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권 13화
188화
형편없이 부서지는 검의 모습에 에레미아의 동공이 세게 흔들렸다.
[네놈 대체……』
단순히 다루는 기운이 거대해진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절대적인 어떤 힘을 마주한 느낌이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먹이 사슬의 정 점의 포식자를 마주한 피식자가 된 기분.
그 중압감이 머리끝까지 차올랐 다.
짓눌린다.
어깨가 무겁다 못해, 으스러지겠 다고 여긴 순간, 눈앞에 있던 서준 의 신형이 흩어졌다.
‘잡아먹힌다……
생존을 위한 본능이 몸을 움직이 게 해 날아오던 서준의 주먹과 게 이볼그가 맞부딪쳤다.
콰앙-!
딛고 있던 대지가 갈라진다.
두 갈래로 나뉜 바닥 깊숙이 내
장되어 있던 용암이 치솟아 오른다.
솟구친 용암이 지상에 떨어져 곳 곳에 거대한 불길을 만들었다.
넘실거리는 불꽃 속, 전장에 선 에레미아가 자세를 다잡는다.
[인정하지, 네놈은 내가 겨뤄 봤 던 그 어떠한 존재보다도 강하다.]
당장 상격의 신위를 노려도 이상 하지 않을 압도적 파괴를 선사하고 있었다.
허나, 아직 상격의 신위에 도달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결국, 흉내 내기에 그칠 것이다.]
숨겨놓았던 마지막 한 수를 가지 고 있던 것은 서준뿐만이 아니었다.
[내 이름은 에레미아, 백식(百式) 의 웨펀 마스터.]
동시에 에레미아의 기운 역시 폭 발할 듯 강해졌다.
서준은 온몸에 오싹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온다.’
생각이 닿는 순간 에레미아가 앞 으로 발을 내뻗는다.
“백화천변(百化千變)의 술(術).”
이어서 에레미아가 휘두른 게이
볼그가 서준을 향해 쇄도해온다.
빠르고 섬뜩하다.
그러나 쫓아가지 못할 정도는 아 니다.
‘정면.’
눈앞의 게이볼그를 향해 서준이 주먹을 내지른다.
하지만, 손끝에는 어떠한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이름처럼, 백 번 변화하고 천 번 달라지는 이치를 가진 창술이었다.
시선에 존재했지만, 시선에서 어
느덧 사라졌다.
흩어지는 허상과 같았지만, 어느 샌가 실체를 가진 공격이 된다.
궤적을 그리고 넘실거리는 붉은 창이 시선을 희롱하고 감각을 흔들 어 종국에는, 펼쳐놓은 제공권을 부숴내고, 파고든다.
파앗-!
서준의 급소에서부터 피 분수가 터져 나온다.
[끝이다.]
차가운 눈빛을 한 에레미아의 선 고가 내려진다.
그러나 서준의 눈동자는 죽음을 보고 있지 않았다.
[고유등급, 투쟁성취 (H 爭成就) 스킬이 발현됩니다.]
[굴복하지 않는 투지가 법칙을 부숴내고 시간을 되돌려 다시 싸울 수 있도록 최고의 컨디션으로 조정 합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비릿한 미소를 홀린 서준이 손을 내뻗어 에레미아의 팔뚝을 휘어잡
통째로 뜯어 발기려 하였으나, 에레미아의 육체가 인체로는 도저 히 흉내를 낼 수 없는 형태로 꺾이 기 시작한다.
최선의 수를 고를 수 없다면 차 선의 선택지로 향한다.
황급히, 의념강기를 손바닥 전체 에 둘러 광선처럼 앞으로 쏘아낸다.
콰앙-!
에레미아의 신형이 직선상에 있 던 붉게 물들어가고 있는 나무와 산들을 관통하고, 멀리 날아가 흔 적도 보이지 않게 됐다.
물론, 고작 이런 공격으로 에레 미아가 쓰러졌다고는 생각하지 않 았다.
파아앗-!
곧, 에레미아의 신형이 빛살처럼 돌아온다.
[흥미로운 권능이군. 하지만 고작 이 정도로는 판도를 바꾸지 못한다 는 건 알고 있겠지?]
