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권 8화
208화
“드디어, 무대가 완성됐군.”
나라연천의 입가에 피식- 미소가 흐른다.
“무대?”
“투쟁이라는 것은 역경에서 비로 소 빛을 발하는 것……. 대결이라 는 명목 아래 최상의 컨디션인 자 네와 내가 일대일로 마주하는 것이 야말로, 내가 원했던 싸움이다. 결 국, 난관을 헤쳐 투쟁에서 이기는
것은 나니까 말이야.”
나라연천이 손을 휘젓는다.
시체 냄새가 가득하던 무덤가가 자취를 감추고 그를 대신해 공중에 부유한 원반 경기장이 모습을 드러 낸다.
조금 특이한 점이라면 중앙에 놓 인 원반 경기장의 위로 끊임없이 폭포수가 흘러내리고 있다는 것이 었다.
내리치는 물줄기 속, 나라연천이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자네도 기대가 되지 않나? 이곳 에서 벌어질 투쟁이 얼마나 화려하
고, 아름다울지.”
자그마치, 온 힘을 다해야 하는 강자와의 싸움이다.
무인(武人)으로서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서로 갈고닦은 무(武)를 나누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었다.
“나도 기대가 되네.”
나라연천의 입가에 피던 미소에 비릿함이 어린다.
“반드시 네놈을 제물 삼아 대신 의 직위에 오르고 나를 가림막으로 이용하려는 악마 무리 모두 모조리 내 발 앞에 무릎 꿇려 주마.”
서준의 고개가 젖혀진다.
“바알과 제법 친해 보이던데, 악 마와는 동맹이 아니었나 보지?”
“각자의 사정이 있는 법이지.”
사실, 이번 싸움 자체가 이상하 다고 생각했었다.
바알이 정말 지구를 멸망시키고 싶었다면, 악마족이 직접 움직이는 것이 더 확실했을 것이다.
그런데 직접 손을 쓰지 않고 외 부의 힘을 빌리고 있었다.
그 이유가 대관절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 답답하던 차였다.
“승자는 모든 것을 가지는 법이 지, 자세한 이야기를 알고 싶다 면……. 나를 이겨서 쟁취해 나가 라.”
“들을 이야기가 아주 많으니까, 각오해야 할 거야.”
“그 자신감, 상당히 마음에 든다 만, 이 전장은 내게 유리하다는 것 은 알고 하는 말이겠지?”
같은 상격에 이르러 있는 투신이 었지만, 지금의 전장은 나라연천의 전용 무대나 다름이 없을 것이다.
나라연천이 상당한 이점을 쥐고 있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서준은 조금도 위축되는 기세가 보이지 않았다.
‘상격도, 다 같은 상격이 아니란 말이지.’
서준은 천 년간을 쉬지 않고 악 전고투하며 쌓아온 경험과 지식이 있었다.
고작 이런 지형의 불리함 하나에 밀릴 이유는 없다는 말이다.
“조잘조잘 말이 많은데, 입으로 싸울 거 아니잖아?”
“확실히, 오랜만에 적수를 만난 나머지 내가 너무 흥분했군.”
나라연천의 눈가와 입가가 휘어 진다.
“이제 시작하도록 하지.”
미소를 보인 나라연천이 천천히 손을 들어올린다.
내리치는 폭포에서 떨어져 내리 고는 원반의 경기장에 파인 홈을 타고 흐르던, 일대의 물줄기들이 파지직- 스파크를 토해내기 시작했 다.
서준의 눈이 가늘어진다.
“ 번개?”
서준의 물음에 나라연천은 대답
대신 들어 올린 손을 꽈악- 말아 쥔다.
콰쾅-!
그 순간, 귀가 멎을 것 같은 소 리와 함께 거대한 벼락이 떨어져 내린다.
‘이래서 물이 사방에 있는 경기 장을 고른 거였네.’
서준은 담담한 시선으로 머리 위 로 내리치는 벼락을 바라보았다.
이미 선인과의 싸움에서 자주 보 았던 술법이다.
속도가 빠르긴 했지만, 그리 위 협적이지는 않았다.
지잉-
팔을 내뻗어 의념강기의 장막을 펼쳐내는 것만으로도 솟구치던 벼 락들이 가로막혀 상쇄된다.
눈부신 뇌전의 너머에서 나라연 천의 음성이 들려왔다.
“방심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공격이 완전히 수포로 돌아간 것 은 아니었다.
서준의 눈이 가늘어졌다.
공기 중으로 흩어지던 뇌전들이, 일대의 물을 머금으며 더욱더 위협 적인 전격을 쏘아낸다.
콰광-!
아무리 막아내도 끝이 없는 공 격.
