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권 24화
224화
듬직한 목소리 덕인지 서준의 답 변을 들은 쿠라마는 안도한 후 조 용히 눈을 감고 휴식에 들어갔다.
얼핏, 죽은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안정된 호흡과 체내를 활 성화시키고 있는 기운들이 육체의 회복을 돕고 있었다.
‘이쪽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네.’
서준은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가
나라연천이 치료 중이던 의료실로 향한다.
‘단서가 아직 부족하다.’
적지 않은 정보를 손에 넣긴 하 였지만, 인물을 특정할 정도는 아 니었다.
‘부족한 정보를 어떻게든 채워야 해.’
한두 발짝씩 걸음을 옮기자, 전 투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끝에는, 바라하가 힘 없이 널브러져 있었다.
붉은 선혈이 바닥에 범람하고 있
는 상황에 바라하는 당장이라도 생 명의 불씨가 꺼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다행이라면 아직 조치할 수 있는 수준이라는 점이었다.
서준은 황급히 내공을 운용해 바 라하의 육신을 회복시켰다.
물론, 부상이 매우 컸기에 의식 이 돌아오려면 쉽지만은 않아 보였 다.
사실, 서준이 의도적으로 혼수상 태를 유지시킨 것이었다.
‘나라연천을 납치해 간 적의 정 체를 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므네모시네의 염, 기절 혹은 사 망한 대상의 일주일간 기억을 읽어 낼 수 있는 아티팩트의 능력이 서준의 손에서 발현되었다.
띠링-!
[므네모시네의 손길이 발동됩니 다.]
[대상 ‘바라하’의 일주일간의 기 억을 읽습니다.]
쓸모없는 정보들을 하나하나 확
인하고 있을 필요는 없다.
서준은 곧장 얼마 전, 파탈라의 용족 숭배자들과 전투를 치렀던 기 억을 확인해 나갔다.
눈앞에 바라하가 겪었던 일들이 적나라하게 펼쳐지고 용족의 형상 이 새겨진 로브를 뒤집어쓴 인간들 의 모습이 나타났다.
‘생각했던 것보다 숫자가 많아.’
서른에 달하는 인원.
제법 많은 수의 갑작스러운 기습 이었지만 전투는 꽤나 대등해 보였 다.
쿠라마와 바라하의 존재감이 압
도적인 덕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과 같은 결과를 맞이한 것은 타오르는 불꽃 처럼 붉은 로브를 걸친 존재 때문 이었다.
‘강하다.’
하사받은 용언의 힘 때문일까?
붉은 로브의 사내는 입술을 달싹 이거나, 특별한 마법진 없이 마법 을 발현시켜 바라하와 쿠라마를 가 볍게 제압해냈다.
예상치 못한 기습이었다지만, 반 신급에 올라 있는 바라하와 쿠라마 가 제대로 된 반항조차 하지 못했
용족과 직접적인 계약을 맺은 존재의 힘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 이었다.
‘신격에 오른 존재.’
물론, 용족과의 계약을 통하여 빌려온 힘일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신격에 오른 존재와 견주어도 부족함이 없는 힘을 가지 고 있었다는 점.
‘작정을 하고 있었나 보네.’
서준이 허탈한 웃음을 홀리고 있 는 사이에도 기억은 계속해서 흘러 들어 왔다.
나라연천의 병실이었던 복도의 끝에 있는 방 앞.
아직 정신이 제대로 돌아오지 못 한 나라연천이 최대한의 힘을 발휘 한다.
계속되는 격전에 붉은 로브를 걸 친 존재의 옷이 찢긴다.
이윽고, 깊게 눌러쓰고 있던 후 드가 휘날리고 얼굴이 드러나려는 순간이었다.
‘누구냐.’
눈매를 가늘게 뜬 서준이 붉은 로브의 얼굴을 확인하려던 순간이 었다.
갑작스레 바라하의 기억이 완전 히 멈춘다.
직후, 기억 속의 공간이 일그러 지더니 파충류의 가늘어진 눈이 기 억을 훔쳐보고 있는 서준의 의식을 응시하고 있었다.
[내 사도의 흔적을 그런 조잡한 아티팩트로 훔쳐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느냐?!]
띠링-!
[므네모시네의 염의 능력으로는 제공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므네모시네의 반지의 능력 사용 이 종료됩니다!]
“허……?”
서준의 눈이 가늘어진다.
‘ 용족?’
틀림없었다.
일자로 가늘어진 동공에서 뿜어 내는 압도적인 기세.
‘용이 개입했어.’
방법은 알 수 없었지만, 용족은 틀림없이 므네모시네의 능력에 개 입했다.
