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권 24화
174화
놀람을 감추지 못하는 테메누를 향해 서준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러고는 휘노소프에게 질문했 다.
“그럼, 이제 테메누를 처벌할 수 있게 되었습니까?”
넋이 나간 채로 백화를 바라보던 휘노소프가 서준의 질문에 황급히 정신을 다잡았다.
“법관은 들어라!”
어느덧, 휘노소프의 목에서 과연 왕의 위엄 있는 목소리가 흘러나왔 다.
“감히 신하 된 자로서 왕보다 회 의에 늦고도 뻔뻔했던 모습과 감히 어명에 반발했던 테메누, 그리고 그를 옹호해 마지않은 원로들의 처 벌에 대해 공포하겠다.”
휘노소프의 냉혹한 발언에 원로 들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 리기 시작한다.
“폐, 폐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곧 죽겠다는 생각에 살고자 하는
의지가 가득 실린 원로의 애원에도 휘노소프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그대들은 양심마저 땅에 버리셨 소? 그간 궁에서 나의 취급은 차고 넘친 궁중 악사보다 못했소. 그걸 잊었단 말이오? 그대들의 그런 모 자란 행동이 나뿐만 아니라 우리 왕궁을, 드워프족을 욕보였단 말이 오!”
붉게 물든 눈동자로 원로들을 바 라보며, 울분을 토한 휘노소프가 다시 고개를 돌린다.
그러고는 테메누의 눈동자를 서 늘하게 노려본다.
“그, 아니, 우리 왕국의 역사와 옛정을 생각해서라도 제, 제발 한 번만 선처하여 주시옵소서, 폐 하……
오만했던 테메누의 모습은 온데 간데없었다.
이제는 정수리가 다 보이게 고개 를 숙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에 휘노소프는 대 꾸조차 하지 않았다.
“이하 원로, 열 개의 망치는 지 하 감옥에서 3개월 동안 구금 후 자격 박탈, 반역죄인 테메누는 삼 족을 멸하고 효수에 처한다!”
마침내 왕의 선고가 내려진다.
무거운 형벌만큼이나 숨이 멎을 것 같은 정적이 내려앉는다.
꿀꺽-!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만이 회의 장에 울려 퍼지는 순간이었다.
“아,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너 무 과한 처사입니다! 우리 왕국의 부국강병을 위해서도 힘을 써온 저 희 원로들을 벌하겠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테메누가 발악에 가까운 말을 쏟 아낸다.
“이 나라를 올바르게 성장시키기 위해 우리와 같이 힘써온 원로의 공로를 인정해주지는 못할망정 형 벌에 처한다니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나라의 통치자 인 나의 의견에 또다시 토를 달겠 단 거냐?”
“합당한 권리를 찾으려고 하는 것뿐입니다!”
“모순이다, 지금의 나 또한 왕으로서의 합당한 권리를 행사하고 있 을 뿐이다.”
두 드워프가 내뿜는 기세, 살갗
이 베일 것 같은 날 선 공기가 회 의장 내부를 가득 메운다.
치열한 신경전을 이어가던 테메 누가 원로들을 향해 매우 크게 소 리 쳤다.
“자네들은 이런 부당한 처사들을 받아들일 생각이시오?!”
그간 힘들게 일궈 놓은 것들을 모두 잃어버리게 되는, 극형을 앞 에 두고 있는 원로들이 죽기 살기 로 모두 테메누의 말에 동의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테메누 님 말이 옳습니다, 저희 의 후대를 위해서라도 이런 부당한
역사를 남겨서는 아니 될 노릇이지 요!”
곳곳에서 쏟아지는 야유에 왕의 눈가가 차갑게 가라앉는다.
“지금 그대들은 반란을 벌이겠다 는 것이오?”
“미친 왕을 왕좌 위에 앉혀 둬서 는 안 되는 법입니다.”
지금 테메누, 원로파가 가진 힘 은 매우 강했기에, 정면에서 맞붙 는다면 정말로 휘노소프를 몰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휘노소프에게는 든든한
지원군이 있었다.
휘노소프가 고개를 돌려 서준을 바라본다.
“다시 염치가 없게 되었습니다 만, 애석하게도 지금의 저는 원로 를 이길 수 없습니다. 힘을 빌려주 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서준은 드워프 왕국의 역사에 대 해서는 제대로 알지 못했다.
