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권 23화
223화
연분홍 벚나무 잎이 떨어지는 곳.
백옥경(白玉京)의 중심지에 선 서준은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이곳이 선계의 근원.’
중원 대륙에서 이름 좀 날렸다는 무인들도 보면 기겁할 수준의 기운 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확실히 차원 하나의 핵이라 불릴 만한 곳이었다.
“궁금한 것이 많을 테지만 지금 당장은 모든 것을 말해줄 수는 없 네.”
벚나무 앞 우아한 대궐, 그 중심 에 있는 황금빛 의자에 앉아 있는 옥황이 신음을 홀리며 말한다.
“알고 있어.”
서준의 고개가 주억여진다.
일전에 나라연천과 대화를 통하여 우주의 비밀을 발설하게 되었을 경우 어떠한 대가를 치르게 되는지 이미 익히 알고 있었다.
‘극히 일부분의 이야기를 내뱉는 것만으로 혼수상태에 빠졌었다.’
물론, 대신(大神)이라는 옥황의 격을 생각한다면 어쩌면 그 대가를 좀 더 감당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옥황은 큰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발설하게 될 경우, 적잖은 충격 을 받을 것이다.
최악의 경우, 소멸도 상정해야만 했다.
당연하지만 서준은 폐안을 쓰러 뜨리는 것으로 구명의 은혜를 입힌 옥황이라는 좋은 우군을 허무하게 잃을 생각은 없었다.
“나도 그렇게 매정하진 않아. 몸
을 완전히 회복하기 전까진, 질문 을 아끼겠어. 혹시 내가 실수로 중 요한 질문을 하더라도 굳이 답할 필요는 없고.”
“배려해주어서 고맙네, 그래도 약조한 것이 있으니 답변할 수 있 는 것은 곧장 대답하도록 하겠네.”
이미 머릿속으로 정리해놓은 질 문들이 있는 만큼 서준은 곧장 입 을 열었다.
“어째서 용족, 폐안과 싸우게 된 거지?”
옥황이 미간을 찌푸린 채로 고민 을 이어간다.
허나 서준은 답을 재촉하지 않는 다.
말을 아끼며 생각에 잠긴다는 것 은 던진 질문이 우주의 비밀과 관 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무거운 침묵이 흩날리는 벚꽃 잎 을 타고 내리 깔려가던 찰나, 서준 을 응시한 채로 한 차례 고개를 주 억인 옥황이 입을 연다.
“시간 축을 건드리며 균형을 어 그러뜨리려 한 대가일세.”
답변은 어려웠지만, 질문은 빠르 게 떠오른다.
“그 대가를 어째서 용족이 내리
러 오는 거지?”
입을 닫은 옥황이 고개를 내젓는 다.
답을 바라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필요가 없었다.
침묵만으로도 충분한 대답이 되 었다.
‘입 밖으로 발설조차 할 수 없는 존재.’
서준이 알기에 이러한 존재는 하 나뿐.
우주의 비밀을 쥐고 있는 존재.
용족의 행동이 그들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용족 을 찾아가 이유를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굳이 조바심을 내며 차원 곳곳을 뒤지며 찾아다닐 필요는 없 었다.
“나 또한 그 대가를 치러야 하겠 지?”
시간 축에 손을 댄 것은 옥황이 지만, 그 효과와 혜택을 받은 것은 서준이다.
실제로도 그 폐안은 서준을 보고 균형을 어지럽힐 존재라 일컬었고,
강한 적대심을 보였다.
마주했던 용족의 성정을 생각한 다면 분명, 그에 따른 대가를 치르 게 하려 할 것이었다.
역시나 옥황은 고개를 주억이며 입을 열고 있었다.
“머지않았다고 보네.”
어차피 용족은 제 발로 찾아올 것이라는 말이었다.
구태여 힘들게 용족을 찾을 필요 가 없었다.
지금 해야 할 일은, 용족들의 침 공을 대비하는 것이다.
“용족은 앞으로 얼마나 더 남아 있는 거지?”
지피지기 백전불태라는 말이 괜 히 있는 것이 아니다.
적의 전력을 파악해 놓는다면 그 에 따른 대비를 해놓을 수 있었다.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 허 나 최소 열 이상이라고 보아야 할 걸세.”
옥황의 대화를 경청하고 있던, 서준의 입가에 헛웃음이 흐른다.
열 이상.
용족의 강함을 생각한다면 머리
가 지끈거릴 정도로 많은 수였다.
“그래. 덕분에 앞으로 할 일이 정리됐어. 답변 고마워.”
“이게 끝인가?”
피식 미소를 흘린, 서준이 어깨 를 으쓱인다.
“그럴 리가.”
갑작스런 지구의 변화, 그리고 포스 시스템에 관련된 질문들과 천마의 보구의 위치까지.
아직 묻고 싶은 것들이 산더미처 럼 많았다.
