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권 11화
211화
거듭 언급하지만, 지금의 육체로 는 혼돈의 검을 다룰 수 없었다.
그러나, 다룰 필요가 없었다.
혼돈은 그 어떠한 힘보다도 포악 하고 파괴적인 힘이었다.
퍼져나간 혼돈의 힘은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이 뻗어 나가 일대를 부수기 시작했다.
“크아아악-!”
부서져 가는 세계 속에서 나라연
천의 비명이 높게 울려 퍼진다.
곧 원형의 경기장을 중심으로 펼 쳐져 있던 나라연천의 세계가 부서 진다.
대신해 펼쳐진 풍경은 복잡한 기 계장치가 펼쳐져 있는 우주선 내부.
정확하게 말하자면, 복잡한 기계 장치 곳곳이 누전되고 불꽃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중파를 넘어 크게 파손된 우주선 내부, 자연스레 서준의 시선은 경 기장의 중심, 기계장치의 핵이 존재하고 있는 원형의 균열로 향한다.
[위대한 존재의 차원 이동 장치.]
‘위대한 존재.’
신화로만 존재하는 존재가 다시 금 모습을 드러냈다.
포스 시스템을 통하여 보게 된 것이었지만, 위대한 존재가 과시하 기 위해 보여준다는 느낌이 강했다.
애초에 보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별걸 다 자랑하네.”
냉소로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는 서준과 다르게, 혼돈의 힘에 먹혀
온몸 곳곳에 크고작은 상처를 입 게 된 나라연천은 당혹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듯, 미간을 찌푸린 채로 고개 를 내젓고 있었다.
“나라연천.”
그를 응시하고 있는 서준의 눈동 자에는 더 이상 투기(廣!氣)가 보이 지 않는다.
더 이상의 싸움은 무의미했다.
“너의 세계는 나의 혼돈에 부서 졌어.”
서준은 쥐고 있던 검을 겨누며
물었다.
“이만 항복해.”
지금의 서준은 마음만 먹는다면 나라연천을 죽일 수 있었다.
그러나 굳이 죽일 필요까지는 없 었다.
적으로 만나 대적했지만, 적어도 나라연천은 소중한 사람 혹은 동료 에게 위해를 가하지는 않았다.
물론, 이따금씩 위험한 때가 몇 번 있긴 했으나 그건 모두 나라연 천의 의지라고 볼 수 없었다.
그저 부하들의 독단적인 행동일 뿐이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 람 마음은 알 수가 없는 법.’
아무리 뛰어난 왕이라도 그 속을 헤아릴 수는 없었다.
그 정도는, 서준도 충분히 참작 가능한 범주라는 것이다.
‘게다가 나라연천을 휘하로 둘 수만 있다면……. 얻을 수 있는 것 도 상당해.’
당장에 남도 차원을 리벨리온의 구성원으로 한다면, 나라연천과 같 은 구심점이 될 수 있는 지도자가 있는 것이 훨씬 편했다.
뿐만 아니라 나라연천의 강력함
또한 리벨리온의 큰 주축이 될 수 있었고, 말하는 바로 짐작해 보면 가진 정보 또한 방대할 것이었다.
‘가능하다면 복속시키는 쪽으로 생각하는 것이 훨씬 이득을 안겨 준다는 건데.’
물론, 항복 제의를 받은 나라연 천의 눈매에는 표독이 어려 있었다.
하지만 떨리는 눈동자 안에는 감 출 수 없는 고민이 어려 있었다.
바알, 악마에 대한 최소한의 의 리 때문인가?
서준은 고개를 내젓는다.
‘아니야.’
나라연천이 바알과 나누었던 대 화와 악마족을 향해 표출했던 적의 까지.
바알이 구성한 연합은 모래성과 같은 결속력을 가진 허울뿐인 연합 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하나뿐이다.
‘자존심.’
서준은 나라연천의 얼굴을 응시 한 채로 말을 내뱉는다.
“현재 리벨리온도 믿을 수 있는 연합을 필요로 하는 실정이다. 그리고 남도 차원은 우리의 전력이 되어줄 수 있는 강자들이 상당히
많지. 네가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 지 알아. 하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식민 차원이 아닌 동료로 서 대우해줄 것을 약속하지.”
“ 연합이라……
“아무리 내가 강하다 할지라도 천사와 악마 모두를 흘로 감당할 수 있는 건 아니거든.”
서준의 말에 나라연천이 고개를 주억 인다.
“……인정하지. 천사와 악마, 모 두 절대로 만만히 볼 만한 종족이 아니란 걸 말이야.”
차원의 수호자, 종족을 대표하는
지금까지 대외적으로 밝혀진 천 사와 악마들에 대한 정보는 극히 일부분에 불과할 뿐이었다.