곳곳에 솟아오르는 불길과 치솟 는 용암.
붕괴되어 가는 세계 속에서 둘은 서로의 빈틈을 찾기 위해 눈을 움 직이고 있었다.
‘정말 강해.’
틈이 보이지 않는다.
서준은 귀환 이후 제법 강해졌다 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눈앞의 에레미아는 그보 다 더 강했다.
‘이대로 간다면 필패다.’
분명, 아직 어느 정도 여유가 확 연히 느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뼈아픈 격차를 실감했다.
긴장으로 딱딱하게 메마른 혀끝 을 핥고 있는 서준의 모습을 보며 에레미아가 웃어 보였다.
[실로 놀랍군, 어째서 천신님과 대군주님이 인간이라는 종에 틀을 만들어 제한해 배척하려 했는지 알 것 같군.]
“무슨 소리지?”
[스스로 생각하여 벽을 넘어 신 위의 자리에 도달한 위대한 존재인 네가 정말 너희 인간이 가진 종족 값이 최하위라고 생각하지는 않겠 지?]
당연히 처음부터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서준이었고 쭉 부정해 왔 었다.
‘인간과 천사와 악마 모두 다를
게 없어.’
상위 개체 종족인 천사와 악마.
서준은 그들이 찬양하고 떠받들 며 목표로 하는 대신(大神)급의 신 위와 당당히 맞섰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어찌 인간이 나약하고 가 능성이 없는 존재라고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당장 지금의 상황만 보아라. 고작 십 년도 되지 않는 짧은 성장의 기간을 밟은 인간이 이 몸과 겨룰 수 있게 된다는 것 자체가 본질적 인 종이 가진 가능성을 품고 있다 는 것을 대변해주고 있지 않은가?]
“입을 함부로 놀려도 되겠어? 이 건 나로서도 간과할 수 없는 고급 정보 같은데.”
단순히 머리로 알고 이해하고 있 는 것과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은 엄 연히 다른 문제였다.
하물며, 그것이 이 세상의 규율 을 정립한 천사라는 종족의 상위 계급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대신에 다가서 있는 자에겐 그 격에 맞는 대우가 필요한 법!]
“내가 살아나가 이 소식을 전하 면 트리니티 연합은 끝장일 텐데, 괜찮겠어?”
[그것도 걱정할 것이 아니지. 내 혼, 신위를 걸고서라도 네놈을 여 기서 흔적조차 없게 할 것이니!]
에레미아가 쥐고 있던 게이볼그 를 떨어뜨린다.
[혹, 아는가? 비록 지금은 무신 (武神)의 이름을 달고 웨펀 마스터 라는 이명이 있지만 검을 제일 잘 다뤘다는 것을?]
“그래서.”
서준의 뾰로통한 말에도 아랑곳 하지 않은 에레미아가 제 할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적당히 놀아주는 건
끝, 이라는 얘기지. 전력을 보여주 겠다.]
에레미아는 지그시 눈을 감은 채 로, 천천히 자세를 다잡는다.
아무 무구도 쥐고 있지 않은, 무 방비 상태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체는 달랐다.
에레미아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공간이 흔들린다.
심, 기, 체 모든 것들이 어우러지 며 에레미아의 마음속에 한 자루의 무구, 검을 만들어낸다.
가라앉아 있지만 고요한 에레미 아의 눈동자가 서준을 향하며, 베
고자 하는 의지가 번뜩인다.
[유정천검 (有頂天劍).]
보이지 않고, 실존하지 않는다.
허나, 서준의 눈에는 똑똑히 보 이고 있었다.
예리한 일념이 담긴 검.
서준은 그 엄청난 무위(武威)에 어깨를 떨었다.
실체가 없어서 위협적이지 않아 야 할 검이 무섭게 느껴진다.
이윽고, 에레미아의 업(業)과 무 에 대한 념(念)이 그의 검에 담긴 다.
그가 휘두르고 있는 것은 더 이 상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무형검 (無形劍)이 아니었다.
서준은 저도 모르게 작은 목소리 로 중얼거렸다.
“심검 (心劍)
미카엘라가 사용했던 모양만 그 럴싸했던 심검이 아니었다.