그들이 대신(大神)에 준하는 힘 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리 놀라운 것도 아니었다.
‘추격을 피하고 싶어 하는 건가, 그게 아니면 계약을 맺은 사도를 아끼는 건가……?’
가능성은 최대한 열어 두는 것이 좋다.
잠시 걸음을 멈춘, 서준은 여러 모로 생각을 정리해 나간다.
‘아쉽긴 하지만 소득은 충분해.’
단조로운 검은 로브를 걸친 숭배 자들과 달리 불꽃처럼 붉은 로브를 걸치고 있으며, 주변으로 내뿜어지
던 용의 기세까지.
추적을 이어 갈 수 있는 단서들 이다.
뿐만 아니라 단순한 숭배자가 아 닌 진짜 용이 개입되어 있다는 사 실을 알아내었다.
‘더 이상 지구에 머물러 있어서 는 안 되겠네.’
만약 이곳, 지구에서 선계에서처 럼 용족과 싸움을 벌인다면?
싸움의 여파로 행성의 반 이상이 파괴될 것이다.
심지어 서준의 입장에서는 마음 편히 전투를 벌일 수도 없을 것이
여러모로 싸움은 지구에서 벌이 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그렇기에서준은 황급히 걸음을 옮기어 파탈라로 향했다.
잠시 후.
서준은 리벨리온의 간부들에게
대략적인 상황을 정리한 메시지를 전송했다.
직후, 혹여나 있을 일들에 대비 한 만반의 준비까지 끝마치고 곧장 파탈라의 입구를 향해 이동했다.
인지하고 있어서일까?
옥황이 말해준 위치에 다다르자, 기존과 다른 기운들이 명확하게 느 껴진다.
‘흐르고 있는 물로 펼쳐낸 결계 로 기운의 흐름을 가르고 있었다 니……
과연 용족이다.
기운을 조율하는 것이 여간내기
가 아니었다.
허나, 은밀하게 숨겨두려 한 만 큼 방어 능력은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서준은 가벼이 손을 놀리는 것으로 한강 속 내부에 숨겨진 게이트 의 근방에 둘린 결계를 강제로 찢 고 부쉈다.
쨍그랑-!
적나라하게 드러난 게이트, 서준 은 그 안의 길 너머로 몸을 던져 파탈라로 향했다.
얽혀있던 기운의 흐름이 제자리 를 찾아가며 어지럽던 시야가 환한
빛을 되찾았다.
직후, 서준은 고개를 두리번거리 며 주변을 확인한다.
‘숲‘?’
지구에서는 보기 힘든 높은 나무 가 가득한 숲이었다.
울창한 나무숲을 바라보고 있는 서준의 시선이 가늘어진다.
“지나간 지 그리 오래되지는 않 았어.”
방금 기억 속에서 보고 느꼈던 용족 숭배자가 뿜어내던 기운이 느 껴지고 있었다.
감각을 한층 더 날카롭게 일으켜 세운 서준은 끈질기게 혼적을 쫓았다.
그렇게 십 분쯤 시간이 흐르고, 서준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기운의 흔적이 끊겼어?’
추적에 실패한 것은 아니다.
한동안 그 자리에서 머물더니 갑 자기 사라지듯이 자취를 감춘 것이 었다.
‘무슨 수를 썼을까……
머리를 아무리 굴려봤자, 지금으로써는 알 방법이 없다.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보는 수밖 에 없었다.
‘거리가 제법 멀긴 하다만……
게이트가 생성된 위치는 차원의 서쪽 방면이었다.
그리고 숭배자들의 기운이 끊긴 곳은 북쪽 방면의 끝자락에 위치한 도심지 였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마음먹고 이동한다면 순식간에 쫓아갈 수 있었다.
목표를 세운 서준은 곧장 땅을 박차고 날아오른다.
탁-
“부지런하게도 움직였네.”
최종적으로 기운의 혼적이 남아 있던 곳은 북쪽의 도심지.
서준은 그곳을 향하여 망설임 없 이 나아갔다.
그렇게 비행을 계속하던 서준은 얼마 가지 않아서 움직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난감해졌네.”
중세시대를 빼다 닮은 조잡하지 만 우람한 성벽과 그 안에 앤티크 건물이 우후죽순 서 있는 도심지를
바라보던 서준이 뒷머리를 긁적인 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족 히 수십만 명은 살고 있을 것 같은 거대한 도심지의 중심지에 거대한 용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기 때문이 었다.
당연하지만, 서준이 겨우 동상 따위의 기세에 억눌려 곤란을 표하 는 것이 아니었다.
‘이 도시는 용을 숭배하고 있어.’
