그린다.
“그러면 다행이네.”
“이렇게 찾아와준 사람한테 할 말은 아니지만, 내가 반드시 처리 해둬야 할 일들이 있는데, 잠시만 기다려줄 수 있겠어?”
그 정도의 인내심이 없지는 않 다.
애초에 갑작스레 찾아온 것이었다.
서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팔짱 을 꼈다.
어차피 지금 확인해야 할 부분은 서준도 많았다.
‘혼돈의 파편.’
악마의 잔당들을 처리하고, 대륙 의 정세를 안정시키느라 1분 1초가 부족했던지라 여유롭게 시스템 창 을 확인할 시간이 없었다.
궁금증이 동하긴 했지만 파탈라 대륙의 상황만큼 급한 것은 아니었 던 만큼 우선순위를 미루어 두었던 것이다.
하지만 잔당들을 모두 처리하고, 여유로운 지금이라면 확인을 할 시 간이 차고 넘쳤다.
‘미뤄 둘 이유가 없지.’
서준은 곧장 아카식 레코드를 불
[사용자 ‘한서준’의 이름으로 아 카식 레코드에 접속합니다.]
[권한 레벨 6으로 접속했습니다.]
이미 생각해놓은 질문이 있었기 에서준은 곧장 머릿속에 질문을 떠올렸다.
‘혼돈의 파편에 대한 정보를 열 람하겠어.’
생각을 끝맺기 무섭게 귓전에 경 쾌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띠링-!
[사용자 ‘한서준’이 요청한 ‘혼돈 의 파편’에 대한 정보 열람을 시작 합니다.]
[혼돈의 파편은, 말 그대로 혼돈 의 힘을 품은 파편입니다.]
[보유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일정 량의 혼돈의 힘을 제약 없이 사용 할 수 있는 규격 외의 물건이자, 이른바 ‘열쇠’라 불리는 혼돈석을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재료입니다.]
[※일정 수량 이상의 파편을 한 명이 소유하게 될 경우, 혼돈석으
로 변환이 가능합니다.]
메시지를 읽어가던 서준의 고개 가 주억여진다.
‘나한테는 아무 효과도 없게 느 껴진 이유가 있었네.’
혼돈의 파편의 능력은 보유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혼돈의 힘을 사용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이전부터 혼돈의 힘을 다루고 있 던 서준의 입장에서는 아무런 효능 이 없는 돌덩이로밖에 느껴질 수밖 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효과가
없다고 치부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혼돈의 파편을 소유하고 있기에 10갑자에 달하는 혼돈의 힘 을 다뤄낸 것일 수도 있었다.
‘이렇게 의문을 품고 있을 이유 가 없지.’
바알을 쓰러뜨리고 혼돈의 파편 을 하나 추가적으로 얻은 상태다.
정말로 파편을 소유한 것만으로 혼돈의 힘을 더 많이 다뤄낼 수 있 게 된 것이라면, 기존 10갑자보다 더 많은 양을 다뤄낼 수 있을 것이 다.
우웅-
발산하는 혼돈의 힘에 대기가 일 렁거리고, 세계가 움츠러든다.
동시에서준의 입가에 환한 미소 가 피어난다.
‘11갑자.’
자그마치 1갑자에 달하는 힘을 더 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단순한 1갑자였다면 대신 에 이른 강자들에게는 그리 큰 메 리트가 있다고 볼 수 없는 양이었다.
그러나 파편이 품고, 다룰 수 있 게 해주는 것은 일반적인 기운이 아닌, 자그마치 혼돈의 힘이다.
당장 늘어난 1갑자만으로 웬만한 국가 하나를 지도에서 지워버릴 수 있는 혼돈의 힘의 위력을 생각한다 면 대신들의 입장에도 상당한 성장 이라 할 수 있었다.
바알 정도의 대신이 눈에 불을 켜고서 혼돈의 파편을 찾는 이유가 납득이 갔다.
‘확인해보길 잘했네.’
아카식 레코드가 준 정보를 통하여 파편의 진가와 그 가치를 확연 하게 느끼게 되었다.
동시에 혼돈의 파편에 대한 욕심 이 차오른다.
단순히 강한 힘을 향한 열망뿐만 이 아니다.
‘ 열쇠......
정확히 어디에 사용하는 것인지 는 알 수 없었다.
허나, 본능적으로 느껴진다.
혼돈석은 우주의 비밀과 관련되 어 있다는 것.
베일에 가려져 있던 놈들의 꼬리 를 드디어 포착했다는 말이다.
자연스레 앞으로의 계획에 필히 추가해야 할 사항도 생겼다.
‘부지런히 모아야겠네.’
서준이 생각을 정리할 때쯤, 바 그너의 입에서 다시 한숨이 흘러나 왔다.
“ 후우.....♦
바그너는 검은 눈동자를 뜨고는 웃음을 흘렸다.
“그때 말했던, 대화를 나누러 온 거겠지?”
서준은 말없이 바그너를 바라본 다.
“선조와 부모님이 남긴 정보가 많아. 그래서 많은 이야기를 알고
있고 그중 반드시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들이 있다.”
자그마치 지크프리트, 용살의 피 를 이은 후예다.