개개인이 가진 사상이나 신념이 모두 다르듯 지금은 알량한 정치 싸움으로 대의를 보지 못하고 있었지만, 분명 서로가 정의라고 칭하 는 사건 혹은 합당한 이유가 있었
을 것이다.
누가 옳은 것이고, 누가 그른 것 인지 함부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것 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히 판단할 수 있었다.
‘원로들은 나에게 보여선 안 되 는 무례를 저질렀다.’
휘노소프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알고, 그의 치부를 보여 스스로의 잘못에 대한 용서를 구했다.
그런 반면, 원로들은 서준의 기 를 꺾기 위한 용도로 무례를 보였 을뿐더러 강한 적의를 보여 왔다.
그렇기에서준의 선택지는 정해 져 있었다.
“도와는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보수를 받을 것인데 괜 찮겠습니까?”
“제 권한으로 드릴 수 있는 것이 라면 뭐든지 받아들이겠습니다.”
“그거면 됐습니다.”
앞으로 걸음을 내디디는 서준의 모습에 테메누의 등 뒤로 식은땀이 비 오듯 홀러내리기 시작한다.
그도 그럴 것이 서준은 신의 불 꽃이라 불리는 꺼지지 않는 불꽃을 만들어낸 존재.
서준의 정확한 힘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으나, 적어도 힘의 격차가 매우 크다는 것쯤은 모두가 알 수 있었다.
“인왕이여!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왕에게 말할 조건의 두, 두 배, 아 니! 세 배를 무조건 내어드리겠으 니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테메누의 외침에서준이 손을 턱 에 괴었다.
“ 흐음......
확실히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기반이 너무나 허약한 왕정파의 세력을 생각하면, 강권을 쥐고 있
는 테메누가 있는 원로파를 돕는 것이 현명한 판단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건 싫단 말 이지.”
단순히 편함을 위해 씻을 수 없 는 치욕을 주고 적의까지 보였던 이들과 손을 잡고 싶은 생각은 추 호도 없었다.
단호한서준의 거절에 테메누가 목소리를 낮게 깔고는 위협을 가했 다.
“이성적으로 생각하십시오. 인왕 께서 강한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 이지만, 우리 열 개의 망치가 힘을
합치면 다른 이야기가 되지 않겠습 니까?”
허세로 내뱉는 말은 아니었다.
‘확실히 차원 제일의 공방.’
무장하고 있는 아티팩트들의 수 준이 가히 뛰어났다.
최소 A급 이상에 달하는 아티팩 트들로 전신을 무장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야말로 궤를 달리하고 있다 해 도 과언이 아니었다.
지잉-
심지어 몇몇 개의 아티팩트들은
벌써 요란한 소리와 함께 마법을 발현하려 하고 있었다.
테메누가 흉흉한 붉은빛을 내뿜 는 아티팩트를 손에 쥔 채로 서준 을 바라본다.
“마지막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지금이라도 우리의 손을 잡으십시 오!”
칠흑의 기운을 주변으로 가득 뿌 리고 있는 서준이 비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뭐, 장비도 물론 중요하지. 하지 만 헛바람 들지 말라고.”
착용하고 있는 아티팩트가 뛰어
난 것은 비단 드워프들뿐만이 아니 었다.
서준은 오히려 이들보다 더 좋은 아티팩트를 보유하고 있었다.
자세를 다잡자, 자연스레 정복왕 의 수투가 모습을 드러낸다.
무구를 보는 눈은 확실한지, 수 투를 바라보고 있는 드워프들 눈에 당황이 어리기 시작했다.
“정복왕의 수, 수투가……
“정말로 정복왕의 힘을 개방해내 었단 말인가?!”
수투의 모습에 입을 다물지 못하 고 있는 드워프들을 향해 서준이
신형을 놀린다.
“그렇게 놀라고 있을 때가 아니 잖아?”
어느덧, 서준의 신형은 원로들의 중심지로 파고든 후였다.
다소 멍한 표정으로 무기를 쥐어 잡은 원로의 비어 있는 옆구리를 향하여 검은 기운이 감긴 주먹이 쇄도했다.
퍼억-!
육중한 소리와 함께 원로의 신형 의 허공을 노닐더니 이내, 근처 벽 면에 처박혔다.
“크흡.”
단 일격에, 아티팩트로 무장하고 있던 원로가 피를 토하며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
“이게 무슨……?!”
“괴, 괴물이다!”
혼란이 빚어지고 있는 원로들의 모습에 테메누가 다급히 소리를 내 지른다.
