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권 5화
230화
“허업?!”
놀란 상대가 헛바람을 집어삼키 며 바닥을 굴렀다.
그리 흘륭한 몸놀림은 아니다.
신체 반응이 떨어지는지, 육체 능력이 떨어지는지 속도 역시 엄청 빠르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기껏해야 반신 정도인가.’
그런데 어째서인지, 쉽게 다가갈 수가 없었다.
정확하게 말해서는 다가가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동공 내부인데 이상할 정도로 몸 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마치 사우나에 들어온 것 같은 뜨거운 열기가 전신을 달구며 뜻대 로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뭐야……. 지그프리트의 후손 놈이 아니잖아?”
붉은 로브를 깊게 눌러쓴 아그나 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말을 내뱉는 사내의 모습은 여전 히 빈틈투성이였고 방어 마법을 펼 치고 있는 느낌도 아니었다.
손쉽게 목을 비틀어 쥘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본능적인 감각이 위험을 알리고 있었다.
때문에서준은 다소 조심스러운 움직임을 보이며, 거리를 유지했다.
‘분명, 무언가 있어.’
조급하게 생각해서는 안 되었다.
비록 부상당한 상태였다지만, 붉 은 로브의 사내는 나라연천을 제압 하고 납치할 정도의 실력자다.
무엇보다도 어차피 나라연천은 눈앞에 있다.
확실하게 놈의 목을 비틀고 나라 연천을 구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서준이 가늘게 뜬 눈으로 붉은 로브의 사내를 응시하 고 있던 순간이었다.
“예상 밖이긴 하다만 타키온 님 의 성역에 침입한 죄만으로도 죽어 마땅하다.”
붉은 로브를 깊게 눌러 쓴 사내 가 비릿한 웃음을 흘리고는 곧 손 바닥을 넓게 펼치며 마나를 응집시 킨다.
‘온다.’
허공에서 화염의 구체가 형성되
며 쏘아진다. 쿠구구궁-느리다.
본능이 경고를 보내왔다고 보기 에는 너무나도 조잡한 기술이었다.
분명, 그리 생각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제대로 된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화염의 구체 가 시야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음……?’
몸이 마치 천근추에 짓눌리는 것 처럼 무거웠다.
실제로 서준의 반응은 여태 없었
을 정도로 느렸다.
‘대체 왜?’
기운이 제대로 읽어지지 않는다.
아니, 기운이 의도한 대로 운용 되지 않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기운을 제대로 느끼 지 못해 이미 한번 동공에 진입하 면서 침입을 알렸었다.
펼쳐놓은 기감을 생각하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의문의 상황이 연속된 탓일까?
지금의 체내의 기운들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것을 확연하
게 감지할 수 있었다.
휙-
서준은 황급히 바닥을 구르는 것 으로, 아슬아슬하게 화염의 구체를 피해낸다.
“동공 자체가 함정이었네.”
이제야 확실하게 느껴진다.
붉은 사내의 로브는 일대의 마나 를 제어하고는 그것을 태우고 있었다.
일대에 뜨거워진 공기는 대기 중 의 기운, 마나가 타오르면서 생긴 현상이었다.
의도한 대로 기운이 움직이지 않 고, 내력을 다룰 수 없는 만큼 상 대적으로 몸의 움직임이 둔해진 것 이었다.
지금 당장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
‘동공의 입구에서부터……
일대의 마나가 타올라 사라지고 있었다.
펼쳐놓은 기감 또한 일대의 기운 이 사라지어 몇 배는 느슨해진 것 이었다.
난생처음 겪어보는 상황이었지만, 그리 당황할 것은 없었다.
이와 비슷한 느낌의 기운의 운용 을 이미 느껴본 적이 있기 때문이 었다.
‘ 폐안……
지금처럼 일대의 마나를 태운 것 은 아니었다.
허나, 마나를 자유자재로 다뤄내 며 갖가지 재해(災害)를 만들어 내 었다.
다루는 방식은 다르지만, 운용 방식은 비슷하다.
종의 정점이기 전에 마나의 종주 라고 불리는 종족이 가진 권능에 가까운 특권.
“사도라 그런지 용족의 힘을 능 숙하게 사용하네.”
용족을 칭하는 여러 이명을 떠올 리며 던진 말에, 아그나의 입꼬리 가 호선을 그린다.
“후손 놈이 아니라 실망했었는 데……. 네놈 설마 한서준이냐?”