보통 도심의 중심지에는 가장 중 요한 인물 혹은 영웅적 행보를 보 인 이의 동상이 세워지기 마련이다.
그 용족과 싸우러 온 서준을 곱 게 봐줄 리가 만무했다.
‘정보 수집은커녕 자칫하면 도시 전체와 싸워야 할 수도 있겠는데.’
물론, 패배를 염두에 두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제대로 마음을 먹는다면 저들이 인지하기도 전에 도시 전체 를 날려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서준이 차원 파탈라에 온 목표는 어디까지나 나라연천의 구 출이 었다.
굳이 존재감을 드러내 적에게 추 격을 해왔다는 사실을 알려 경계심
을 일깨워 줄 필요가 없었다.
‘일단은 조용히 들어가자.’
성벽에 보초를 서고 있는 몇몇 병사들이 보이긴 했지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서준이 발걸음을 빠르게 움직인 다.
쌔액-!
대기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려오 는 순간, 서준의 신형은 이미 도심 지 내부에 도착한 후였다.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
원래 정보는 입에서 입을 타고
전해지는 법이다.
이는 즉,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이 는 곳을 찾으면 된다는 말이었다.
서준은 기파를 퍼뜨려 인기척이 모인 중심지를 탐지했다.
얼마가지 않아, 도심의 중심지에서 다수의 기척이 감지된다.
심지어 사람들이 운집한 건물의 규모 또한 제법 거대했다.
‘얼핏 간추려도……. 백 명은 넘 는다.’
웬만한 작은 마을이라고 봐도 무 방한 수준의 사람 수.
이 정도로 사람이 모여 있다면 충분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 다.
서준이 목표를 정하고 걸음을 떼 는 순간, 그의 신형이 순식간에 사 라졌다.
해룡(海龍)의 아침, 파탈라에 위 치한 제국의 수도, 타그마타에서도
가장 술이 맛있기로 소문난 주점이 었다.
당연하지만, 각양각색의 직업을 가진 많은 사람에게 두루 인기가 많은 집이었다.
덕분에 갖가지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파탈라에서 용족은 단순한 숭배 의 상징이 아니다.
이따금 모습을 드러내 가진 위용 을 뽐내는 절대적인 존재.
물론, 단순히 위용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는 사람들에게 숭배받을 수 없었올 것이다.
본래 파탈라의 땅은 인간이 주를 이루고 있는 차원이 아닌 몬스터가 지배하는 세상이었다.
그러나 위대한 용족이 현현하여 사람에게 갖가지 지식을 전파해주 었고, 몇몇 인간들에게 축복을 내 려줌으로써 차원의 주객이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용족이 내려준 축복으로 순식간 에 마나를 느끼고 부릴 수 있는 마 법사가 된 인간들은 순식간에 몬스 터를 학살해나가기 시작했다.
그 직후부터는 일사천리였다.
최초의 마법사, 알드노아는 위대
한 용족과 인간이 파탈라 대륙의 주인임을 공표하고 나라를 건국했 다.
강한 힘과 신비한 능력은 언제나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법이었다.
몬스터들이 군림하던 차원, 파탈 라는 단숨에 제국의 손아귀에 떨어 지고 인간은 유례없는 큰 부홍을 맞이했다.
“그게 바로 저희 자이로스 제국 의 건국신화입니다. 아니, 실제로 용께서 모습을 드러내고 계시니 단 순한 신화라고는 볼 수 없죠.”
앉을 자리 하나 찾기 힘든 왁자
지껄한 주점 내부.
음식과 술을 나르고 있던 붉은 머리를 한, 앳되어 보이는 종업원, 셀리우스가 환하게 웃는 표정으로 재잘재잘 이야기를 내뱉고 있었다.
“혹시 다른 궁금하신 게 있으신 가요?”
서준은 대답 대신 안주머니에 손 을 넣었다.
본래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 는 법이다.
중원 대륙에서도 그렇듯 기본적 인 정보값이라는 게 존재했다.
혹시나 싶어 파탈라로 넘어오기
전 언제든지 화폐로 이용될 수 있 는 물건인 금을 챙겨두기를 잘했다.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뺀, 서준은 손가락을 튕기어 500원짜리 동전의 크기만 한 금화를 던진다.
두 눈이 휘둥그레진 종업원이 황 급히 서준이 던진 금화를 받아든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무엇이 든 여쭤봐 주십시오. 성심껏 대답 하겠습니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파탈라 내에서도 금의 가치는 귀했다.
‘사람 허영심이라는 게 다 똑같 다는 거지.’
잠시 입가에 헛웃음이 흘렀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금의 가치 따위 가 아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일이 복잡해지 겠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