싸워나가야 할 강적은 아직 그 수로 바다를 이루고 있다는 말이다.
나라연천은 지그시 눈을 감은 채 로 생각을 정리하는 듯했다.
이후, 그의 허탈한 웃음이 홀러 나오는 입가에 호선이 그려진다.
“아주 우아하고 화려한 투쟁이 되겠군.”
두 눈을 뜬 나라연천의 시선이 서준을 직시한다.
“자네의 호의를 받아들이겠다. 지구의 신이여.”
패배를 수긍하는 순간이었다.
[계약은 이행되었다.]
일대에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서준과 나라연천의 사이로 한 줄기 빛이 떨어져 내린다.
찌릿-
회색빛의 기운.
혼돈을 상징하는 힘이 빛과 같은 속도로 서준과 나라연천 서로에게
로 연결된다.
.....
피할 틈새도 없이 벌어진 일에서준의 눈이 휘둥그레질 때였다.
띠링-!
[계약 조건에 따라 나라연천, 남 도의 모든 권한을 양도받게 되었습 니다.]
“이게 위대한 존재의 힘?”
서준이 당황한 음성을 홀렸다.
쏘아진 빛줄기에 담겨 있던 것이 너무나도 익숙한 힘인 탓이었다.
반면 나라연천은 이런 상황을 몇 번씩 보았는지, 담담한 미소를 흘 려 보이고는 지쳤다는 듯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털석.
“ 나라연천?”
서준의 부름에 나라연천이 손을 들었다.
“잠시, 쉬게 해주었으면 하는군. 말할 것들이 지금의 몸 상태로 나 눌 수 있는 대화도 아니고 말이야.”
그 정도의 인내심이 없지도 않았다.
애초에 이미 계약이 이루어진 이 상 초조해할 것은 없다.
더군다나 어차피 지금은 처리하 고 확인해야 할 부분도, 알려야 될 사실도 많았다.
서준은 고개를 주억인다.
“일단은 그럼 여기를 빠져나가 자.”
*
승리를 쟁취해낸 서준이 가장 먼 저 취한 행동은 부상자의 치료였다.
다행히도 부상자 중 상처가 심각 한 이들은 없었다.
의식을 잃은 자가 몇몇 있긴 하 였지만, 서준이 미리 해놓은 처치 로 상처가 심하다기보다는 다소 과 로를 해 몸이 회복을 요구하는 상 황이었다.
실제로도 서연, 에우레시아, 자칼 까지 모두 곧장 자리를 털고 일어 나 수련장으로 향할 만큼 상태가
호전되었다.
대부분 벽을 넘어 새로운 경지에 들어섰으나, 아직은 온전히 자신의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무인으로서 욕심이 날 수밖에 없 는 일이었다.
비록, 벽을 넘어서지는 못했지만, 무명신의 역시 무언가 깨달음을 얻 은 것인지 곧장 자리를 털고 일어 나 대표진과 함께 연무장으로 들어 섰다.
물론, 무명신의는 의원으로 살아 왔기에 강한 무위를 갈망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대표진에게 어느 정도 라 이벌 의식을 지니고 있어 그가 서 보지 못했던 영역에 대한 갈망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표진을 제외하고도 각 종족의 간부들도 마찬가지로 실력에서 밀 리지 않기 위해 나름대로 솜씨를 갈고닦기 시작했다.
서준의 입장에서도 몹시 기쁜 일 이었기에 훈훈한 미소를 피워낼 수 있었다.
그 외의 행정적 업무와 차원 남 도와의 동맹 건은 강석호 측에서 담당하기로 했다.
공식적으로 동맹을 맺게 되었지만, 선전포고를 해왔던 차원이었기 에 불안과 반대의 의견을 내비치는 이들도 존재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서준의 보장 덕 분에 그 의견이 크게 동조받지는 못했다.
우선, 한때 세계 최강국이었던 미국의 대통령, 루이스 마셜 또한 연합의 합류에 힘을 강하게 얹었다.
현재 중국의 주석, 구존은 구태 여 말할 필요도 없이 서준의 의견 을 적극 지지했다.
불만을 표하는 이들이 적을 수밖
현 지구 최강국인 세 곳의 힘이 강력한 탓도 있었지만, 수많은 강 자가 존재하는 남도 차원이 분명히 큰 힘이 되어줄 것은 누구도 부정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강한 힘은 곧 자유를 쟁취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독립을 외쳤지만 천사와 악마의 침공에 대해서 불안에 떨어야만 했 던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실정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반대의 목소리를 내던 이 들도 찬성 측으로 의견을 돌리기
시작했다.