대답하지 않았지만, 애초에 답변 자체가 필요 없었다.
이 성역을 찾아내고, 단번에 정 체를 파악해낼 존재는 많지 않았다.
“더한 월척을 잡게 생겼군.”
지금 서준의 힘은 아그나를 가벼
이 압도할 정도다.
본래라면 압도적인 힘으로 무릎 꿇릴 수 있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내력의 운용을 봉쇄시킬 수 있는 능력은 서준의 입장에서도 너무나도 껄끄러웠다.
‘타키온 본인도 아닌데, 대단하 네.’
끊임없이 타올라 사라지고 있는 기운에 헛웃음을 홀렸다.
내력을 완전히 봉쇄한 것이다.
‘쉽지는 않겠네.’
기본적으로 육체 능력이 뛰어나
다지만, 그건 눈앞의 적 또한 그리 다를 바 없었다.
실제로도 갖가지 불안 요소들이 서준의 뇌리에 계속해서 떠오른다.
그렇다고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처음 중원 대륙으로 끌려갔던 그 날도, 내력의 도움 없이 순수한 기 술만으로 내력을 다루는 무인을 상 대해 본 적이 있었다.
한 번이 어려울 뿐이지 두 번은 그리 어렵지 않다.
‘충분히 가능해.’
더군다나 혼자만 페널티를 받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신격에 올랐을 정도의 강자가 이 렇게 나약한 화염구체를 다룰 리가 만무했다.
‘놈도 제대로 기운을 다뤄내지 못하고 있어.’
양쪽 다 기운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면 승산은 차고 넘친다.
계산을 마친, 서준은 천천히 주 먹을 말아 쥔다.
타키온의 계약자 아그나는 그런 서준의 자세를 보고는, 코웃음을 친다.
“마나도 다루지 못하게 된 몸으로 나와 싸울 수 있을 것 같나?”
아그나가 펼친 손바닥 위로 화염 의 구체가 생성되어간다.
‘한 번에 제압한다.’
여기는 적진 한복판이었다.
눈앞의 적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 이었다.
이곳에서 발목이 잡혀서는 안 됐 다.
서준은 서서히 거리를 좁혀오는 화염의 구체를 정확하게 응시한다.
흐!〜륵.* . . . . .
타오르는 불꽃이 시야를 가득 메 우는 순간, 땅을 박차며 몸을 날린
서준이 허리를 기역 자로 접었다.
쉭-
바로 위, 등을 스쳐 지나가고 있 는 화염의 구체가 살갗을 태웠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이 전신 을 찌릿찌릿 자극한다.
“크읍-!”
쓰라리다.
정신이 나가버릴 것만 같은 아득 한 고통에 땅을 딛고 있는 두 다리 가 후들거린다.
이런 고통을 느껴 본 것은 처음 혼돈의 힘을 다뤄냈을 때 이후 처
음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멈춰 설 수는 없었다.
참고 견뎌야지만 원하던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다.
‘할 수 있어.’
고통이 불러온 생존본능이 전신 을 가득 채운다.
중원 대륙 시절, 아직 평범한 인 간과 다를 바 없던 당시 전장을 누 비던 서준은 늘 이런 감각 위에서 있었다.
벼랑 끝에 몰려 있는 듯한 느낌, 금방이라도 떨어져 내릴 것 같은 낭떠러지에서 있던 것 같던 당시
의 삶, 그날의 감각이 되살아난다.
‘순간의 망설임은 곧 패배로 이 어진다.’
어느덧, 비틀거리는 다리를 올곧 이 세워 낸 서준은 쏜살같이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잡았다.”
입가에 호선을 그리고 있는, 서준의 손이 아그나를 향해 뻗어진다.
투욱.
로브의 두꺼운 가죽이 손에 닿는 다.
이를 악문 서준은 손에 잡혀 있
는 로브를 반시계 방향으로 말아 쥐었다.
그리 특별할 것 없는 기술이다.
허나, 적을 제압하기에는 이보다 확실한 방법이 없었다.
“아악!”
괴성에 가까운 고함과 함께, 주 먹에 말린 로브를 그대로 하늘 위 로 넘기듯이 들쳤다.
전력을 쏟아부은 힘으로 손에 잡 혀 있는 로브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놀란 아그나가 잡고 있던 나라연 천까지 팽개쳐 화염의 구체들을 빚 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무의미한 발악에 불과했 다.
“너만 특별한 능력을 지닌 게 아 니야.”