의지, 마음으로써 적을 베어내는 진정한 심검의 경지가 눈앞에 펼쳐 지고 있었다.
“ 대단하네.”
피하거나, 막아낼 수는 없다.
의지가 닿는 곳을 베어내는 저 검을 무엇으로 피해내거나 막아낼 수 있단 말인가?
파훼법은 하나뿐이다.
‘부순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도리가 없었다.
지금 날아오는 저 검은 에레미아 라는 상격의 신위가 쌓아온 업과 념의 집합체이자 무인으로서 지니 고 있는 비장의 수다.
서준, 개인이 가진 힘으로 에레 미아의 저 무거운 일격을 받아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 서준은 홀로 전장에서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가이사의 지도.”
서준의 손에 장착되어 있던 정복 왕의 수투가 빛을 발산한다.
띠링-!
[가이사의 지도의 효과가 발동합 니다.]
[10명의 친위대의 스테이터스를 확인합니다.]
[사용자 ‘한서준’의 안전을 위하여 과부하 방지 차원으로 순차적인
스테이터스 상숭이 이루어집니다.]
[아인(亞人), 수인족의 자칼, 레 잉가의 스테이터스만큼 상숭합니 다.]
[모든 스테이터스(힘, 민, 체 내) 가 약 1460 증가합니다.]
아찔할 정도로 강력한 힘이 전신 에 차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돈의 힘을 제대로 다뤄낼 수 있을 것이라고는 아직 확신할 수 없었다.
‘가능할까?’
계산은 사치다.
서준은 양손을 활짝- 펼치며 주 먹을 말아 쥔다.
콰득, 콰지직-!
응집시킨 혼돈의 힘에 근육이 끊 어지고, 뼈가 비틀리는 소리가 들 려오며 양팔이 끊임없이 떨려온다.
허나, 아직도 저 무거운 검을 부 술 수 없었다.
‘조금 더.’
띵-!
[사용자가 힘에 적웅했습니다. 다
음 페이즈로 넘어갑니다.]
[엘프족, 에우레시아, 이세디아의 스테이터스만큼 상승합니다. ]
[모든 스테이터스(힘, 민, 체 내) 가 약 1829 중가합니다.]
큰 바다처럼 들어오는 능력치가 박살 난 양팔을 재생시킨다.
비단, 재생 능력뿐만이 아니었다.
높아진 스테이터스 덕에 감각이 더욱 예리해져 간다.
그 감각을 이용하여 사용자를 잡 아먹으려는 혼돈의 힘을 제어하고
조율해 내가던 서준의 입이 열린다.
근간은 천지를 물들이고, 무릎 꿇렸던 치천마역천지공.
거기에 더불어 모든 것을 집어삼 키고 파괴하고 붕괴해내는 혼돈의 힘을 더해낸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며 세상을 혼 돈으로 물들이는 무공이 지금 서준 의 손을 통하여 만들어진다.
“혼천마공(混天魔功), 제1식, 무 간(無間).”
감히 그 이름이 아깝지 않았다.
서준은 손에 잡고 있던 공간, 세 계의 흐름을 쥐고서 강력한 의념을
흘려 넣는다.
단지 그뿐만으로도 서준의 손이 너덜너덜하게 찢겨 피가 흘렀다.
투두둑-!
다시 한번 팔의 근육이 박살 나 고 재생되는 것을 반복한다.
날카로운 감각으로 인해 팔에서 느껴지는 감각이 세포 하나하나에 전해지며 고통이 더욱더 강렬해진 다.
커다란 고통이 서준의 전신을 순 간적으로 짜르르 울려왔다.
‘아직도 온전히 다뤄낼 수 없다 니……
정말로 난폭한 힘이었지만, 그만 큼 위력도 어마어마했다.
손아귀에 쥐고 있던 세계가 부서 지고 붕괴하더니, 어느 순간, 폭발 한다.
콰오오-!
거대한 회색빛 회오리가 대기를 집어삼키고 빨아들인다.
회전하는 혼돈의 힘 속에서 세상 의 법칙과 불균형이 서로 뒤엉키고 충돌시키고 파괴하기를 반복한다.
그 세계 안에 있던, 에레미아의 심검을 휘감았고, 그 안에 담긴 업 과 념 또한 예외도 아니었다.
