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권 2화
202화
중원 제일의 의원은 누가 뭐라 해도 무명신의였다.
과거, 무림 전체를 적으로 돌린 채 싸워왔던 천마신교를 계속 싸울 수 있게 지탱해주었던 존재였기에서준은 이런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독에 대해서는 타의 추종 을 불허하지.’
당가(唐家)와의 싸움을 지켜봤기
에 알 수 있었다.
지금처럼 독을 해석하고 파훼하 는 일은 숨을 쉬듯이 너무나도 당 연한 일이라는 것이었다.
‘만독지체 (萬毒之體).’
일정 수준에 오른 존재의 입장에 선, 어떻게 보면 사실 흔한 능력이 었다.
하지만, 반신의 영역에 도달하는 순간에 흡수해낸 독들까지 더해지 게 되니 그 격(格)도 달라진 것이 다.
‘저런 독공으로는 무명신의는 절 대 쓰러지지 않아.’
단전과 함께 자리 잡은 수백, 수 천에 달하는 독은 어떠한 조합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홈수하고 파훼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쿠라마가 보유한 독으로는 무명 신의의 육신을 중독시킬 수 없었다.
“이건 이미 승자가 정해진 것 같 군요.”
함께 전장을 누볐던 에우레시아 와 자칼 또한 이 상황을 눈치챘다.
이번 싸움에서 무명신의는 절대 패배하지 않을 것이다.
독을 흡수하고 해독하는 육신, 수준급의 반신 무리와 견주어도 손
색이 없을 정도로 갈고닦아 놓은 무(武)의 경지까지.
무명신의가 승리를 거머쥐는 것 은 당연한 일이었다.
‘굳이 괜한 걱정을 할 필요는 없 지.’
서준은 확신했다.
쿠라마가 몸을 숨긴 채로 끊임없 이 독을 흩뿌려댔다.
그러나 애석할 정도로 무명신의 는 중독되는 기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무력 또한 수준급의 강자였기에 함부로 덤빌 수도 없었다.
쌔액-!
매서운 속도로 뒤를 쫓아가는 무 명신의의 발걸음에 쿠라마의 숨통 이 빠르게 막혔다.
숲을 뛰어다니고 있는 쿠라마의 안색은 점점 더 창백해져 간다.
‘내 독이……. 단 하나도 통하지 않는단 말인가.’
계속되는 공방.
그동안 쿠라마는 수백 가지에 달 하는 독을 조합해 무명신의를 중독 시키려 했었다.
물론, 독만큼은 자신 있는 분야 였기에, 어느 순간은 무명신의의 피부 일부분이 녹아내리거나, 검게 죽어 가는 듯해 보였다.
그러나 딱 그뿐이었다.
얼마 가지 않아 독을 해석하고 마침내 해독해내며 본래의 신체를 되찾아 가는 것이다.
‘독을 체내에 직접 주입할 수만 있다면……
사실상 쿠라마가 생각한 마지막 수였다.
지금처럼 방심하고 있는 무명신 의와의 거리를 좁혀 몸 안에 직접 독을 투입해 중독시킨다.
방법 자체는 훌륭하다고 생각했 다.
거리를 좁히려는 순간, 기다렸다 는 듯이 쏟아지는 암기들에 벌집이 될 뻔한 위기를 맞이하기 직전까지 는 말이다.
‘틀렸어. 무력의 차이가 너무 심 해.’
무명신의는 주변으로 넓은 범위
의 억지력을 펼치고 있었다.
의원이라는 작자가 이렇게 무를 갈고닦았다는 것이 반칙이라는 생 각이 들었다.
그것도 반신에게 뒤처지지 않을 정도라니 너무한 일이었다.
심지어 암기들 한 자루, 한 자루 에 강력한 의지가 실려 있었다.
방심하고 있다고 해서 함부로 거 리를 좁혀내는 것은 무리였다.
‘놈의 움직임을 묶어 내려면
마지막 방법을 떠올린 쿠라마의 얼굴에 그늘이 진다.
‘살을 주고 뼈를 취하는 수밖에 없겠는데.’
쿠라마 또한 반신에 오른 존재.
기본적인 육체 능력 자체는 준수 한 수준이었다.
물론, 무(武)를 갈고닦아 온 반신 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달리 말하자면, 무를 갈고닦아 온 무명신의에 비교하자면 한참이 나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살을 주려다가 뼈, 아니 목숨 자체를 내놓아야 할 수도 있었다.
생각을 이어갈수록 인정할 수밖 에 없었다.
‘이 싸움은 이길 방법이 없군.’
