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권 6화
206화
나라연천의 물음에서준은 쉽게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본 능적이면서도 날카로운 감각이 소 리를 내지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칼이 출전하면……. 반드시 죽 는다.’
전장, 시체들 위에 선 자칼을 응 시하고 있는 칼리드나의 눈동자에 진한 살의와 탐욕이 어려 있었다.
“무엇을 고민하는가? 신하 된 도 리로 자기 왕이 위험에 빠지는 것 을 바라보고 있기만 할 것인가?”
고민을 이어가는 서준의 미간이 깊게 파인다.
‘어쩔 수 없나?’
이성적으로 아주 냉정하게 판단 하면 자칼을 내세우는 것이 옳은 판단이었다.
마지막으로 출전할 나라연천이 얼마나 강한 힘, 능력을 지니고 있 는지 모르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힘의 격차가 확실해 죽 는 것을 전제로 깔고 가는 전장으
로 자칼을 몰아세울 수 없었다.
‘결국은, 나라연천이 준비한 무대 위에서 놀아날 수밖에 없단 말인 가.’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피워 낸 서준이 천천히 발걸음을 앞으로 내 디딜 때였다.
스윽“
앞길을 막아선 자칼이, 고개를 조아린다.
“자칼?”
갑작스런 자칼의 행동에서준의 고개가 젖혀지려는 순간, 자칼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부디 앞길을 막는 무례를 용서 하여 주십시오.”
“내가 그런 거 따지는 성격은 아 닌 거 알잖아.”
애초에 극진한 예우를 바란 적은 없다.
그저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앞길 을 막아설 만한 이유는 하나뿐이었 기에 당황했던 것이다.
“……꼭 나서야겠어?”
질문을 한서준의 눈매가 가늘어 진다.
“출전을 허락해주시기만 한다면.”
“지금 네가 하는 행동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고는 있는 거야?”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압니 다. 하지만, 승리를 거머쥘 자신이 있습니다.”
우렁찬 자칼의 목소리에는 정말 로 자신감이 넘치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감으로 해결될 만한 일이 아니었다.
“다시 생각해. 사지로 가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서슬 퍼런 경고에도 자칼의 의지 는 견고했다.
“모두가 의미 있는 성장을 했듯 이 저 또한 크게 성장했습니다. 단 언컨대 왕의 친위대 중 저는 그 누 구보다도 강하다고 자부합니다.”
“뭐라고?”
의문이 흘러나왔다.
물론, 자칼이 과거, 가장 선두에서 있는 강자인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서연은 물론, 정령왕과 계약을 해낸 에우레시아의 성장의 폭은 그를 최강이라고 함부로 단언 할 수 없게 만들었다.
“부디 믿어 주십시오. 저 또한 수인의 왕, 헛된 죽음으로 은혜를
원수로 갚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아 시지 않습니까.”
억지로 생각하기를 그만뒀던 고 민이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확실히, 아무 대책 없이 출전을 바랄 리가 없었다.
애초에 죽음이 확정된 사지로 나 서고 싶은 자가 있을까?
‘여태 자칼은 현명한 모습을 보 여줬어. 그럴 바보가 아니야.’
단순히 스스로를 과신해 이런 말 을 함부로 내뱉을 만한 자가 아니 라는 말이다.
“시신(屍神), 칼리드나는 저의 성
장을 위한 디딤돌이 될 것입니다.”
긴장감에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있었지만, 위축되어 있거나 겁을 집어먹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자칼의 두 눈동자와 내뱉 는 말에는 진한 자신감이 어려 있었다.
“오만하군.”
칼리드나가 코웃음을 친다.
그는 신격, 시신의 자리에 이르 러 있는 존재였다.
심지어 전장마저도 그에게 유리 하게 조성되어 있었다.
고작 반신 따위에게 패배를 생각 할 리가 없었다.
“부디 출전을 허락해주십시오.”
담담한 음성을 내뱉은 자칼에게 서 날이 서린 투기를 머금은, 황금 빛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여태껏 자칼에게서 보았던 기운 들과는 엄연히 다르다.
강력한 의지.
칼리드나보다 더 강력하면서도 확고한 의지가 일대에 피어나며 자 칼을 떠받들고 있었다.
“자칼 너 설마......?”
서준이 깜짝 놀란 목소리를 흘렸 다.
“네놈?!”
