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권 18화
218화
한뫼는 그로부터 10분이 더 지나 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잔뜩 겁에 질려 자비를 바라던 한뫼는 주변에 내리 앉은 침묵을 뒤늦게 인지하고는 그제야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려 보였다.
“그, 그분께서는?”
“갔어.”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한뫼가 두려워하는 그분, 검은 괴물은 애
초에 이곳에 오지도 않았었다.
방금 느낀 존재감은 틀림없이 선 계의 주인이라 일컬어지는 옥황의 것이었다.
한뫼를 위협하려는 것은 아니었 겠지만,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대 신(大神)에 이른 존재인 만큼 한뫼 가 공포를 동반한 경외심을 느끼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고 있는 한 뫼의 시선이 서준을 향한다.
“이런데도 정말로 백옥루의 중심 으로 가실 생각이신 겁니까?”
“아무 소득도 없이 돌아갈 수는 없지.”
“목, 목숨보다 귀한 것은 없습니 다, 검은 괴물의 그분은 아주 위대 하고 무서우신 분입니다.”
서준의 입가에 헛웃음이 흐른다.
“지금 날 걱정하는 건가?”
“그, 그분께서는 이야기로 전해 지는 것처럼 선인들과 옥황을 홀로 상대할 정도로 강하신 분입니다.”
“ 오호
서준이 눈을 반짝였다.
역시 허구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옥황을 비롯한 선인들과, 검은 괴물이라 불리는 폐안은 서로 싸운 전적이 있는 듯했다.
“그분의 영역을 침범하려 한다면 지옥의 업화보다 더 뜨거운 불꽃이 심판을 내려올 겁니다.”
한뫼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서준 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운다.
“불꽃이라……
당연하지만 서준은 패배를 생각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싸움으로 인해 혹여나 선계에 남아 있을 수도 있는 천마의 보구 들이 부서질 수도 있다는 염려가
있었다.
걱정해야 할 것은 보구의 안전뿐 만이 아니었다.
‘옥황 또한 만만히 볼 상대는 아 니다.’
비록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 았지만, 폐안과의 싸움으로 선계를 파괴하게 될 경우 옥황의 분노를 사게 될 수 있었다.
여러모로 신경 써야 할 점이 많 았다.
‘기왕이면 백옥루의 상황을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고 싶다만……
비단 한뫼뿐만이 아닐 것이다.
지금 백옥루에 거주하고 있는 존재들은, 폐안에 대하여 이름 정도 외에는 아무것도 대답하지 못할 것 이다.
정보를 수집할 방도가 없다는 것 이다.
서준은 생각을 정리한다.
‘검은 괴물, 폐안(理狂).’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존재는, 대신(大神)에 이른 신격이라고 추 측이 된다.
실제로도 대신에 올라 있는 옥황 과의 싸움에서도 승리했다고 전해 지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압도적으로 강력한 것은 또 아니야.’
정말로 선인들과 옥황을 모두 죽 였다면 검은 괴물은 선계의 주인이 라는 명칭을 얻었을 것이다.
심지어 검은 괴물은 옥황과 달리 메시지를 보낸다거나, 특별한 움직 임을 보이지도 않고 있었다.
‘대신의 힘을 가진 두 존재가 한 차원에 공존하고 있음에도 둘 다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라……
생각이 이어지고 퍼즐이 하나둘 씩 맞춰져 간다.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을 거 야.’
폐안은 옥황을 쓰러뜨릴 기회를 노리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도 아니면 놈도 쉽게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얼마 전 옥황과의 싸움 탓일 수도 있고 말이지.’
지금 당장으로써는 어느 쪽의 상 황인지는 알 수 없었다.
허나 폐안에게 무언가 제한이 있 는 것은 확실했다.
애초에 선인들과 옥황은 어디 누
가 함부로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 었다.
그들과 홀로 싸움을 벌인 이후,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다.
‘대충 그림이 그려지네.’
전투에서 패배한 옥황은 백옥루 의 중심지에 몸을 숨겼고, 폐안은 그 안에서 최후의 전투를 준비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건 기회다.’
구명(救命), 그것은 은혜 중 가장 으뜸이었다.
옥황에게 물어볼 것도, 알고 싶 은 것도 많은 서준의 입장에서는
이런 기회를 놓칠 이유가 없었다.
결론을 내린 서준이 자리를 박차 고 일어선다.