반드시 물어봐야 할 질문들이었
지만, 그중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이거였다.
“내가 사용하던 천마의 보구 말 이야……. 행방을 알고 있지?”
애초에 천마의 보구의 행방을 알 아보는 것이 서준이 본래 선계, 옥 황을 만나려 했던 목적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대신급의 천사와 악마뿐만이 아닌 용족과의 싸움을 앞둔 만큼 더더욱 회수에 박차를 가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다행히도, 우주의 비밀과 관련된 질문이 아닌 만큼 옥황은 곧장 대 답을 건네 왔다.
“위치를 알고 있긴 하지만 회수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걸세.”
주인이 제 물건을 찾아가는 게 어려울 리가 있는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서준의 모습 에 옥황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첫 싸움에서 패배를 겪고 백옥루에서 밀려나게 되었을 때 폐 안이 회수를 해서 다른 차원으로 보내는 것을 보았네, 아마…… 다 른 용족의 손에 들어갔을 걸세.”
“그런 이유라면 전혀 문제없지.”
한계를 돌파해낸 그릇이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였다.
설사 다른 용족의 손에 들어갔다 할지라도 회수를 해올 자신이 있었다.
아니, 오히려 이건 기회다.
아무런 정보가 없다면 모를까, 옥황이 위치를 알고 있는 지금은 용족과 전쟁을 벌이기 전 그들의 수를 줄여놓을 수도 있는 둘도 없 는 기회였다.
“어디로 갔는지만 말해 줘.”
“우선 가장 가까운 곳부터 말하 자면, 차원 파탈라다.”
“파탈라……? 거기가 어디지?”
“자네가 사는 지구, 한국이라는 나라에 있는 게이트를 이용하면 이 동할 수 있지.”
“그런 곳이 있다고?”
미간이 찌푸려지고 있는 서준의 얼굴에 옥황의 목소리도 무거워져 간다.
“게이트의 상태가 매우 안정적인 걸로 보아서는 제법 오래전부터 열 려 있었을 걸세.”
“정확히 위치를 알고 있어?”
“자네의 언어로 표기를 하자 면……. 이곳이다.”
옥황은 다급히 손에 쥔 붓으로 글자를 적어낸 이후 서준의 앞으로 내밀었다.
직후, 종이에 적힌 글을 확인한서준의 눈매가 가늘어진다.
“걸리는 점이 있나 보군.”
옥황의 말에서준이 무겁게 고개 를 주억인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일 전에 휘하 차원에 관련된 정보를 열람할 수 있게 된 직후, 지구에 숨겨져 있던 게이트들을 모두 닫아 낸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파탈라라는
곳과 연결되어있던 게이트는 전혀 보지 못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던 만큼 실수를 하거나, 놓친 것은 아니라 고 말할 수 있었다.
‘아카식 레코드로도 발견하지 못 할 정도로 은폐가 되어있었다는 거 겠지.’
꺼림칙한 느낌이 든다.
단순히 기우라고 치부할 수 있었지만, 과거에 실제로 많은 도움을 받은 적이 있던 만큼 서준은 본인 의 감각을 상당히 신뢰하는 편이었다.
실제로도 파탈라 차원으로 향하 는 게이트가 있는 곳이 다름 아닌 서준이 거주 중인 서울의 중심지인 한강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직접 눈으로 확인해봐야 할 일 이라, 우리 대화는 나중으로 미뤄 야겠어.”
다급한 목소리를 흘리는 서준의 모습에 옥황도 곧장 고개를 끄덕인 다.
“그러면 나는 자네가 돌아올 때 까지 최대한 몸을 회복해놓도록 하 겠네.”
“그래. 관리 잘하라고.”
서준이 말을 끝맺는 순간이었다.
쉬익-
일대에 바람이 휘몰아친다.
어느덧, 서준의 신형이 완전히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백옥경을 벗어난 서준은 곧장 중 원 대륙을 넘어, 지구로 되돌아왔
다행이라면 지구에 큰 이변이나 전쟁의 징조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 이었다.
그러나, 꺼림칙한 기분은 사라지 지 않고 있었다.
때문에서준은 곧장 간부가 주로 모여 있는 리벨리온의 세이프티 쉘 터로 향했다.
‘모두 괜찮아야 할 텐데.’
그렇게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도 착한 여의도.
푸른 하늘 속을 전속으로 돌진해 세이프티 쉘터로 향하고 있던 서준
의 몸이 흠칫- 떨린다.
‘ 이건?!’
여의도에 진입하자마자 공기가 변했다.
잘 벼린 칼날처럼 싸늘하면서도 날카로운 느낌.
분명, 무슨 일이 벌어졌다.
확신에 가까운 직감이 서준의 발 끝에서부터 허리까지 타고 올라 뇌 리를 짜릿하게 자극한다.
쌔액-!