쿠라마는 재빠르게 발을 놀려, 아무것도 없는 초원에 모습을 드러 냈다.
이후, 매섭게 달려드는 무명신의 를 보며 양손을 들어올린다.
“나의 패배를 인정하지.”
승자는 정해졌다.
허나, 이를 받아들이고 말고는 무명신의의 마음이다.
이 싸움은 단순한 대련이 아닌,
사활이 걸린 전쟁이기 때문이었다.
차가워진 눈빛을 한 무명신의가 품 안에서 암기들을 쏟아내려는 순 간이었다.
“그만.”
서준의 목소리가 일대에 퍼져나 간다.
분명, 읊조리는 것과 같은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일대의 모두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존재감이 실려 있었다.
“서로 한 번씩 주고받은 것으로 하지.”
베풀어준 은혜를 잊는 것은 금수
만도 못한 짓이었다.
어쩌면, 지금 생을 마감했을지도 모르는 서연이가 바라하의 자비 덕 에 목숨을 건지고 더불어 큰 성장 까지 이뤘던 것은 사실 빚을 하나 진 것과도 같았다.
서준의 말에 무명신의가 황급히 동작을 멈추며 고개를 조아린다.
“천마신교 만만세, 교주님의 명 을 받들겠습니다.”
소강상태에 이른 전장을 바라보 던 나라연천이 입을 열었다.
“우리의 패배를 인정한다. 쿠라 마, 수고가 많았다.”
쿠라마가 고개를 숙이며 아랫입 술을 질끈- 깨물었다.
“왕이시여, 죄송합니다.”
패배를 인정하고 도주한 것에 있 어서 부끄러움은 없었다.
애초에 쿠라마는 전사가 아닌 암 살자였다.
그리고 암살자의 전쟁은 정정당 당한 승부만이 능사가 아니었다.
스스로의 능력을 확실히 가늠하 고 강자와의 싸움에서 도망치고 고 개를 숙여 훗날을 기약할 줄도 알 아야 했다.
하지만, 섬기고 있는 왕의 기대 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없 는 것은 아니었다.
“작은 해프닝일 뿐이다. 염려치 말도록.”
다행히도 나라연천은 크게 개의 치 않아 했다.
1무 1승.
누가 보더라도 유리한 상황이라 말할 수 있었다.
‘무명신의는 아직 더 싸울 수 있 는 상태야.’
이 전쟁은 선승제의 룰로 승패가 결정되는 대련이 아니었다.
어느 한쪽이 완전히 쓰러지고 포 기할 때까지 계속 싸워 나가야 하 는, 최후의 1인이 남는 전쟁이었다.
무명신의가 활약을 해주면 해줄 수록 승기가 높아진다.
그렇지만, 반드시 신경 써야 할 부분이 한 가지 존재했다.
‘만약 무명신의가 패배하게 된다 면?’
서로 죽일 수 있는 목숨을 살려 주는 것으로 빚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앞으로도 이러한 배려가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는 장담할 수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무명신의가 죽음 을 맞이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다음 싸움을 위해 전장을 바꿔 야 하니 잠시 물러나 주었으면 하 는군.”
서준의 고민이 이어지고 있던 사 이, 무명신의를 물린 나라연천이
을 내젓는다.
“이게 전장이라고?”
변화한 전장을 확인한서준의 입 에서 헛웃음이 홀러나온다.
다시 펼쳐진 전장에서 안정적으로 서 있을 수 있는 공간이라고는 길게 뻗어있는 돌기둥 하나뿐이었다.
뿐만 아니라, 주변에는 반신급에 이른 강자가 아닌 이상, 서 있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로 매서운 바람 들이 눈보라와 함께 몰아치고 있었다.
암기를 쏘아내는 무명신의의 입
장에서는 결코 좋은 전장은 아니라 말할 수 있었다.
‘근접전도 힘들겠어.’
심지어 바닥, 나락에서 몰아치는 바람들은 놀랍게도 의념기로 빚어 낸 돌풍 못지않은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웬만한 의념기를 두른 반신이라 할지라도 갈가리 찢어낼 수 있을 터였다.
접근 도중 적의 방해 혹은 실수 로 인하여 절벽에 떨어지게 되면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될 것이었다.
무명신의가 싸움을 이어나가기에
는 분명 무리가 있는 전장이었다.
“ 으음......
전장을 바라보고 있는 무명신의 의 입에서도 곤란한 듯 탄식이 흘 러나오고 있었다.
얼굴에는 난처함이 가득한 모습 이다.
“답지 않게, 치졸한 수를 쓰고 있네.”