“한시라도 빨리 백옥루의 중심으로 가 봐야겠어.”
“예?! 제가 이야기했던 것을 벌 써 잊으신 겁니까? 그분의 심기를 건드려서 심판의 불꽃이 떨어지면 어쩌시려고……!”
당황하는 한뫼의 목소리에, 서준 은 억누르고 있던 힘을 해방시킨다.
대신(大神)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을 그 기세에, 한뫼의 눈이 휘둥 그레진다.
두 눈동자에는 존경, 그리고 경 외심이 차오르고 있었다.
“나, 나리께서는…… 대체……
“백옥루에 거주하는 모든 이에게 알려라, 최강이자 최악의 마선(魔 仙), 한서준이 지금 돌아왔노라고.”
서준의 선언에, 한뫼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백옥루의 중심으로 걸음을 옮기 자, 그간 중심으로 발을 디뎠던 이 들이 돌아오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대결계, 미궁.’
백옥루를 수호하던 핵심 결계이 자 한번 빠지게 되면 끝없는 미로 를 헤매게 된다는 끔찍한 결계였다.
물론, 이미 한번 파훼해본 적이 있는 서준에게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헤매지 말고 단번에 틈을 파고 들고 뚫어내면 된다.’
혼돈의 힘을 펼쳐내어, 결계에
틈새를 만들어 낸 서준은 단숨에 내부로 파고들었다.
‘더 이상 눈치 볼 건 없다.’
옥황의 위협이 공포에서 나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설령 그 위치가 백옥루의 중심, 백옥경이라고 하여도 말이다.
쾅-!
폭음과 함께 백옥루, 내성의 정 문이 무너져 내린다.
성채를 지키고 있던 선인들의 눈 이 휘둥그레진다.
“적이다!”
“방어를 준비해라!”
그러나 누구도 서준의 앞길을 막 아서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신형을 두 눈으로 확인한 이가 없었다.
빠른 속도로 내성의 성문을 꿰뚫 고 들어간 서준은 백옥루의 중심지 를 향해 빠르게 나아간다.
[당장 돌아가라! 어리석은 것이 여!]
선계의 주인, 옥황이 보내는 메 시지가 뇌리에 울려 퍼진다.
‘너를 위협하러 온 게 아니라 도 우러 가는 거니까 걱정하지 마라.’
[네놈의 도움 따위는 필요 없으 니 당장 돌아가라!]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법 아니겠는가?
“이러니까 더 가보고 싶잖아.”
미소를 홀린 서준은 더 이상 옥 황의 메시지에 개의치 않고 발을
놀린다.
처음에는 혹시나 하는 추측일 뿐 이었다.
그러나 지금 옥황의 반응을 보자 니 확신할 수 있었다.
‘놈은 나에게 숨기고 싶은 것이 있다.’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한 것은 아 니지만 어느 정도 추측이 된다.
내뱉는 다급한 말과 내부로 다가 갈수록 옥황의 기운이 크게 느껴지 는 탓이었다.
‘옥황은 큰 상처를 입었다.’
서준은 이미 옥황과 마주한 적이 있었다.
과거, 옥황의 기세는 정말 대신 (大神)이라는 명칭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거대하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지금 기세는 달랐다.
여전히 대단했지만, 나약하고 위 태로웠다.
‘생각했던 것보다 상태가 더 심 각한가 보네.’
어째서 옥황이 그렇게까지 돌려 보내려 했는지 알 수 있었다.
한때 앙숙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었던 적에게 지금같이 나약한 자 신의 상태를 보이고 싶지 않은 것 이었다.
‘나를 믿어라, 옥황.’
최강이자 최악의 마선으로 선인 들과 앙숙 관계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사소한 오해 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더군다나 옥황은 천 년의 염원을 풀어 준 존재 아닌가?
서준은 최소한의 도의는 있는 자 였다.
콰쾅-!
몇 개의 문을 부수고 중심으로 나아가고 있는 서준의 앞을 신격에 도달해 있는 선인들이 막아선다.
“이 앞으로는 지나가지 못한다.”
중심에서 있는 존재의 말에 백 색의 도포를 휘날리는 선인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서준을 향해 달려든다.
“막아 세워라!”
이후 이어진 명령에 각자의 절기 (絶技)들이 펼쳐진다.
과거에는 꽤나 이름을 날렸을 법 한 무공들이다.
