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권 9화
234화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애초에 공작 정도나 되는 마법사 가 나선 이상 이번 싸움에 승산은 없었다.
셀리우스는 곧 고개를 끄덕이고 는 양팔을 머리 위로 올렸다.
“따를게.”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동료들의 비명.
잔혹한 현장을 슬픈 눈으로 바라
본 셀리우스가 말을 이었다.
“대신 다른 사람들에게는 더 이 상 손대지 말아줘.”
“당연하지, 약속은 지키라고 있 는 거니까.”
셀리우스의 말에, 고개를 주억인 백발의 노인이 턱짓하자 터져 나오 던 비명이 곧 멈췄고 전장이 일시 적 소강상태가 되었다.
아직은 조금 의식이 남아 있는 지, 흐릿한 시선으로 셀리우스를 바라보던 고든은 힘겹게 고개를 내 젓는다.
그런 고든을 향해 미소를 보인
셀리우스를 향해 데헤르트가 마력 으로 빚은 구속구를 채운다.
“쓸데없이 잔머리를 굴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네가 약속을 지킨다면 그럴 일 은 없어.”
“아주 숭고한 희생정신이야, 차 기 슬레이어 후보라고 칭송받을 만 해. 따라오거라.”
전투의 여파로 피가 강을 이루고 있는 숲길을 두 사람이 나란히 걸 었다.
구속구에 사로잡힌 채로 끌려가 다시피 걷고 있는 셀리우스가 혼란
했던 전장을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너희들은 정리를 마저 끝내고 따라오도록 해라.”
비릿한 미소를 홀리고 있는 데헤 르트의 모습에 셀리우스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데헤르트!”
셀리우스가 있는 힘껏 발버둥 쳤 지만, 손과 발을 묶은 구속구는 그 럴수록 더욱 강하게 조여 오며 움 직임을 봉쇄했다.
“손대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나!”
“내가 직접 손을 대는 건 아니지 않은가?”
“무슨 말장난을……! 당장 제국 군을 멈춰, 데헤르트!”
“무언가 착각을 하고 있군, 저들 은 수송대야. 내 개인 사병이 아니 라고.”
셀리우스의 발악과도 같은 외침 에, 데헤르트가 입가로 차가운 미 소를 보인다.
“그러게, 계약 사항을 꼼꼼히 잘 확인했었어야지.”
“사기꾼……!”
“말을 가려서 하는 게 좋을 걸 세, 자네의 말에 내 마음이 상해서 이 자리에서 자네를 기절시키고 전
장에 합류하면 어쩔 텐가?”
셀리우스의 비난에, 데헤르트는 쥐고 있던 구속구에 마나를 주입한 다.
지잉-
구속구를 타고 흐르고 있는 데헤 르트의 마나가 곧 전류로 변해 셀 리우스의 육신을 지졌다.
“이…… 개……
“입 다물고 얌전히 따라오게, 어 차피 더 이상 자네에게 선택의 여 지는 없으니 말이야.”
비릿한 미소를 흘린 데헤르트는 구속구를 손에 쥔 채로 앞을 걸었
바닥에 질질 끌려가고 있는 셀리 우스는 귓전에 울려 퍼지는 동료들 의 비명과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고든의 모습을 허망한 시선으로 바 라볼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
자신이 약했기 때문에 지키지 못 했다.
눈물이 왈칵 차오를 것만 같았다.
‘나의 신, 용기의 원조이시여, 제 목소리를 듣고 있으시다면 제가 다 시 일어나고, 용기를 낼 수 있게
제발……. 다시 한번만 기적으로 저를 구원해주십시오.’
셀리우스가 마음속 깊이 간절한 기도를 올리고 있을 때였다.
퍼억-!
묵직한 소리와 함께, 당당히 걸 어가던 데헤르트의 육체가 허공을 날았다.
간절히 바랐던 기적과 같은 일.
기도를 올리고 있던 셀리우스의 눈에 이채가 어린다.
‘정말 신께서 와 주신 건가……?’
환한 얼굴의 셀리우스가 고개를
돌린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고개를 갸웃 젖히게 된다.
건너편에 새하얀 의복을 입은 특 이한 복장의 사내가 서 있던 탓이 다.
전장에서 있는 것이라고는 생각 할 수 없을 정도로 여유로운 그는 아주 느긋한 모습으로 걸음을 옮겼 다.
분명, 여유롭고 느릿한 움직임이 었지만 어째서인지 순식간에 거리 는 좁혀졌다.
마치 땅이 접히는 것 같은 느낌
을 주는 듯한 기이한 발걸음.
