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권 24화
199화
고막을 찢을 듯한 큰 소리에 인 상이 절로 찌푸려지던 순간이었다.
“그래도 저 중에서 그나마 약해 보이는 상대인데, 내가 나갈까?”
서연이 앞으로 나서며 말하 자,
는을 가늘게 뜬 서준의 시선이 나
라연천을 비롯한 남은 네 명의 적
에게 향한다.
‘나라연천은 말할 것도 없고, 저
기 남아있는 이들 한 명, 한 명 모
두가 강하다.’
분명한 반신, 그것도 벽을 넘어 선 수준이라고 보아도 무방한 정도 였다.
유일하게 후드를 눌러쓴 채로, 혼잣말을 늘어놓고 있는 친위대의 경우만 제외하고 말이다.
‘느껴지는 기운 자체는 그리 강 하지 않은데.’
사실 가장 약해 보이는 인물이 바로 후드를 눌러쓴 사내였다.
굳이 서연을 출전시키고 싶다면, 그와 싸우게 하는 것이 옳은 판단 이었다.
객관적으로 판단을 내리면 현재 일행 중 최하수가 바로 서연이었으 니 말이다.
하지만 후드를 눌러쓴 사내에게 서 느껴지는 기운이 너무나도 불길 하고 꺼림칙했다.
‘서연이도 본능적으로 느낀 거겠 지.’
만약 저 후드 사내와 서연이 싸 우게 된다면, 분명히 서연 쪽이 끔 찍한 패배를 맞이할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르슈나 의 전사, 바라하를 우습게 보는 것
또한 아니었다.
‘바라하 역시 강자다.’
후드 사내는 그 힘을 아직 정확 히 가늠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바라하와 붙어도 서연은 패배할 것 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후드의 존재 를 제외한다면 나라연천의 친위대 중 그 누구도 서연보다 약한 기운 을 가진 존재는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머릿속이 복잡해져 갔지만, 고민 을 오래 이어갈 시간이 없었다.
“하하! 신하를 신뢰하지 못하는
왕이라니 우스운 꼴이 아닙니까!”
서준을 바라보며 노골적인 비웃 음을 흘리는 바라하의 도발이 이어 진다.
저런 같잖은 수에 넘어갈 수는 없었다.
서준은 평정심을 유지해가며 생 각을 다듬길 계속했다.
“오빠,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 테 니까. 믿어 줘.”
서연의 투지 어린 목소리가 귓전 을 강타한다.
고심 끝에서준이 고개를 주억였 다.
“..그래.”
솔직하게 말하자면, 느껴지는 기 운만 보자면 서연이 바라하를 이기 는 것은 힘들어 보였다.
하지만 무인의 길을 택하고, 지 구의 사활을 건 다섯의 대표 중 한 명의 자격으로 출전의 의사를 표출 한 것은 서연 본인의 선택이자 의 지였다.
다음 단계로 성장하기 위해선, 마냥 온실 속의 화초처럼 길러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위험할 것 같으면 바로 기권해야 해.”
서연은 지금 인류에 있어서 큰 전력이었다.
게다가 서준에게는 그 이전에 무 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가족 이었다.
그렇기에 하는 진심 어린 부탁이 었다.
“ 약속할게.”
환한 미소를 보인 서연은 등을 돌린다.
후웅-
직후, 땅을 박차 허공으로 날아 오르며 전장의 중앙으로 향한다.
무거운 기운을 품고 있었지만, 움직임은 그에 상극일 정도로 매우 가벼웠다.
이윽고 땅에 착지할 때도 그 어 떠한 파장도 퍼지지 않았다.
일대에 흩날리고 있는 거친 바람 들만이 그녀가 빠르게 움직였다는 사실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하필 제일 나약한 존재가 선봉 으로 나서다니, 정말 시시하기 그 지없는 싸움이 되어 버렸군.”
바라하가 입꼬리를 한쪽만 비틀 어 올리며, 등 뒤에 매고 있던 거 대한 도끼 한 자루를 손에 쥔다.
휘오-
도끼의 무게 또한 상당한 것인지 단순히 꺼내어 쥐는 것만으로 연무 장 내에 거친 바람 소리가 생겼다.
거구라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 는 몸집과 그에 비례하는 강대한 기운, 마지막으로 자신의 육신보다 더 거대한 도끼를 들고 있는 바라 하의 위협적인 모습에도 서연은 주 눅 드는 기세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바라하를 향해 이죽거린 다.
“자신감 넘친다면서 말이 참 많 네? 속으로는 겁이 좀 나나 봐?”
“헛소리하지 마라! 어차피 시시 한 승부가 될 것이 뻔한 상황에서 쓸데없이 피를 보기 전에 자비롭게 기권을 권유하는 것이지. 무엇보다
도 난 자네의 뒤에서 있는 투신에 게 큰 원망을 사고 싶지는 않거든.”