허나, 지금 서준의 입장에서 보 자면 매우 하찮았다.
굳이 혼돈의 힘을 사용할 것도 없었다.
서준은 치천마역천지공의 힘으로 빚어낸 의념강기를 몸에 두르며 망 설임 없이 정면을 향해 나아간다.
쿵, 쿠응
폭음이 연달아 발생하며 달려들 던 선인들이 벽면에 처박힌다.
“커헉!”
붉은 선혈을 홀리고 있는 선인들을 가볍게 지나치고 있는 서준이
입술을 달싹인다.
“힘 조절올 했으니 바로 운기조 식을 취한다면 큰 타격은 없을 거 다.”
검은 기운이 휘감긴 신형은 단숨 에 널브러져 있는 선인들을 지나친 다.
이후로도, 몇 번이고 수십의 선 인들이 앞을 막아서려 했지만, 결 과는 다르지 않았다.
‘아직도 나를 믿지 못하겠나?’
서준이 메시지를 전달했다.
대상은 선계의 주인, 옥황.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의 우린 만나서는 안 된다!]
어느덧 서준의 눈앞에는 거대한 철문이 서 있었다.
그 앞을 지키고 있는 것은 상당 히 익숙한 얼굴을 하고 있는 선인 이었다.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주먹을 내 뻗은 그가 눈을 빛내며 서준을 응 시한다.
“오랜만이네.”
말을 내뱉고 있는, 서준의 눈에 투기가 어린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눈 앞의 선인은 팔선(A仙)이라 불리 는 선계의 수호자 중 한 명.
“권성(奉聖), 장삼봉.”
땅을 박찬 장삼봉의 신형이 흩어 지더니 눈앞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마선이여! 이곳이 감히 어디라 고 발을 들이는 것이냐!”
쌔액-!
내뻗어진 주먹이 서준을 꿰뚫어 낼 기세로 쏘아진다.
‘혼천마공, 일격(一擊)
쾅-!
마찬가지로 내뻗어진 서준의 주 먹이 장삼봉의 주먹에 맞부딪히며 굉음을 토했다.
회색빛 기운, 그 힘을 확인한 장 삼봉의 눈이 부릅- 하고 뜨였다.
“어찌…… 금기된 힘올……
“미안하지만, 그렇게 큰 상처를 입은 상태의 너는 시간 끌기조차 되지 못한다.”
둥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기겁 한 장삼봉이 황급히 몸을 돌린다.
아니, 돌리려 했다.
허나 몸이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 는다.
“혼돈의 힘으로 혈도를 점해뒀으 니 아무리 너라고 할지라도 한동안 은 풀어낼 수 없을 거다.”
서준을 만류하고 싶었지만, 입술 조차 움직여지지 않았다.
“……II’’
“상처를 치료할 겸 휴식을 취하 고 있어라.”
느긋한 걸음으로, 장삼봉의 옆을 지나친 서준이 거대한 철문에 손을
얹었다.
[돌아가라! 마지막 기회다! 그 문 을 넘어선다면 더 이상은 돌이킬 수……!]
‘되지도 않는 허세 부리지 말라 고.’
피식, 미소를 흘린 서준이 거대 한 철문 위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 고, 밀어낸다.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묵직한 감 각과 함께 문이 열린다.
끼익....
일대를 뒤덮고 있던 결계가 사라 지며, 환한 빛이 쏟아져 내린다.
그 틈새로 비추는 광경을 확인한서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어떻게 된 거냐?”
찢어진 누더기 옷, 그 너머에 치 명상을 입은 옥황이 창백한 안색이 되어 쓰러져 있었다.
기본적으로 옥황은 대신(大神)에 오른 존재였기에, 마음만 먹는다면 웬만한 상처는 순식간에 수복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널브러져 있는 옥황 의 몸에는 크고작은 상처가 온몸 을 뒤덮고 있었고, 출혈은 지혈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어지간히도 큰 싸움이었나 보 네.’
상태가 좋지 않을 것이라는 건 예상하고 있었지만, 두 눈으로 상 태를 보고 나니 더욱 심각했다.
“몸을 회복할 힘조차 없는 거 냐‘?”
서준은 걱정 섞인 말투로 물음을 내뱉었지만, 옥황에게서 돌아온 대 답은 전혀 생뚱맞은 말이었다.
“그렇게까지 만류했거늘……. 대 체 어째서……. 이곳에 온 것이냔 말이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