기운을 일으켜 가속한서준이 곧 장 세이프티 쉘터의 입구로 다가갔
연합 소속의 일원들이 항시 CCTV를 주시하고 있는 만큼, 본 래 자동으로 열려야 할 문이 아무 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혹시나 하는 상황에 안주해 확인 절차를 하나하나 밟아갈 때가 아니 었다.
쾅-!
단숨에 쉘터의 문을 부수고 내부 로 들어선 서준이 주변을 둘러본다.
‘전투의 흔적이 전혀 없어.’
역설적이지만 그렇기에 더욱 불 안이 커져갔다.
입구를 지키고 있어야 할 인원이 한 명도 보이지 않은 것이다.
제대로 된 반응, 인지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압도적인 힘으로 제압 을 해냈다는 것이었다.
서준은 곧장 기운을 퍼뜨려 인기 척을 찾는다.
‘안쪽에 몰려 있다.’
꽤나 많은 기척이 넓은 쉘터의 깊숙한 곳에 몰려 있었다.
서준이 황급히 다시금 발을 놀리 며 나아가기 시작한다.
쉘터의 내부로 진입할수록 코끝
에 비릿한 혈향이 강해진다.
‘전투가 있었다.’
느끼고 있던 불안이 현실이 되어 갈 무렵이었다.
나라연천의 친위대 하나가 바닥 에 처참한 몰골로 쓰러진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쿠라마?”
“크으읍……. 지구의 투신인가?”
팔 한쪽이 찢겨 나간 그는, 서준 을 알아보고는 쓴웃음을 홀린다.
“대체 어디 있던 것이냐……. 나 라연천 님을 지켜준다고 약속해놓
고..
“약속은 반드시 지킬 것이니 걱 정하지 마, 우선은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이니 말을 아끼고 고개를 끄덕이거나 내젓는 것으로 대답해 라, 나라연천은 어떻게 되었지?”
서준의 배려에도 쿠라마는 다시 금 입을 열었다.
“내 몸은 내가 가장 잘 안다…… 한동안 움직일 수 없겠지만 이 정 도로 죽을 정도로 그리 나약하지는 않다……. 나라연천 님은 적들에게 붙잡혀 가셨다.”
괜한 오기를 부리는 것은 아니
상처가 심각했지만, 체내에 흐르 고 있는 기운이 쿠라마의 육신을 회복해나가고 있었다.
쿠라마의 말대로, 다소 시간이 필요하긴 하겠지만 확실하게 완치 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라연천을 제외한 다른 인원은 어떻게 됐지?”
“쉘터가 비어있는 틈을 타 습격 을 해온 것 같으니 다른 리벨리온 의 간부들은 이곳 상황 자체를 모 르고 있을 거다……. 후우, 후우.”
불행 중 다행으로 상상했던 것만
큼 피해가 크지 않았다.
상태가 좋지 못하였지만 쿠라마 는 살아있고, 나라연천 또한 죽음 을 맞이한 것이 아닌 납치를 당했 다.
이 정도라면 충분히 만회할 수 있었다.
서준은 곧장 적의 정보를 수집해 나갔다.
“누가 침공해온 거지?”
얼굴에 짙은 그늘이 드리운 쿠라 마가 입을 연다.
“용족 숭배자……
불안한 예감은 완벽하게 적중을 했다.
서준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파탈라 소속이었나?”
“어떻게 알고 있는 거냐……?! 쿨럭-!”
거센 외침의 여파로 인하여 붉은 선혈을 토한 쿠라마가 사나운 눈빛 을 빛냈다.
“지구가 아닌 다른 차원에서 용 족과 싸움을 벌이고 왔지.”
너무나도 믿기 힘든 말에, 두 눈 을 휘둥그레 뜬 쿠라마는 저도 모
르게 반문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용족과 싸웠다고?”
지금은 상황이 상황인 만큼, 친 절히 하나하나 설명하고 있을 시간 이 없었다.
“내 이야기보다는 이곳을 습격하 고 나라연천을 납치해 간 적들에 대해서 말해 봐.”
“용족을 상징하는 문양, 용의 형 상이 그려진 로브들을 걸치고 있었다. 대다수가 보잘 것도 없었지만, 몇몇 놈들은 용언을 이용한 마법을 사용했지.”
“용언?”
“용족에게 하사받은 힘으로 보였 다. 특히 우두머리로 보이는 녀석 은…… 용족과 직접적인 계약을 한 것 같더군.”
“용족……
“이 이상으로 자세한 정보를 알 기에는 내 실력이 부족했다……. 미안하다.”
“아니. 충분해. 이제부터는 내가 놈들의 흔적을 좇겠어.”
이미 차원, 파탈라의 위치는 알 고 있었기에 정체만 알고 있다면 찾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제발……. 나라연천 님을 구해
다오.”
쿠라마의 간절한 목소리에서준 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답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구해 올 테니까, 다시 나라연천과 만날 때를 대비해서 회복에 전념하고 있 도록 해.”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