나라연천 역시 눈을 휘둥그레 뜨 고 있었다.
자칼을 비웃던 칼리드나는 긴장 했는지 곧장 기세를 일으킨다.
어느덧, 서준의 입가에는 환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괜한 걱정일 뿐이었네, 자칼 너 에게 칼리드나를 맡기겠다.”
“반드시 승리를 거머쥐어 믿음에 보답하겠습니다.”
고개를 조아리는 것으로 서준을 향해 인사를 끝마친 자칼은 천천히, 느긋한 걸음으로 전장으로 향한다.
마침내, 전장 위에 도달한 자칼 은 숨을 깊게 내쉬었다.
“ 후우......
죽음의 문턱을 몇 번씩이나 마주 할 정도로 고된 수련을 했다.
신하로서 함께하기로 했지만, 서준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현실이 자칼을 몇 번이고 좌절하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맡은 일을 해낼 수 있다면 은혜 를 갚고 함께 나아갈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자칼은 그런 스스로가 얼마나 어 리석은지 깨달았다.
왕으로 섬기기로 다짐한 인물인 한서준은 그런 안일한 마음으로 쫓 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현재에 만족해 정체되어서는 옆 에서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물론, 단순히 옆에서는 것으로 도 만족할 수 없었다.
본래 수인족은 끊임없이 진화를 노리고 무(武)를 갈고닦아온 종족
이었다.
친위대 중 그 누구보다도 가장 강하고, 큰 힘이 되어 일족 전체를 구원해준 그 은혜를 갚고 싶었다.
꽃봉오리는, 진실 된 스스로를 마주하게 되어 강력한 의지를 불어 넣는 순간 완전히 피어올랐다.
지잉-
머리 위로 솟은 두 개의 뿔이 길 어지기 시작한다.
평범했던 육신 역시 거대해져간 다.
폭발하듯이 흘러나온 기운들이 자칼을 감싼다.
그 거대한 기운은, 칼리드나마저 경악하게 할 정도였다.
“네, 네놈……. 설마 신격에 도달 해 있던 것이냐?”
놀란 칼리드나가 황급히 손을 내 저으며 의념강기를 쏘아낸다.
쾅-!
폭음과 함께 일대가 뒤흔들린다.
신격이 쏘아낸 의념강기를 가볍 게 한 손으로 막아 세운 자칼의 입 가로 비릿한 미소가 흐른다.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하겠나?”
꽈악-!
시신, 신격에 오른 칼리드나가 쏘아낸 기운을 부여잡은 자칼이 힘 을 주자 의념강기가 가루가 되어 흩어진다.
“이건 너무 예상외의 상황이군.”
전장을 주시하고 있던 나라연천 이 미간이 찌푸려진다.
이제야 자칼의 성장을 느끼고 있 는 듯했다.
반신에 불과했던 자칼의 주변에 의념기로 빚어낸 강기, 의념강기가 둘러져 있었다.
끼기 긱...
천지를 뒤흔드는 듯한 기운이 사 방으로 퍼져나가며, 세상이 어그러 지는 소리가 난다.
서준은 이러한 현상을 누구보다 도 잘 알고 있었다.
‘신격에 올랐을 줄이야.’
처음부터 신격에 도달해 있던 것 은 아니었다.
당장 나라연천의 우주선에 당도 했을 때만 해도 반신에 머물러 있 던 것은 틀림없었다.
다소 당황스럽긴 하였지만, 불가 능한 일은 아니었다.
‘연이은 전투를 보면서 깨달음을 얻고 심득(心得)으로 스스로만의 신화를 써내었겠지.’
대단한 신화는 아니었지만, 애초 에 하급 신격에 그렇게 대단한 계 기까지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지금 중요한 것은 과 정이나 방식이 아니다.
‘자칼은, 이제 신격에 오른 존재 가 되었다.’
칼리드나와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머쥘 승산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신격의 등장.
공격이 막힌 것은 다소 당황스럽 긴 하였지만, 두려워할 것은 없었다.
칼리드나, 자신은 애초에 직접적 인 전투에 특화된 신격이 아니었다.
“……무덤의 주인은 시체, 그리고 이 몸은 모든 시체의 주인이다.”
칼리드나가 손을 들어 올리자,
무덤이 들썩이기 시작한다.
우오오…….
“망자(亡者)로 이루어진 군대인 가?”