모든 일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잘 풀리게 된 덕에서준이 직접 나 서야 할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서준이 마 냥 빈둥거리며 시간을 버릴 사람은 아니었다.
“몸은 어느 정도 회복이 됐나?”
서준의 물음에 테이블 건너편에 앉아있는 나라연천이 고개를 주억 인다.
“신경 써준 덕분에 빠르게 쾌차 할 수 있었지. 감사를 표하마.”
“다행이네.”
진심이 담긴 미소를 흘리고 있는 서준의 모습을 확인한 나라연천이 다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를 계속하지. 궁금한 게 무엇이냐.”
서준은 말없이 나라연천을 바라 보았다.
“내가 알고 있는 정보는 네 생각 보다 많을 것이다.”
“그렇겠지.”
“하지만 모든 것을 말할 수는 없 다.”
“ 으음
다소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서준 은 어렵지 않게 이해했다.
나라연천은 본래, 악마가 만든 연합에 속한 상태였다.
서로의 말을 신뢰할 수 없었던 만큼, 속하는 과정에서 위대한 존재의 조각의 능력이 사용됐을 것이 다.
“제대로 도움이 되지 못해서 미 안하군. 설마 내가 패배를 하게 될 줄은 몰랐던 터라……
전에도 스스로가 자부했듯, 나라 연천은 승리를 장담하고 있었다.
믿음직한 친위대와 거기에 자신
이 우위에 설 수 있는 전장까지 준 비했으니 말이다.
애초에 모든 것을 내준다는 것은 한서준, 지구를 완벽하게 손에 넣 기 위한 조건일 뿐이었다.
하지만 서준과의 계약 또한 위대 한 존재의 힘으로 맺어졌기에 반드 시 이행해내야만 했다.
불행 중 다행히도 두 가지 모두 위대한 존재의 힘으로 이루어진 계 약인 탓에 자신이 어느 정도 리스 크를 감당한다면 정보 발설 정도는 가능했다.
결단을 내린 나라연천이 조심스
레 입을 연다.
“가장 핵심적인 것부터 말하지. 판데모니움은, 악마들은 내전을 벌 이고 있다. 기존의 왕인 바알을 중 심으로 이루어진 동맹과 사탄의 동 맹이 대립 중……
파지직-!
전류가 일어나는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진다.
눈이 휘둥그레진 서준은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라연천은 고통스러운 듯 온몸 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그러나 나라연천의 말은 계속해
서 이어진다.
“두 세력은 온전한 판데모니움을 지배하고 자신의 대표를 새로운 마 신(魔神)의 자리에 앉히려 하고 있 지.”
“마신?”
처음 들어보는 명칭에서준이 고 개를 갸웃거린다.
“악마들의 신(神), 종족을 대표하 는 존재이자 차원의 수호자라고 일 컬어지는 존재. 모든 우주를 파괴 할 힘을 품을 수 있는 존재다.”
콰드득-
세계가 일그러져 가며 나라연천
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려간다.
마신, 처음 듣게 된 존재에 대한 이야기에서준의 눈이 가늘어진다.
“하아……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많은 부담감을 떠안게 되는군.”
미간을 찌푸린 나라연천이 고통 이 밀려오는 가슴을 움켜잡는다.
“무리하지 마. 마신이라는 존재 가 얼마나 위험한지 자각은 했으니 까. 해결은 내가 직접 나서지.”
적대해야 하는 적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나라연천은 연합에 소속된 인물로 상당한 주 전력이었다.
앞으로 맡겨야 하는 일들이 많았
기에 궁금증 따위로 잃을 수는 없 는 인재였다.
“괜한 걱정 할 거 없다. 내 몸의 상태는 내가 가장 잘 아니까 말이 야.”
나라연천은 손을 내저으며 뒷말 을 이었다.
“무엇보다도 지금부터가 제일 중 요한 이야기다. 발설하게 된다면 한동안 정양을 해야 하겠지만 그쯤 은 나의 새 군주가 비호해주겠지?”
내뱉는 것만으로도 큰 피해를 입 게 될 가장 중요한 이야기.
서준의 눈동자에도 호기심이 일
어난다.
“약속하지.”
믿음직스러운 서준의 대답을 바 라보며 미소를 홀린 나라연천이 다 시 한번 입술을 달싹인다.
“마신의 탄생은 세계의 비밀이 자, 정해진 운명으로 나아가게 될 무수히 많은 가지 중 하나. 종말을 피하고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기 위 해서는……
파지지직-!
나라연천의 전신에서 거센 전류 가 일어난다.
눈동자가 하얗게 뒤집힐 정도로
끔찍한 고통이 계속되었지만, 이를 악문 나라연천은 계속해서 이야기 를 이어갔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