꽈드득-
분명, 모든 것들을 집어삼킬 수 있는 포악하고 강한 힘이긴 하였으 나 아직 서준이 완전히 다뤄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절대경지에 오른 검사인 에레미아가 그 틈을 놓칠 리 없었다.
[고작 이 정도로 내 심검을 부숴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가.]
붕괴하는 세계 속에서 외침을 내 뱉으며, 마음을 다잡는다.
서로 동수를 이루던 힘의 균형이 깨지기 시작하고 서준이 밀려나기
시작한다.
[그만 발악하고 죽어라!!]
에레미아의 심검이 시야를 뒤덮 어오고 있었지만, 서준의 눈동자에 는 여전히 강한 투지가 어려 있었다.
“나는 투신(퐤神), 투쟁을 업으로 삼아왔고 살아갈 존재.”
애초에 처음부터 어려운 싸움이 란 걸 알고 있으면서도 벌인 싸움 이자 투쟁이다.
‘고작 이 정도로 무너지는 나약 한 존재가 아니란 말이다.’
등 뒤, 어깨 위에는 책임감이라
는 이름하에 수많은 생명의 목숨이 걸려있었다.
여기서 포기하고 무너지게 된다 면 자신을 믿고 따라온 이들을 배 신하게 되는 것이었다.
힘들게 다시 만난 가족들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렇기에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패배할 수 없었다.
“이 싸움은 내가 이겨!”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붓고 한계를
넘어설 것이다.
[※경고, 사용자가 힘에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무리하게 힘을 사용할 시 육체에 치명적인 무리가 갈 수 있습니다.]
여기서 밀려나게 된다면 어차피 죽음이다.
아니, 애초에 선택할 수 있는 것 은 오직 전진뿐이었다.
그렇기에 두려워하지 않는다.
두려워할 필요 없다.
가진 천 년에 달하는 경험과 기 억.
나 자신, 스스로의 가능성과 모 두의 힘을 믿는다.
[가이사의 지도의 효과가 강제로 재발동됩니다.
[드워프족, 휘노소프와 무인, 무 명신의, 광무혈마의 스테이터스만큼 상승합니다.]
[인간, 한석훈, 양정화, 한서연이 보유한 스테이터스만큼 상승합니 다.]
[모든 스테이터스(힘, 민, 체 내) 가 약 3100 중가합니다.]
마지막 힘이 서준을 보태고, 이 윽고 회오리치던 혼돈의 힘이 에레 미아의 심검마저 집어삼켰다.
[네놈 대체 정체가 무엇이냐-!!]
눈앞에 있는 강대한 그 힘만으로 도 놀람을 금치 못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다.
서준의 등 뒤에 신형이 모습을 드러내며,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내뻗고 있는 팔을 함께 지탱한다.
분명, 한 명으로만 보자면 보잘 것없고 나약한 손길이다.
그런데 그 숫자가 수백, 수천에 달하기 시작한다.
서준의 등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신형들이 모두가 힘을 보태고, 하 나가 되자는 의지를 불어넣는다.
수천, 수만에 달하는 손길들이 벗겨지고 박살 난, 서준의 팔을 지 탱해준다.
[이게 무슨!]
이건 왕, 아니 저 하늘 높이 있 는 대신의 힘을 마주하고 있는 듯 한 기분이 든다.
저도 모르게 당황을 보이고 마음 의 틈을 보였다.
틈이 생긴 심검은 나약하기 그지 없는 것이었다.
챙 _
혼천마공과 부딪히고 있던 심검 이 너무나도 허망할 정도로 볼품없 게 부서진다.
[말도 안 되는…….]
섬뜩한 소리와, 말아 쥔 주먹에 전해지는 기묘한 감촉과 함께 비릿 한 혈향이 코끝을 스친다.
[끄어아아아악-!]
비명을 내지르는 에레미아의 몸 이 기이한 형태로 억눌리고 마구잡 이로 뒤틀리기 시작했다.
[이 에레미아가…… 고작 이런 곳에서……!]
이윽고, 혼천마공에 짓눌린 채로 당황하며 외치는 에레미아의 모습 이 완전히 붕괴해 자취를 감추었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