피식- 미소를 흘린 나라연천이 입을 연다.
“투쟁이라는 것은 결국 이기기 위한 것. 애초에 전장을 마련하겠 다는 것에 동의한 건 그쪽이니 다
른 이득을 줬으면 우리도 이 정도 이득은 정당한 것이 아닌가.”
서준이 뒷머리를 긁적인다.
부정할 수 없는 말들이었다.
아니, 무엇보다도 저 말을 부정 해낸다고 해서 나라연천이 준비해 놓은 전장을 바꿔줄 리가 없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전장에 무명 신의를 내보내는 것은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라는 건데.’
전장의 지리적 특성을 보자면, 필패의 상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 었다.
뻔한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사지 (死地)에 아끼는 수하를 내보낼 수 는 없었다.
서준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무명신의를 물리기로 했다.
‘어차피 저쪽도 둘을 잃은 상황 이다.’
바라하와 쿠라마.
2:2의 상황으로, 서로 셋이 남은 상황이다.
문제는 후드를 눌러 쓰고 있던 존재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안 된다는 것 정도였다.
‘누굴 먼저 내보내야 하지?’
갖가지 생각과 함께 고민이 꼬리 에 꼬리를 물고 있던 순간이었다.
“위대한 왕이시여, 이번 전장은 제가 나서는 것을 허락하여 주십시 오.”
에우레시아가 고개를 숙이며 의 사를 던지고 있었다.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엘프들은 기본적으로 정령을 다 룰 수 있지.’
기본적으로 원거리에서 공격을 펼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에우레시아는 엘프들의 왕이었다.
다룰 수 있는 정령의 수준이 매 우 높을 것이었다.
발이 닿는 곳에 땅을 만들어 내 거나, 바람을 다뤄내는 것으로 자 세에 제약을 받지 않고 허공을 자 유자재로 누빌 수 있었다.
지형 자체가 위험한 전장에서도 자유롭게 움직이며 제한을 받지 않 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좋아, 믿고 맡기지.”
서준이 말을 꺼내는 것을 기다렸 다는 듯이, 에우레시아는 곧장 전
장의 돌기둥 위에 섰다.
“지금이야말로 제가 나서야 하는 전장이라고 생각됩니다. 출전을 허 락해 주십시오.”
나라연천 측 진영에서도, 큰 목 제 지팡이를 든 사내가 고개를 숙 인다.
서준은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내 의 모습을 눈여겨보았다.
‘마법사……
많은 준비 시간이 필요하였지만, 조건만 갖춰진다면 강력한 화력을 낼 수 있는 존재.
때문에, 지금처럼 거리를 좁히기
힘든 전장에서는 그 상성이 최고로 좋다고 말할 수 있었다.
나라연천 또한 곧장 고개를 숙이 며 의견을 받아들였다.
“아르슈나의 빙제(氷帝), 찬드라. 자네만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을 거 라고 믿지.”
지팡이를 땅에 내려찍는 것으로 몸을 허공에 띄운 찬드라가 돌기둥 위에 선 에우레시아를 바라보며 무 심한 표정으로 말한다.
“싸움을 시작하도록 하지.”
에우레시아의 눈이 가늘어진다.
“마법, 원소를 익힌 자인가?”
느껴지는 기운이 상당한 탓에 놀 라 물은 것이었다.
“원소를 익혀? 나는 만물에 통달 한 자다.”
동시에 지팡이 위에 얼음이 뭉치 기 시작한다.
“실레스틴!.”
다급함을 느낀 에우레시아가 바 람의 정령을 소환해내는 순간이었다.
휘오-!
바람의 장막이 펼쳐지며 시야 앞 에 눈보라가 몰아친다.
‘ 빠르다.’
에우레시아가 미간을 찌푸린다.
마법사라는 이유로 공격에 준비 시간이 있을 것이라 생각해 방심한 것이었다.
만약 실레스틴이 아니었다면 이 번 일격에 승부가 갈렸을 수도 있었다.
‘어리석은……!’
스스로를 자책한 에우레시아의 주변으로 녹빛 기운들이 일어난다.
찬드라의 마법 발현 속도를 쫓아 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의 공격에 대응할 방도 가 없는 것은 아니다.
“날뛰어라, 실레스틴.”
에우레시아가 정령의 이름을 읊 조린다.
실레스틴의 바람이 솟구치고 일 대로 퍼졌다.
슉- 쩌저적...
뻗어진 바람과 빚어진 얼음들이 맞부딪치더니 춤을 추듯 사방을 난 자하기 시작했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