끊임없이 다시 일어나는 뇌전이 계속해서 방어막을 강타한다.
‘귀찮은 공격이네.’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순간, 뇌 전 속을 누비던 나라연천의 활짝-펼쳐진 손바닥이 서준을 향해 뻗어 진다.
그 순간 서준의 앞으로 거대한 파도가 날아온다.
단순한 파도가 아니다.
의념강기로 빚어진 전격이 실려 있었다.
놀란 서준이 재빠르게 몸을 허공 으로 날렸다.
이에 기다렸다는 듯, 나라연천이 팔을 내뻗으며 서준을 향하여 뇌전 들을 쏘아낸다.
지직, 파지직-!
번개의 성질을 생각한다면, 한 번이라도 적중하면 뒤이은 연격을 피할 수 없을 터다.
칭호의 효과, 투신의 능력이 빠 르게 발동된다.
폭발하는 힘에 맞춰 서준의 의식 이 가속된다.
쏟아지는 물을 이용하여 어디로 든지 뻗어내고, 끊임없이 증폭시킬 수 있는 뇌전의 공격.
어째서 나라연천이 그리 자신감 을 내비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제법이네.’
서준의 눈이 반짝인다.
“천존마선, 업화(業火).”
불꽃을 피워낸 의념강기가, 원반 의 경기장을 뒤덮어낸다.
화륵…….
일대에 퍼져있던 물줄기들마저 단숨에 증발시키고, 뇌전을 몰아낸 서준이 웃음을 보였다.
“우레를 자유자재로 다룬다니 특 이한 능력이네.”
나라연천의 여유로운 웃음소리가 들린다.
“이 정도면 제법 쓸 만한 능력 아닌가?”
“그럼, 상당히 쓸 만하지.”
사실은, 개별적인 공격 하나하나 는 그리 위협적이라고 생각하지 않 았다.
아니, 애초에 가진 힘을 능력을 모두 개방하여 극초음속의 영역에 들어선다면, 뇌전조차 쫓아오지 못 할 것이었다.
하지만 이후의 싸움은.
아직 나라연천과 직접 공방을 나 눈 것도 아니었다.
뇌전을 마음껏 다뤄내는 이 능력 이 놀랍긴 하였지만, 단순히 이것 이 나라연천의 전력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생각이 깊은 것은 좋다만, 물줄 기는 계속 내리치는데 그리 놀고 있어도 되겠나?”
내리치는 물줄기 뒤편에 숨어있 던 나라연천이 비릿한 미소를 흘리 며, 손짓한다.
그를 바라보는 서준의 입가로 서 늘한 미소가 흘렀다.
“아쉽지만, 시기가 좋지 못했다.”
서준은 나라연천의 능력을 굉장 히 높게 평가했다.
실제로도 나라연천이 파놓은 함 정이라 볼 수 있는 지금과 같은 지 형이 더해져 상당히 힘든 싸움이 될 것이었다.
절영호로병, 천마의 보구를 되찾 기 전이라면, 말이다.
“흡수해라.”
서준의 부름에 응답한 호리병은 허리춤의 영역을 벗어나 허공으로 떠오른다.
쉬오오…….
절영호로병은 눈앞에 있던 폭포 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폭포를 흡수한다고!?”
놀란 나라연천의 음성이 떨려 온 다.
가상공간에 만들어진 폭포였기에 그 물줄기의 한도는 무한에 가까웠 다.
그런데 이 자그마한 호리병 하나 가 그 무한에 가까운 물줄기를 끊 임없이 홉수하고 있었다.
“내 친구가 먹성이 좀 좋거든.”
반대편에서 있던 서준이 나라연 천을 노려보았다.
“이제부터는 좀 제대로 된 싸움 을 할수 있겠네.”
대리석 바닥으로 만들어진 전장 위, 서로를 마주하게 된 두 사람의 사이로 팽팽한 신경전이 이어진다.
“상서로운 보구를 가지고 있던 것은 예상외긴 하나, 결과는 변하 지 않을 것이다.”
여유로운 미소를 흘린 나라연천 은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쩌적-!
공간이 갈라지며 마치 한 자루의 검이 튀어나왔다.
“그게 네가 다루는 무기냐?”
“내가 가진 전력을 발휘할 수 있 는 무기이지.”
“기대하게 만드는 말이네.”
허세 따위가 아니었다.
나라연천의 눈동자에는 불굴의 투지가 어려 있었다.
가진 패를 아낄 만한 상대가 아
니었다.
띠링-!
[훤일(暗日)의 낮 귀걸이를 착용 한 ‘분신’으로부터 능력치를 흡수합 니다.]