어느새 눈앞에 당도한 그는 무언 가에 화가 난 듯 미간을 찌푸린 채 로 경멸이 가득 담긴 눈빛을 사방 에 홀린다.
단순한 눈빛, 그러나 그 안에는 난생 처음 느껴 보는 압박감이 담 겨 있었다.
마주한 것만으로 셀리우스의 몸 이 바싹 굳어진다.
항거할 수 없는 압도적인 존재가 내뿜는 위압감에 몸이 떨려오기 시 작할 때였다.
“분명 서로 약조를 했거늘, 어찌
그를 지키지 않는 파렴치한 짓을 한단 말인가.”
차분한 어투였지만 그 안에 담긴 분노는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그가 셀리우스의 바로 옆으로 다가온다.
“그대, 이름을 알려 줄 수 있겠 는가?”
이어서 따뜻한 목소리로 셀리우 스를 향해 말을 건넸다.
“셀, 셀리우스라고 합니다.”
“셀리우스, 그대의 숭고한 희생 정신은 실로 뛰어났소. 뒷일은 내 가 맡지. 푹 쉬게.”
든든한 음성에 셀리우스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오고 있 던 순간이었다.
“저기요.”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낸 검은 머 리카락, 그리고 그와 상반되어 더 눈에 띄는 백옥 같은 피부를 가진 큰 눈망울을 가진 여인이 다가온다.
“ 네?”
“혹시 저희 오빠랑 무슨 관계인 지 여쭈어 봐도 될까요?”
“ 예‘?”
“한서준, 모르세요?”
모를 수가 없는 이름이었다.
“한서준 님……! 저의 신님을 아 십니까?!”
의문에 대한 답을 듣기도 전, 먼 지구름의 위로 치솟은 데헤르트가 지팡이를 높게 들어올렸다.
허공에서는 활활 타오르는 불꽃 의 구체가 빚어지고 있었다.
어느덧, 준비를 끝마친 그는 들 고 있던 지팡이를 앞으로 들이밀며 화염의 구체를 쏘아냈다.
“위험합니다……!”
“걱정할 거 없네.”
스릉-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를 흘린 사 내가 허리춤에 있던 검을 휘두르자, 쏟아지는 불덩이는 혼적조차 남기 지 못하고 사라졌다.
그리고 그 뒤편에서 있던 데헤 르트가 목에서 피를 흩뿌리면서 허 공에 날아올랐다.
“부디 이번 생에 진 모든 죄를 참회하고 무사히 윤회하기를......
고고한 자태로 쥐고 있던 검을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집 안으로 밀어 넣은 사내가, 고개를 돌린다.
온화한 미소를 얼굴을 한 사내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한다.
“놀라게 해서 미안하네. 급히 전 해줘야 할 물건이 있어서. 대체 한서준과는 어떤 관계이오?”
확신이 든다.
눈앞의 이 무시무시한 괴물 같은 존재들은 아군이라고.
사실을 인지한 순간, 몸이 저절 로 움직인다.
“잠시만요!”
셀리우스는 목청을 높여 억지로 끌려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 다.
“저, 저기요!?”
“죄송해요! 지금 바로 구해야 할 동료들이 있어요!”
멀어져가는 셀리우스를 바라보고 있던 서연의 고개가 여동빈을 향한 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옥황께서 내리신 명령이 있는 만큼 저자가 죽게 내버려 두지는 않겠지만, 단순히 각자가 추구하는 정의를 내세우기 위한 싸움, 대의 가 없는 전투에 끼어들 생각은 없 네.”
“그러실 줄 알았어요.”
방금 전, 여동빈이 직접 손을 쓴 것은 대협이라 불리는 그의 정의, 도덕성 때문이었다.
애초에 선인(仙人)이라고 불리는 그가 각자의 사상을 내세우기 위한 싸움에 개입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서연은 선인이 아니었다.
방금 눈앞에 있던 붉은 머리카락 의 사내에게서는 오빠, 한서준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리고 서준의 성정상 아무에게 나 힘을 내어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떠한 형태로든 서준에게 호감 을 샀을 거라는 말이다.
‘오빠가 선택한 사람.’
더 이상의 판단은 무의미하다.
서연은 앞서간 붉은 머리의 사내 를 도울 생각이다.
지킬 힘이 없었다면 모를까, 제 손으로 바꿀 수 있는 비극적인 운 명을 그냥 방치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움을 요청하지는 않을게요. 적어도 제가 전장에 합류하는 것을 허락해주세요.”
“그게 소저의 정의라면……. 그 또한 존중하겠소.”