“당황하지 말고 침착하게 놈을 포위해라!”
적지 않은 세월을 살아오며, 산 전수전을 겪은 것인지 황급히 정신 을 다잡고는 진형을 구축하는 데 성공해낸다.
“더는 도망칠 수 없다!”
“우리와 척을 진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 주도록 하겠다.”
원형의 진, 그 안에서준을 가둬 놓았다고 생각한 것인지 원로들은 흉흉한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물론, 서준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도 하찮은 모습이었다.
“꿈은 클수록 좋다잖아. 부단히 노력해 보라고.”
비웃음 가득 섞인 서준의 말에, 서로를 바라본 원로들이 비릿한 미 소를 짓기 시작했다.
“오만이 하늘을 찌르는군, 결국 최하위 하등 종족인 인간 따위가 수투를 개방하고, 힘을 빌어냈다고 너무 태도가 건방져……
개방된 정복왕의 수투를 본 뒤로 부터 서준이 보여준 힘이 본연의 힘이 아닌 수투의 것을 이용했다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 테메누는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띠고는 오만 한 표정으로 말을 내뱉고 있었다.
당연히 모두가 착각이었지만, 굳 이 입 아프게 바로잡을 필요가 없 었다.
“직접 겪어보면 알 거야.”
“최하위 종족 주제에 끝까지 오 만을 부리는군.”
이렇게 인간을 무시하는 테메누 의 말을 듣고 있자니, 괜스레 뿌듯 함이 밀려오기 시작한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선택을 잘했 는걸.’
테메누가 왕이 되었다면 드워프 들과 연합을 체결했어도 무시했을 것이었다.
원하던 연합의 모습이 아니었을 거라는 말이었다.
휘노소프를 왕으로 남겨둬야 할 이유가 더더욱 명백해졌다.
타닥-!
“열 개의 망치여! 겁먹지 마라! 저 수투만 뺏으면 상황 종료다!”
가장 선두에서서 흉흉한 기세로 검을 들이밀며 달려오던 테메누의 육신이 일순간 암전되었다.
아무런 사전 동작도, 예고도 없 이 내리친 뇌전.
“……?!”
원로들은 입을 다물지 못해가며 놀람을 표하고 있었지만, 이건 시 작에 불과했다.
이후 천장을 가득 메운 검은 구
름이 뭉쳐있는 원로들의 몸에 그대 로 내리꽂혔다.
콰광.
자랑스럽게 여기던 아티팩트가, 봄에 눈 녹듯 녹아내려 소멸해버렸 다.
....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현 실에, 휘노소프와 우르누이의 눈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거세게 흔들 린다.
“맙소사……
서준은 감탄을 감추지 못하는 두 드워프들을 바라보며 피식- 미소를
지어 보였다.
“도움을 드리긴 했는데 제가 뒤 처리까지 해드려야 하는 건 아니 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뒷일은 저희가 모두 처리할 테니 이제 편 히 쉬고 계십시오.”
말을 내뱉은 휘노소프는 고개를 숙여 극진히 예를 보였다.
*
국가의 주축이라 할 수 있는 원 로들이 모두 죽고 원로파의 중심인 테메누 가문이 몰락하는 엄청난 일 이 있었지만, 드워프 왕국에는 큰 혼란이 찾아오지 않았다.
그 사실은 다소 놀랍긴 했지만, 휘노소프의 말을 듣고 있자니 어느 정도 납득 가는 일이었다.
“애초에 대부분의 드워프들은 이 런 복잡한 일보다 무구 제작에 몰 두하는 편입니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장인 정신 으로 무장한 채로, 대장장이의 일
에 몰두하는 것이 바로 드워프였다.
혹여나 이번 테메누의 죽음으로 인해 꺼지지 않는 불꽃이 사라졌다 면 모를까, 유지된다면 아무런 문 제가 없다는 말이었다.
한 왕국, 차원의 주요 세력이 변 화한 거대한 사건에 비해서 다소 황당한 후일담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다소 황당하긴 하다만……
뒷머리를 긁적이고 있던 서준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편 리하고 쉬운 길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는 법이었고, 서준도 마찬가지였 다.
많은 시간과 특별한 노력을 들이 지 않았음에도 드워프 왕국 내의 모든 문제가 깔끔히 해결되었는데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 가?
“저희한테는 엄청 좋은 일이네 요.”
말을 내뱉는 서준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피어나고 있었다.
귀환한 천마는 만렙 플레이어