오랜 기간 우주에서 그 이름을 떨쳤을 것이며, 수많은 사건을 겪 었을 것이다.
그리고 바그너는 말 혹은 남겨진 물건들을 통하여 그 정보와 지식을 습득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해줄 수 있는 이야기는 한정적이야.”
“음……?”
서준은 어렵지 않게 이해했다.
바그너 이전, 이와 비슷한 대화 를 나누었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상격의 투신이었던 나라연천, 대 신에 올라 있는 옥황마저도 직접 언급을 피하려 했다.
“네가 대신이 되었기에, 생각했 던 것보다는 부담이 적긴 할 테지 만 꽤나 많은 업보를 희생해야 말 할 수 있는 비밀들이거든……
괜히 방문한서준을 잠시 방치한 것이 아니었다.
앞서 업보를 치렀던 나라연천은 끔찍한 고통을 받았고, 그로 인해 제법 오랜 시간 정신을 잃고 있었
리벨레 제국이 평온한 상태라면 모를까, 지금처럼 혼란스러운 시기 에 갑작스런 황제의 공백이 좋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황제만이 결정할 수 있 는, 일과 업무들을 어느 정도 미리 처리해둘 필요가 있던 것이다.
“너무 무리하지 않아도 되는데.”
서준의 만류에도, 바그너는 굳은 눈동자를 한 채로 고개를 주억인다.
“너를 믿도록 하지.”
지금까지 지켜봐 온 한서준이란 인간은 동료, 신하들을 절대로 배
신할 사람이 아니었다.
혹여나 오랜 시간 동안 정신을 잃게 되더라도, 파탈라 대륙을 그 냥 방치해 놓지는 않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진심으로 믿고 따를 수 있는 왕 이자 신이다.
그렇기에 반드시 말해야만 하는 정보다.
“가장 큰 것부터 말하지. 이 101 번째 우주, 우리 은하는 모두 거짓 됐어.”
파지직!
전류가 바그너의 몸을 휘감는다.
서준은 깜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 았지만, 일대에 느껴지는 기운은 존재치 않는다.
하지만 전류에 휘감긴 바그너의 몸은 사시나무처럼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진정한 것, 진짜라고 볼 수 있 는 것은……
고통을 억누르고 있는 바그너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진다.
“그게 무슨 말이야?”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에서준 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 진짜는 놈들이 거주하고 있 는 우주뿐……
파삭!
공간이 일그러지고, 바그너의 안 색이 더욱 창백해졌다.
진짜 우주, 처음 듣는 이야기에서준의 눈이 가늘어진다.
“이런 부담감을 떠안게 될 줄은 몰랐군.”
헛웃음을 홀린, 바그너가 가슴을 움켜쥔다.
“더 이상 무리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나머지는 직접 알아보
도록 할 테니.”
서준이 걱정된 표정으로 말했다.
수많은 적, 강인한 존재들과 싸 워야 하는 지금 상황에 있어 바그 너는 듬직한 전력이었다.
고작 이런 대화에 소중한 인재를 잃을 수는 없었다.
“아니……. 반드시 알려야 해. 어 쩌면 이게 나의 운명일지도 모르겠 다는 생각이 드는군……
그리 말하며 서준을 바라본 바그 너가 눈웃음을 지었다.
눈동자와 목소리를 통해 굳은 의 지가 느껴진다.
바그너, 굳은 결단을 내린 일이 다.
더 이상 만류할 수 없다.
“고통이 너무 심해서, 최대한 빠 르게 이야기를 마무리할게. 우주에 는 무수히 많은 차원이 많이 존재 하지.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만들 어진 세계이자……
파지지직-!
바그너의 전신에서 전류가 번쩍 이며 사방으로 튀겼다.
이를 악문 바그너가 이야기를 이 어나간다.
“한마디로, 여긴 실험장이야. 그리고 이 우주를 지배하고 있는 것 들은……. 꺼어억-!”
괴로운 신음을 토한 바그너의 허 리가 깊게 휘었다.
하얗게 뒤집힌 눈에서는 붉은 선 혈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린다.
“그만!”
서준이 황급히 자리를 박차고 일 어난다.
천기가 누설되었고, 서준의 정신
에도 적잖은 충격이 왔지만, 그보 다 바그너의 상태가 훨씬 더 심각 해 보인 탓이다.
“우주...... 협......
운명이라 말할 정도의 책임감을 가진 것일까?
바그너는 마치 이 모든 일이 본 인의 사명이라도 된다는 듯 피가 나도록 입술을 강하게 깨문 채로 말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파앙-!
회색빛이 사방으로 번지며 바그 너가 서 있는 공간이 일그러진다.
그 공간을 향해 서준은 망설임
없이 손을 내뻗어 바그너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만!”
서준의 다급한 외침에 달싹이던 바그너의 입이 멈춰 선다.
동시에 그의 육신을 뒤흔들던 기 운과 전류가 단숨에 사라진다.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는 알겠으 니, 제발 그만.”
따뜻하면서도 확신에 찬 서준의 목소리에, 바그너의 입가에 피식-미소가 흐른다.
뒤이어, 바그너의 신형이 실 풀 린 인형처럼 쓰러져 내렸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