“사람 보는 눈이 영 없네. 정정 당당한 대결로 딴지 걸 사람은 아 니니까, 괜한 걱정 말고 그 잘난 실력 한번 보여 주시지!”
양다리를 어깨너비만큼 벌리고는 옆으로 몸을 비스듬하게 돌린 서연 이 왼손의 검지와 중지를 까딱까딱 - 거린다.
여유가 흘러넘치다 못해 오만을 내비치는 자세에 바라하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난 자그마치 백 년이 넘는 세월 을 전장에서 보내왔다, 그리고 이 렇게 오랜 세월간 전장에 머문 덕 에 배운 것들이 상당히 많지.”
“계속 내 걱정을 하는 걸 보니 평소에도 남 걱정을 엄청 떠안고 사는 타입인가 봐?”
“자신보다 강자에게도 주눅이 들 지 않는 자신감을 가지는 것은 훌 륭한 자세다만 상대의 힘을 가늠하 고 숙이는 것도 하나의 용기다. 지
금 네가 부리는 것은 건방진 만용 일 뿐이지. 지금이라도 자세를 다 잡고 전력으로 싸움에 임해라.”
“아, 아, 여기 누구 조언 요청했 던 사람 손?”
서연의 한쪽 입꼬리가 비틀어 올 라가는 순간이었다.
느슨하게 들고 있던 도끼를 꽈악 - 말아 쥔 바라하의 육체가 땅을 박찬다.
정말 눈 한 번 깜빡하는 순간.
그 찰나의 순간에 이미 서연의 눈앞에서 거대한 도끼를 휘두르고 있는 바라하의 신형이 보인다.
휭-!
공기를 갈라내는 듯한 소리와 함께, 서연의 신형 위로 거대한 도끼 가 내리찍힌다.
“마지막 자비를 걷어찬 것은 동 생분의 어리석음이었으니 지구의 투신께서는 부디 저를 원망하지 않 아 주셨으면 합니다.”
건너편에서 있는 서준을 향해 바라하가 입을 열던 순간이었다.
아무런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거대한 도끼에 베인 듯하였던 서연 의 신형이 신기루처럼 흩어진다.
눈이 휘둥그레진 바라하의 등 뒤
에서 서슬 퍼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만용은 대체 누가 부리고 있는 데‘?”
쌔액-!
치천마역천지공의 힘이 담겨있는 주먹이 먹이를 노리는 뱀처럼 쏘아 진다.
챙-!
주먹과 바라하의 두꺼운 피부가 부딪히며 굉음이 일었다.
무너지거나 밀려나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조금의 타격 조차 입지 않았다.
치천마역천지공이 둘린 주먹에 맞았음에도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 은 바라하의 입가에는 비릿한 미소 가 흐른다.
“이런 나약한 공격으로는 나에게 상처를 입힐 수 없다!”
후웅-!
바라하가 소리를 내지르며 거칠 게 도끼를 휘두르자 회오리 같은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한다.
무식한 공격이었지만, 그 위력은 가공할 정도였다.
‘피해야 한다.’
조금의 타격도 입지 않은 바라하 의 모습에 다소 놀람을 표하고 있 던 서연은 빠르게 뒷걸음질을 치며 기운을 응집시키며 방어막을 만들 어낸다.
지잉-
서연이 펼쳐낸 방어막과 바라하 가 빚어낸 바람이 맞부딪힌다.
쿵-!
충격을 견디지 못한 연무장의 바 닥이 박살 나고 자욱한 흙먼지가 피어난다.
“아직도 힘의 격차를 모르겠느 냐?!”
바라하는 그 사이를 자유자재로 누비며 연신 도끼를 휘둘러낸다.
홍, 후웅-!
압도적인 힘에 계속해서 연무장 이 부서지고 흙먼지가 갈수록 심해 졌다.
“크읍……
서연은 짙은 신음을 홀리며, 바 라하의 움직임을 웅시한다.
언뜻 보자면 막무가내로 휘두르 는 것에 불과해 보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잘 모르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바라하가 휘두르는 도끼와 이는 바람에는 의지가 실려 있었다.
‘기운을 단순한 공격뿐만 아니라 그에 따라 일어나는 파장에까지 전 부 싣고 있어.’
겉으로는 아주 무식한 공격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극도의 섬세 함이 묻어있는 매서운 공격이라는 것이었다.
공방이 이어질수록 바라하와의 격차가 크게 와닿기 시작한다.
쓴웃음을 지은 서연은 바라하의 움직임을 계속해서 주시했다.
바라하는 흩뿌린 바람이 자신과
거리가 멀어지는 순간, 연거푸 도 끼를 휘둘러 연격을 이어가고 있었다.