여동빈이 고개를 주억이는 것을 확인한 서연은 곧장 땅을 박차며 셀리우스의 뒤를 쫓아갔다.
중앙 대륙.
수풀 속에 몸을 숨긴 채로 이동 을 하고 있던 서준의 눈이 번뜩-뜨인다.
‘셀리우스?’
서준을 향한 간절한 셀리우스의 열망은 서준에게 곧장 메시지로 전 달되 었다.
그러나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서준은 지금 성역이라 일컬어지 는 중앙 대륙에 있었다.
당장 돌아간다고 한들 늦겠다는 계산이 들 무렵, 예상치 못한 구원 자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향해 ‘오빠’ 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세상에서 이런 호칭을 사용하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다.
‘서연이가 파탈라 대륙으로 왔 어.’
반갑기도 했지만, 동시에 걱정이 되기도 했다.
이곳은 타키온을 숭배하고 있는 제국이 지배하고 있는 대륙이다.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알 수 없는 곳이란 말이다.
당장 돌아가라는 말을 전하고 싶 었지만 기운, 마나의 흐름이 통제 당해서인지 예속의 보석의 특수 능 력들도 발동이 되지 않고 있었다.
불행 중 다행히도 파탈라 차원에서 가장 위험한 곳, 타키온의 둥지
인 중앙 대륙으로 오지는 못할 것 이다.
“출입구가 모두 사라졌어.”
아무런 이유 없이 분주히 숲속을 누비고 다닌 것이 아니다.
가장 우선적이던 목표인 나라연 천의 구출이 끝난 만큼, 일단은 지 구로 돌아가 계획을 수렴해가며 정 비를 하려 했다.
허나 타고 넘어왔던 것들은 물 론, 기존에 존재하던 다른 워프조 차도 모두 사라졌다.
“아주 작정을 했나 보군.”
“다른 방도는?”
당장 바다로 나가기에는 대륙을 둘러싸고 있는 용오름이 존재한다.
용오름만 있다면 문제될 것이 없 겠지만, 본래의 힘을 모두 사용할 수 없는 만큼 사도들이 그 틈을 타 기습해온다면 골치가 아파질 수밖 에 없었다.
“있기야 있지만……. 네 입장에 는 그리 내키지 않을 텐데.”
“ 뭔데?”
“레어의 중심지에 있는 결계석을 파괴하는 것. 나와 다시 힘을 합쳐 야 한다는 말이다.”
서준의 눈매가 가늘어진다.
용서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그너를 완전히 신용할 수는 없다.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미끼로 사 용될 수가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가능하다면 더 엮이지 않는 것이 좋은 판단이다.
“뭐, 불안한 건 알아. 하지만 달 리 방도가 없잖아?”
“그렇다고 불안요소가 있는 너와 손을 잡을 필요는 없지.”
“음……. 그럼 이렇게 해.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정보를 네게 줄 게. 남은 사도들의 능력뿐만 아니 라 타키온의 역린(逆廳)에 대해서 도 말이지.”
서준의 눈에 이채가 어린다.
“타키온의 역린?”
거꾸로 난 비늘, 용족의 최대의 약점이라 일컬어지는 곳.
서준도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은 있으나 실존한다고는 생각하지 않 았다.
“이 몸은 용살자 지크프리트의 피가 흐르고 있는 몸이야. 용족의 역린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눈이 있
다고.”
말을 내뱉는 바그너의 눈동자에 는 흔들림이 없다.
적어도, 거짓을 논하는 것은 아 니라는 말이다.
바그너를 바라보고 있던 서준의 눈빛이 변했다.
‘가치는 충분하다.’
적의 약점을 알고 싸우는 것과 모르고 싸우는 것, 둘 중 전투에서 어떤 쪽이 유리할지 구태여 말할 필요도 없었다.
특히나 역린(逆廳)이라 불릴 정 도의 약점이라면 용족에게 절대적 불리함을 선사할 수 있을 것이다.
너무나도 좋은 제안인 만큼 서준 의 눈매가 가늘어진다.
“이렇게까지 나와 손을 잡으려는 저의가 뭐야?”
단순히 가문의 숙원 때문이라고 는 믿을 수 없었다.
본인의 일도 아닌 얼굴조차 알 수 없는 과거, 선조의 일이다.
이룰 수 있으면 좋겠지만, 열과 성을 다해 움직일 이유는 없었다.
실제로도 바그너의 얼굴에는 진 한 고민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영리한 친구는 이래서 싫다 니까.”
이내, 고민을 끝마친 바그너는 피식- 미소를 흘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