마나, 내력은 다뤄 낼 수 없었다.
그러나 신앙이 근원이 되는 신성 력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신성력은 단순히 내력을 증가시 키는 게 전부가 아니었다.
원한다면 순수한 내력처럼 사용 할 수도 있었다.
그저 내력을 중가시키는 용도로 사용하기에 효율이 너무 좋아서 그
런 방도를 생각해냈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내력이 봉인당 한 상황이라면 효율의 잣대는 달라 지는 법.
붉은빛의 힘, 신성력이 서준의 전신을 휘감아내더니, 화염의 구체 들을 찢어발긴다.
쿠
어느덧, 아그나의 육신은 바닥과 붙어있었다.
바닥에 처박힌 아그나의 입가에서 붉은 피가 터져 나오고 있던 순 간, 서준은 다급하게 발을 놀려 허 공에 떠오른 나라연천의 육신을 받
쳐 든다.
목적을 달성했다는 성취감을 만 끽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크읍.”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바닥에 박혀 고통의 신음을 홀리 고 있는 아그나의 위로 올라타고는 단숨에 심장을 꿰뚫어내려는 순간 이었다.
쌔액!
동공 깊은 곳에서 날아온 신형이 서준의 육신을 가격하고, 밀쳐낸다.
“하마터면 뒤질 뻔했잖아! 왜 이
렇게 늦게 나타나는 건데!”
원망 섞인 아그나의 말에 루프손 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 쓱인다.
“그래도 죽기 전에는 왔잖아.”
“애초에 결계의 완성까지 미끼 역을 자처한 건 너였잖아.”
쓰러졌던 서준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후우.”
예상치 못했던 공격에 충격을 고 스란히 받아서인지 안색이 그리 좋 지 못하였다.
아니, 당장의 충격이 문제가 아 니다.
‘셋.’
적의 증원, 가장 우려했던 상황 이 벌어졌다.
심지어 확실하게 하나를 제압하 지도 못한 상황이다.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까?
고민하는 사이, 바람 소리와 함께 한 자루의 검이 쇄도했다.
뒤를 돌아볼 것도 없었다.
서준의 입가에 피식- 미소가 흐
“성역의 힘을 빌리는 것도 모자 라 3:1 이라니……. 너무 치사하잖 아.”
눈앞의 로브를 걸친 사도들의 미 간이 찌푸려진다.
“바그너.”
“역시 네놈도 있었구나.”
여유롭게 걸음을 옮긴 마스터, 바그너가 전장에 합류한다.
자연스레 서준의 등 뒤에 선 바 그너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건 네 온다.
“도우러 온다더니 꼴이 말이 아 니군.”
“사정이 있어서 말이야.”
미소를 흘리고 있는 서준의 모습 에 바그너가 물음을 건네 온다.
“싸울 수 있겠나?”
“ 얼마든지.”
솔직히 말하자면 그리 여유롭지 는 않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다.
적을 눈앞에 두고 어찌 쓰러져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아주 좋은 눈빛이군.”
바그너가 입가에 호선을 그린 채
로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타키온과 직접 계약을 맺은 사 도 놈들이다.”
“마나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게 그런 것 같더라고.”
“반은 맞지만, 반은 틀렸어. 발동 자체는 사도 놈들이 한 것이겠지만, 일대의 마나를 제어하는 것은 타키 온이 펼쳐놓은 성역, 그러니까 결 계의 능력이거든.”
바그너의 말에서준의 입가에 미 소가 흐른다.
“결계를 해제할 방법은?”
상황이 조금은 좋아졌다고 볼 수
있었다.
사도들의 능력이 아닌 결계라면 그를 해제할 방법이 있을 거다.
그러나 헛된 희망에 불과했다.
“타키온을 죽이거나 성역의 중심 부의 핵을 파괴하는 것뿐이니, 지 금으로써는 없다고 봐야 하겠지.”
“최악이네.”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피어나던 찰나, 바그너가 조심스레 입을 열 었다.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알고 있 긴 하다만……. 곧장 익힐 수 있을 정도의 난도가 아니라서 말이지.”
고민조차 사치다.
훗날 타키온과의 싸움을 대비하 기 위해서라도 익혀둬야 했다.
아니, 당장의 위기를 넘기기 위 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했다.
“상관없으니까, 당장 말해.”
자세를 다잡고 있는 서준의 눈동 자에는 어느 때보다도 강한 투지가 어려 있었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