자칼은 담담한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본다.
수는 많지만 결국 조무래기들에 불과할 뿐이었다.
쾅-!
단순히 발을 구르며 충격파를 발 산하는 것만으로도 무수히 많은 망 자가 가루조차 남기지 못하고 흩어 진다.
하지만 전부가 한순간에 죽음을 맞이한 것은 아니었다.
자칼의 눈이 가늘어진다.
“어떻게?!”
고작 기운을 방출한 것이었지만, 기본적으로 의념강기로 이루어졌기 에 그 기운은 매우 날카로웠다.
자아조차 가지지 못한 망자들은 단숨에 소멸시킬 힘이란 말이다.
그런데, 충격파를 정면에서 맞고 도 꿈쩍도 하지 않는 존재들이 제 법 존재했다.
심지어 몇몇은 공격을 피해낸 것
도 모자라, 교묘한 시야의 사각을 이용해가며 자칼에게 달려들기까지 했다.
서걱-!
거대한 대검이 바닥에 내리꽂히 는 모습에 자칼의 눈이 휘둥그레진 다.
‘이게 무슨.’
반격을 당한 것만으로도 놀랄 만 한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자칼을 놀라게 한 것 은, 달려든 이의 둥 뒤에 솟아나 있는 백색의 날개였다.
‘ 천사?’
성향은 비록 선하다고 볼 수 없 으나, 기본적으로 다뤄내는 힘의 기반이 신성(神聖)인 존재였다.
육신 자체가 사령술의 기반이 되 는 저주, 마기(魔氣)에 대한 저항을 가진 존재란 말이다.
그 천사의 육신을 가진 망자가 자칼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이지?’
자칼의 미간이 깊게 파이는 순간 이었다.
“딴생각할 여유도 있나 보군.”
머리 위에서 칼리드나의 음성이
들려온다.
칼리드나가 높게 뜬 달을 덮은 채로, 자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자칼의 앞으로 거대한 화염의 파도가 덮쳐온다.
단순한 화염이 아니었다.
‘의념강기!’
놀란 자칼이 재빠르게 몸을 허공 으로 날린다.
기다렸다는 듯, 날개를 활짝 펼 친 천사가 자칼을 향해 검격을 뻗 어낸다.
문제는 그 검격조차도 의념강기
의 힘이 실려 있다는 것이었다.
스릉-!
쏟아지는 공격 모두 신격을 증명 하기라도 하듯 의념강기로 빚어져 있었다.
“어느 정도 예상이 되는군.”
자칼의 눈이 반짝인다.
“용조격.”
휘두르고 있는 주먹에 둘러진 의 념강기가, 거대하면서도 거친 용의 앞발이 되어 사방을 찢어 버린다.
쌔액-!
쇄도하던 공격들은 말할 것도 없
었고, 검격을 뻗어오던 천사의 육 신까지 단숨에 찢어버린 자칼이 웃 음을 보인다.
“기이한 권능이로군.”
“이걸 알아차리다니 눈치가 제법 빠른데.”
칼리드나의 입가에 여유로운 미 소가 흐른다.
그는 시신이라는 신격에 오르기 전까지, 무수히 많은 시체를 다뤄 냈었다.
시신의 격에 오른 이후로도 수많 은 시체를 연구해왔다.
이러한 광적인 집착과 연구는 칼
리드나에게 어떠한 존재라 할지라 도 시신으로 만들 수 있고, 다뤄낼 수 있는 ‘마리오네트’라는 권능을 내려주었다.
그렇기에 칼리드나는 패배를 생 각하지 않았다.
실제로 자칼의 주변으로 또 다른 신격의 기운을 가진 이들이 늘어나 고 있었다.
“이 많은 수를 감당해낼 수 있겠 느냐?”
시체들 뒤에서 있는, 칼리드나 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흘렀다.
괜히 서준이 출전을 만류했던 것
이 아니었다.
적의 수는 많고, 심지어 모두 신 격에 오른 존재들이었다.
“이건……. 승산이 없다고 볼 수 밖에 없었겠군. 불과 몇 시간 전까 지만 해도 말이야.”
하지만, 대전쟁, 다수를 상대하는 데 특화된 전신(戰神)의 경지에 이 른 지금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어느덧, 망자의 군대를 마주하고 있는 자칼의 입가로 서늘한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