전투 경험이 많다는 것이 단순히 허세를 부리기 위해 내뱉은 말이 아니었다.
‘능력을 다뤄내는 방식도 수준급 이야……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분하지만 바라하는 나보다 강 해.’
이 공격을 막아낸다든지 피할 방 법이 없었다.
하지만 움츠러들거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다.
‘처음부터 바라하가 나보다 강하 다는 것은 알고 있었어.’
그렇기에 전투에 나선 것이다.
‘오빠가 짊어지고 있는 짐을 조 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은걸.’
누군가는 쓸모없는, 이룰 수 없 는 꿈이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가족인 서준 을 소중히 생각하는 서연이었기에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한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반드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성장해야만 했다.
결심을 되새겨낸 서연은 자세를 다잡는다.
어차피 퇴로가 존재치 않는 지금 의 상황에 있어서 서연이 걸을 수 있는 길은 단 하나뿐이었다.
‘정면에서 부딪친다.’
전력을 다해, 목숨을 건 각오로 걸음을 앞으로 내딛는다.
당연히, 서연의 발걸음은 막연한 자신감이나 기대를 품고 무작정 나 아가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 서연에게는 마지막 비책이 라 할 수 있는, 서준이 가르쳐준 무공이 존재했다.
쿠웅…….
앞으로 뛰쳐나오는 서연의 주변 으로 칠흑빛의 기운이 물씬 일어나 고 쏘아지던 바람과 맞부딪힌다.
걸음을 내디디며 전진해오는 서 연의 모습을 본 바라하가 코웃음을 친다.
“어리석군!”
쾅-!
의념기가 실린 바람과 서연의 치
천마역천지공이 부딪히며 폭음이 일어난다.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회오리바람은 계속해서 쏟아지 고, 몰아치며 서연의 전신을 단숨 에 휘감아낸다.
“히야아—!”
괴성을 내지르는 서연이 마구잡 이로 주먹을 뻗었다.
길었던 생머리가 잘려나가고, 몸 곳곳에는 크고작은 자상들이 생겨 난다.
더 이상 손을 쓸 필요도 없었다.
조만간 한서연이란 나약한 인간 은 과다출혈로 쓰러져 패배할 것이 니 말이다.
“인간이라는 종족은 너무나도 허 약하구나, 이렇게 쉽게 부서지고 망가질 줄이야……
헛웃음을 흘린 바라하가 쥐고 있 던 도끼를 땅바닥에 내려놓는 순간 이었다.
“내가!”
넝마가 된 서연이 소리를 내지른 다.
거적때기가 된 몸과는 달리 목소 리는 처음보다 더 또렷했다.
“이 자리에서 쓰러지는 한이 있 더라도!”
털썩-
이 순간에도 서연의 육신은 엉망 이 되어간다.
분명, 죽어가고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오히려 바라하는 내려놓 았던 도끼를 꽈악- 말아 쥔다.
‘온다-!!’
바라하의 목울대로 마른침이 꿀 꺽- 삼켜진다.
피투성이, 끔찍한 넝마와 같은 처참한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이
런 큰 중상을 입는다고 해서 반드 시 죽는 것은 아니었다.
“진정한 전사가 되어가고 있구 나! 바로 그것이 전사의 혼!”
바라하의 입에 흥분한 듯한 미소 가 걸리고 감탄 섞인 소리가 흘러 나온다.
나약한 육신을 가진 인간, 한서 연은 분명 죽어가고 있었다.
당장 딛고 있는 두 다리는 사시 나무처럼 흔들리고 있었고, 바로 무릎을 꿇고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 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결단코 쓰러지지 않는다.
물론, 마음만 먹는다면 계속 거 리를 벌려가며 바람을 빚어내는 것 으로 서연을 쓰러뜨릴 수 있을 것 이다.
그러나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 엄청난 투지와 신념! 실로 훌륭한 전사의 혼을 가지고 있었구 나!”
스스로의 입으로 내뱉었듯이 바 라하는 ‘전사’였다.
그리고 지금 그의 시선에 들어오 는 한서연 역시 전사다.
승리만을 추구하는 족속들이 아 니라는 것이다.
물론, 지금 바라하는 나라연천의 심복이기도 했다.
“왕이시여, 욕심을 부리려는 부 족한 전사, 바라하를 용서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바라하의 외침에 나라연천이 미 소를 띤 채로 고개를 끄덕인다.
허락은 떨어졌다.
나라연천은 내린 선택을 물리지 않는 진정한 왕의 재목이자, 누구 보다도 투쟁을 높은 가치로 여겨주 는 투신이었다.
이 싸움의 끝에 어떤 결과가 기 다리더라도, 나라연천은 전사 바라
하를 책망하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탁-
그리고 때마침 무겁게 발을 내딛 고 있던 서연의 육신이 마침내 바 라하의 앞에 당도해내었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