[정복자의 진가, 가이사의 광폭, 가이사의 지도 능력이 발동됩니다.]
서준과 나라연천, 둘 다 준비를 끝낸 것인지 기다렸다는 듯이 서로 를 향해 돌진한다.
탁탁탁-!
둘이 함께 전력을 다하여 마주한 채 달려가는 것만으로 세상이 찢어 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온다.
그렇게 거리를 좁히며 나라연천 이 검을 휘두르는 순간, 서준의 눈 매가 가늘어진다.
‘ 빠르다.’
가진 전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 거짓이 아닌지, 나라연천은 초음속의 영역에 도달한 속도였다.
검을 휘두르는 동작 또한 아주 훌륭했다.
이 공격을 정면에서 받아내기에 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고된 수련을 해서일까?
자신감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넘치기 시작했다.
‘받을 수 있어.’
실시간으로 무공에 자연스럽게 혼돈의 힘이 깃든다.
혼천마공으로 일점에 집중된 혼 돈의 힘이 나라연천의 검과 맞부딪 힌다.
콰앙-!
폭발 후에 세상이 부서질 듯 일 그러졌다가, 다시금 제자리를 찾는 다.
서준은 눈을 가늘게 떴다.
‘사라졌어?’
분명 나라연천이 검을 든 채로 뛰어왔는데, 그의 신형이 보이지 않는다.
‘ 이기어검?’
아니, 평범한 이기어검은 이렇게 강력한 의지나 힘을 품어 낼 수 없 었다.
의문이 일어났지만, 생각을 이어 갈 수는 없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방식이 아니 야.’
계속해서 공격을 감행해오는 검 을 주먹으로 쳐내고 있는, 서준의 시선이 빠르게 움직인다.
어느덧 나라연천은 신형을 허공 에 뜨게 한 채로 기운을 끌어 올리 고 있었다.
본능이 소리친다.
‘위험하다.’
반대편 손, 두 번째 혼천마공을 펼쳐 낸 서준이 쇄도해오는 검을 쳐내었다.
이후, 허공에 몸을 띄운 채로 기 운을 끌어 올리고 있는 나라연천에 게 혼천마공을 가격한다.
그러나 뻗은 손은 허망하게 허공 을 가격하고 말았다.
“이런 공격으로는 나에게 닿을 수 없다.”
조소 섞인 나라연천의 말이 들렸 다.
마치 신기루처럼 흩어진 나라연 천이 저 멀리, 검의 옆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뭐지?’
서준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어떠한 기운의 이동도 느끼지 못 했다.
심지어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모습이 사라지고 엉뚱한 곳에 나타난다.
‘ 어떻게?’
고민하는 서준을 향해 나라연천 이 다시 한 번 쇄도했다.
직선의 정직한 공격이었지만, 문 제는 그 수가 하나가 아니라 수십 이 되어있다는 것이었다.
서준은 사방에서 달려들고 있는 나라연천 한 명, 한 명을 직시하고 확인한다.
이후, 손에 응집시켜놓은 혼천마 공을 앞으로 쏘아낸다.
쥭-!
돌발적이고 빠른 공격이 나라연 천의 미간을 꿰뚫는다.
서준의 눈매가 가늘어진다.
또다시 나라연천이 사라진 탓이 었다.
“닿을 수 없다고 하지 않았는 가.”
비릿한 미소를 흘리는 나라연천 은 머리 위, 더 높은 곳에서 있었
다.
‘검이 함께 이동했다.’
계속해서 검을 따라 위치가 바뀌 고 있었다.
“넌 영원히 내게 닿을 수 없다.”
다시금, 또 다른 나라연천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달려든다.
서준은 양손에 또다시 혼천마공 을 응집시킨다.
우웅- 쾅!
시전한 혼천마공이 쇄도하던 나 라연천 무리와 맞부딪힌다.
서준은 허공에서 검을 쥐고 있는
나라연천을 응시했다.
‘ 이상해.’
분명 넘치는 기운이 또 다른 나 라연천, 분신체의 형상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운의 발원지가 나라연 천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분명히 아니었다.
주변에서 기운이 홀러나오고 있 는 듯하지만, 전부 나라연천의 몸 에서 흘러나오지는 않고 있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져 가던 서준은 황급히 고개를 내젓는다.
‘이렇게 고민한다고 해결될 문제
가 아니지.’
답을 도출하려고 해봤자, 지금은 가진 정보가 너무나 부족했다.
정보를 얻기 위해서라도 지금은 부딪쳐봐야 할 때였다.
서준은 재빠르게 발을 놀려 혼천마공을 크게 발동해 나라연천의 분 신체들과 맞부딪혔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